충절인가, 애착인가! 살고자
시류에 편승할 수는 없어

청계산 - 고려 최후 충신들의 서러운 충절

by 장순영

미세먼지 한 점 없이 화창한 봄날이다. 경기도 성남시 운중동에서 친구 셋과 함께 청계산을 오른다.

운중동 버스 종점에서 걷기 시작해 옥녀봉 아래 양재동 화물터미널로 내려가기로 한다. 청계산의 가장 긴 길을 종주하는 코스인 셈이다. 한국학 중앙연구소를 조금 오르면 작은 개울가에 국사봉 방향을 알리는 팻말이 걸려있다. 잘 다져진 돌계단을 올라 외곽 순환도로 아래의 굴다리를 지나면서 청계산으로의 본격 등산로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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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숨을 몰아쉬며 오르다 보면 능안골에서 국사봉으로 오르는 주 능선과 합류하게 된다. 이 삼거리에서 국사봉까지는 완만한 오름세다. 국사봉 못 미쳐 전망 좋은 봉우리에 올라서서 광교산, 모락산, 수리산에 관악산을 두루 눈으로 이으며 숨을 돌린다. 광교산에서 백운산을 거쳐 바라산과 우담산을 지나고 청계산에 이르는 이른바 광청 종주 구간의 스카이라인을 눈여겨보게 된다.


볕 뜨거운 산정,

지치고 땀 젖은 억지 미소 짓지만

서로를 다감하게 끌어안는다.

보이는 것마다 푸릇한 생동,

속에 들어는 것마다 환희의 빛이다.

아주 멀리 눈길 던져도 튕기듯 반사되어 돌아온다.

그 되돌림 속에 시름과 한숨 사라지고

미소와 긍정, 그리고 삶의 참한 미소가

소담스레 담겼으면 좋겠다.



왕 씨의 신하로 살아왔으니 왕 씨의 신하로 죽으리라




저기 백운산과 바라산을 잇는 소담한 산길에는 의왕대간이란 이정표가 자주 눈에 띈다.

고려가 망한 후 충신들이 도읍인 개성에서 이곳으로 몸을 피해 왕王 씨를 모시고 기리고자 왕의 획이 들어간 의義 자를 써서 의왕이라 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래서 의왕시도 생긴 듯한데 고려 말부터 조선 초의 일화가 유독 많은 곳이 이 부근의 산들이다. 바라산은 망산望山이라 불렸었는데 고려 수도 개성을 바라본다는 의미를 풀어 바라산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고려 때 안렴사를 지냈던 조견은 그의 형 조준이 이성계를 도와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청계산으로 들어갔다. 태조 이성계가 벼슬을 내리고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여생을 마친다.


“내 묘비에 고려 때의 벼슬만 적고, 조선 때의 것은 적지 말도록 해라.”


그렇게 유언하고 눈을 감았는데 자식들은 후환이 두려워 개국 이등공신 조견 지묘라고 묘비를 세웠다. 그런데 그날 밤 벼락이 쳐 개국 이등공신이라는 글자만 부서졌다고 한다. 살다 보면 똑같은 상황이 재현된다고 해도 또다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현실을 꺾고 뒤틀어서도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필연이고,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다.

조견 또한 굴절된 삶에 휘둘리다 스러지는 걸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여 필연적 운명을 맞이한 인물이었다. 잠시 고려와 조선의 간극에서 벌어지는 충절과 배신을 새겨보다가 광청 마루금에서 눈길을 거두고 오늘 청계산 산행의 첫 봉우리 국사봉으로 향한다.

고려 말 목은 이색은 청계산의 옛 이름 청룡산을 이렇게 읊었다.


청룡산 아래 옛 절

얼음과 눈이 끊어진 언덕이

들과 계곡에 잇닿았구나

단정히 남쪽 창에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종소리 처음 울리고 닭이 깃들려 하네


중턱에 닿자 갑작스레 몰아치는 바람에 진달래 마른 꽃잎이 떨어진다, 오다 만 봄이거늘 한여름 재촉하나 싶어 오던 길 돌아보니 곳곳마다 초록으로 속속 물들이는 중이다. 청계산 첫 봉우리, 국사봉(해발 542m)에 이르렀다.

화강암 기단 위에 커다란 바위를 올린 정상석을 보며 그제야 굽었던 허리를 곧게 편다. 국사봉에서도 역사는 고려 멸망의 시간대로 이어진다.


“나라가 망했는데 목숨을 부지하는 건 개와 다름없다.”


고려 충신 조윤은 그래서 고려 멸망 후 자를 종견從犬이라 지었다. 개는 그저 주인을 연모할 뿐이라는 의미이다. 진정한 충신의 오롯한 충심을 어떻게 가늠하겠는가마는 국사봉과 망경대를 오가며 망국의 슬픔을 곱씹었을 조윤의 가슴속이 얼마나 찢어지고 망가졌을지는 헤아려지고도 남음이 있다.

국사봉國思峰은 그렇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명명된 곳인데 낮지만 넓게 뻗은 소나무의 푸름이 충절을 대변하듯 의연하게 정상석을 지키고 서 있다.


연두색 수림 사이로 드문드문 봄꽃들이 피어나는 중이다



망국의 한은 달래지는 것이 아니더라


여기서 청계사 쪽으로의 하산로를 지나쳐 지나쳐 이수봉으로 간다. 이수봉二壽峰(해발 547m)은 조선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이던 정여창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이곳에 숨어 두 번 위기를 모면했다고 지어진 명칭이다. 그의 호 일두一蠹도 한 마리 바퀴벌레라는 자괴적인 의미를 지닌다.

