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산, 활짝 펼친 공작의 날개에
깃든 우정의 아름다움

강원도의 산 33

by 장순영

인적이 있건 없건 적막한 산사에 바람 스치면 어김없이 정적을 깨뜨린다.

두드리는 이 없이도 그렇게 풍경은 울리고 만다.

그 소리는 마치 오욕된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것처럼

묵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바람 한 점 되어 공작의 날개에 얹히다


수타사를 산행 들머리로 잡아 홀로 공작산 종주를 하려니 교통편이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원점회귀 코스가 아니면 지방의 다른 산들도 교통 불편하긴 마찬가지지만 그때처럼 방안 찾기에 골몰하게 된다.

홍천으로 가자. 홍천터미널로 가서 시간 잘 맞춰 수타사행 버스를 타자. 그럼 하산 후 서울로 올라올 때는? 으음, 그건 그때 가서 풀기로 하자. 이렇게 수타사 입구에 도착한다. 절정은 아니지만, 드문드문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이른 가을, 평일 하루 휴가를 내고 공작산을 찾았다.

오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아 그럴 거다. 수타계곡이 예전에 왔을 때만큼 물이 많지는 않다. 그래도 물가 수림을 그대로 되비추는 거로 보아 물 맑기는 여전해 보인다.

수타사 입구는 한산하고 경내 또한 한적하여 고요하다. 공작산의 날개깃이 푸근히 감싸 안은 천년고찰 수타사는 708년 우적산 아래에 일월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어졌는데 지금의 자리인 공작산 아래로 옮기면서 이름을 바꾸었다.

작은 바람 한 점이 경내를 돌다가 추녀에 매달린 풍경을 건드린다. 인적이 있건 없건 적막한 산사에 바람 스치면 어김없이 정적을 깨뜨린다. 두드리는 이 없이도 그렇게 풍경은 울리고 만다. 그 소리는 마치 오욕된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것처럼 묵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윽하고도 내면을 휘젓는 풍경 소리에 듣는 이, 그 누가 무심하게 흘려 넘길 수 있으랴.

다른 사찰과 달리 본전 법당이 대웅전大雄殿이 아닌 대적광전大寂光殿(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호)이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큰 영웅이라 한 데서 유래하여 석가모니 부처를 주불로 모신 법당이고, 부처님 좌우에 조상의 극락왕생과 내 생의 행복이 직결되는 아미타불, 그리고 빈자의 구원과 자비의 상징인 약사여래까지 삼존불을 봉안하면 그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부른다.

이런 내력에 비해 대적광전은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으로 장엄된 연화장 세계蓮華藏世界의 교주로서 영원한 진리의 본체이자 법을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을 봉안하는 법당이라고 한다. 주로 화엄종 계통의 사찰에서 대적광전을 본전으로 건립한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직후인 1459년, 부처의 일대기를 우리말로 번역한 최초의 불교 서적인 월인석보(보물 제745호)가 이곳 수타사에 소장되어 있다.

심우 산방 옆에 강원도 보호수로 지정된 5백 년의 주목 한 그루가 있는데 여기서도 지팡이 설화가 등장한다. 1568년 사찰 이전을 관장하던 노스님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았는데 자라난 주목에 스님의 얼이 깃들어 있어 귀신이나 잡귀로부터 수타사를 지킨다는 설화가 그것이다.

사찰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데 안쪽으로 생태공원을 조성하였다. 수타사의 일원의 넓은 산림에 자생식물과 향토 수종을 심고 복원한 역사문화 생태숲이다. 다양한 숲 속의 주제를 체험하고 탐구할 수 있는 교육 및 체험의 장소로 구성되어 있다.

약 40여 분 생태숲을 따라 거닐며 둘러보고는 공작산으로 향한다. 수타사를 산행기점으로 잡아 공작산을 오르는 코스는 많이 이용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 코스를 택했는데 역시 등산객 한 명 보이지 않는다.

수타사에서 계곡을 끼고 올라 1.2km 지점에 이르러 궝소라는 계곡에 닿는다. 아름드리 통나무를 파서 만든 소 여물통을 궝이라 하는데 협곡이 궝의 모양이라 그렇게 부른다고 적혀있다. 다시 보니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데 아무튼 소가 물 먹기엔 충분한 수량이다.

공작산-궝소.jpg 궝소, 여기까지 소가 올라와 물을 먹기엔 꽤 험한 길이다


다시 소나무와 여러 종의 활엽 수목이 총총 어우러진 빽빽한 숲길을 오른다. 고도를 높일수록 나무들은 갈색으로 혹은 붉게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계절이 변신하는 모습을 보며 올라오다 보니 약수봉(해발 558.6m)이다.