정몽주, 김굉필과 함께 성리학의 대가라 칭송받았던 일두 정여창 선생은 갑자사화가 일어난 1504년에 죽은 후 다시 부관참시를 당했으니 두 번 살아나 두 번 죽임을 당한 셈이다. 그는 온갖 동물들이 드나들어 오막난이 굴이라고도 불리는 청계산 마왕 굴에서 은거하다가 밤이 되면 망경대 정상의 금빛 감도는 샘물인 금정수를 마시며 갈증을 달랬다. 정여창 선생이 부관참시를 당하자 달빛을 받아 금빛을 발하던 샘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고 하니 자연도 절의를 지키는 쪽으로 기우는 것만은 분명한가 보다.

그 후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물러나고 복관이 되자 붉어진 샘물은 다시 금빛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당시의 정사와 야사가 뒤섞여 많은 이야기를 뽑아내는 이수봉 너른 터에 옛골이나 절고개에서 올라온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여기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망경대 갈림길을 지나 석기봉에서 바위 구간을 우회하여 청계산 주봉인 망경대望京臺(해발 615m)를 찍는다. 이곳 또한 조윤이 이성계를 피해 여기서 막을 치고 고려 수도 개성을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랜 곳이다.


망경대에서의 조망


바위 밑에 금빛도, 핏빛도 아닌 샘이 조그맣게 고여 있는데 이 물이 금정수인 지는 모르겠다. 혈읍재에 닿자 다시 정여창이 등장한다. 성리학적 이상 국가의 실현이 좌절되자 청계산에 은거했던 그가 망경대 아래 고개를 넘다 통분해 울었는데 그 울음소리가 산 멀리까지 들렸다 하여 후학인 정구가 피눈물을 뜻하는 혈읍재라 명명했다고 한다.

청계산은 조윤이나 정여창의 일화에서 보듯 도피 혹은 은둔의 장소였나 보다. 고려 말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명인 목은 이색이 이 산에서 숨어 살았고,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린 뒤 옥녀봉 아래에서 말년을 지냈다고 하니 말이다.

긴 길을 걸어와 막바지 청계산을 지나면서 문득 제로섬 게임 zero sum game의 이론이 떠오른다. 해외 원정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했다거나 인터넷 도박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유명인들이 화두에 오르곤 했다.

고스톱이나 포커게임 등은 누군가가 따면 반드시 그만큼 잃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 간에 따거나 잃은 돈의 합은 거기 참가한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의 액수와 같다. 딴 사람은 희희낙락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은 바로 옆 사람의 자조적 한숨인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 정권이 기존의 정권을 뒤엎고 들어서는 허다한 사건들은 고려가 조선에 넘어가는 과정처럼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판가름 나는 win-lose게임이다. 시대의 음지로 물러선 정몽주, 조윤, 정여창, 이색 등과 달리 동시대를 풍미했던 정도전, 이방의, 배극렴 등은 개국공신으로 새 시대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다 같이 win-win이 될 수 없고 게임에 참가한 이들의 이익과 손실을 모두 합하면 그 합이 반드시 ‘0’zero이 되는 제로섬 게임을 떠올리고 만다.

어찌 되었건 청계산은 지조와 절개의 터전으로 그 유래에 깊이 스며들어 좋은 느낌을 지니고 싶은 곳이다. 지금은 도심의 허파이자 커다란 쉼표 역할을 하는 청계산이다. 그런 산이 패자의 음지로 폄하되는 게 싫다고나 할까.

길 좋은 능선을 따라 매봉(해발 583m)에서 숨을 돌리고 이어 매바위에서 1240계단을 내려선다. 1240계단은 숫자 1이 적힌 맨 아래 첫 계단부터 1240이 적힌 마지막 계단까지 일련번호가 적혀있다. 청계산 정기를 듬뿍 받아가라는 팻말이 적힌 돌문 바위를 지나고 원터 고개를 지나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 옥녀봉(해발 376m)까지 내달았다.

전국의 많은 산에 옥녀봉이라는 이름의 봉우리가 있다. 내려오는 전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청계산의 옥녀봉은 봉우리 모양이 예쁜 여성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숱하게 봐온 옥녀봉이지만 그녀에게서 미모가 딱히 눈에 들어온 적은 없던 것 같다.

정부 과천청사, 경마공원 등 과천시 일대를 내려다보고 마지막 하산 길에 접어든다. 화물터미널 갈림길을 지나 통나무 계단을 내려서자 불현듯 시대를 접은 고려를 넘어선 느낌이다. 역시 양재동 화물터미널 날머리에 도착하니 건국 조선으로 시간 이동을 한 듯하다.


국사봉 거쳐 이수봉 지나도록 햇살 아직 뜨거운데

매봉 아랫길 일천이백사십 계단 밟아 옥녀봉 이르니

희뿌연 하현달 놓칠세라 에메랄드 황혼 뒤쫓누나.


이른 초저녁별 물 양으로 산새 한 마리 공중으로 치솟더니

막 지나온 옥녀봉 서둘러 어둠 뿌려 날머리마저 지우누나.


어둠 가린들 그 산 그대로인걸

세월 흐른 들 갈 산 거기 그대로인걸


내키면 신발 끈 조여 매고 나서면 반기는 곳

거기가 산,

거기가 희망,

거기에 바로 추억 있지 아니하던가.




때 / 봄

곳 / 운중동 한국학 중앙연구소- 청계산 국사봉 - 이수봉 - 헬기장 - 석기봉 - 망경대 - 혈읍재 - 매봉 - 매바위 - 옥녀봉 - 양재동 화물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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