구름이 뗏목처럼 맑은 하늘을 가볍게 얹고 흐른다. 높고 엷은 하늘엔 어젯밤 머물던 자국처럼 희뿌연 보름달이 있었는데 그 위로 꽤 친숙한 얼굴 하나가 포개진다.

활짝 펼친 공작의 양쪽 날개에 얹혀 함께 하늘을 날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공작산 정상 일대의 양 날개를 바라보니 갑자기 스케줄이 생겨 같이 오지 못한 친구가 생각난다.

문경지교刎頸之交, 공작이 날개를 활짝 펼쳤을 때 그 우아한 자태에서 멋지고 아름다운 것들을 연상하고 비교하겠지만, 서로 죽음을 함께 할 수 있는 막역한 사이 혹은 그 사람을 대신해 죽을 수 있다는 깊은 우정을 의미하는 사자성어를 떠올리게 된다.

옛 중국 조나라의 명장 염파는 한때 충신 인상여의 출세를 시기하여 불화하였으나 올곧게 나라를 위하여 참는 인상여의 넓은 도량에 감격한다. 염파는 인상여에게 진정으로 사과하면서 거듭 친한 사이가 되어 죽음을 함께해도 변하지 않는 우의를 이어나간다.


“나한테도 그런 친구가…….”


날개를 활짝 펼친 공작의 찬란한 아름다움에 입을 다물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저 긴 꼬리를 늘어뜨린 모양새로 거닐 때, 온몸을 다 펼친 공작의 자태를 직접 보지 않고는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았었다. 그 공작의 날개 펼친 모습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우정이 아름답다고 여겼었다. 그런 친구에게 마음으로 썼던 오래 전의 서신을 둥근 낮달을 보며 펼쳐본다.

공작산.jpg 공작산에서의 조망


그 불길이 삶의 의미로 끝도 없이 이어지기를


의와 인과 덕이 있는 자네는 멋지기도 하네만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이 든 적이 많았네. 가끔 느닷없이 물결을 일렁이게 하고 때론 밝고 청초한 웃음으로 기쁨을 소리 내 기도 했네. 스스로보다 상대를 더욱 아끼고 배려하는 자네는 친구라는 말, 우정이란 표현의 진정한 의미를 새삼 일깨워주곤 했지.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려 세상을 하찮게 여기는 자가 수두룩한 이 세상에 자네는 친구로서 정녕 촛불이고 소금이나 다름없었네. 빛이고 소금인 친구를 둠으로 해서 나는 종종 형언키 어려운 환희를 느낄 수 있었다네.

세상의 악을 증오하는 만큼 자네는 선과 순수를 사랑하지. 아직도 더 많은 시간 동안 자네의 선함과 순수함을 볼 수 있기에 난 지금 감사드리고 있단 말일세.

자네의 덕을 떠올릴 때마다 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쁨을 느끼고, 자네를 만날 때마다 의와 인을 마주하는 행복을 만끽하기에 나는 자네와 만남을 약속하고 나면 가슴이 뛰고 설레기까지 하는 걸 의식한다네. 그 설렘은 가득 채워진 우정의 에너지로 인해 가끔은 나를 미어지게도 한다네. 살아오는 동안 너무나 많은 이기심과 동물적 본능을 보아왔기에 더더욱 감동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말일세.

우울함이 극에 달했던 어느 날이었네. 자넬 만나 술 몇 순배에 바로 세상에 우울하단 단어가 왜 생겼나 싶었다네. 넘어서서 탐내는 짓 안 하고 남의 맘 쓰라리게 아니하여 물 흐르듯, 서로의 가슴에 정 흐르게 했던 자네는 늘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기분을 갖게 했지.

애써 가꾼 난초에서 꽃이 필 때의 환희로움에 견주겠는가. 까만 하늘에서 희미하게 점멸하던 별들, 자네를 만나 악수할 때 그 조그만 점들이 불야성처럼 반짝거림을 본다네. 그렇기 때문에 자네는 이제 미세하여 이름조차 없는 별이 아니라네. 자넨 나뿐 아니라 모든 친구에게 있어 부서지듯 흐르는 은하수일세. 적어도 나는 찬란하게 내 주변을 밝히는 영롱한 빛을 자네한테서 보았다네.

내게 있어 절절한 소망 중 하나는 그 별빛의 흐름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일이네. 자네의 섬세한 배려심이, 그리고 한결같은 마음씨가 자네 인생에서 큰 화염 일구기를 또한 소망한다네. 그 불길이 삶의 의미로 끝도 없이 이어지기를 늘 기도한다네.

만일 한쪽 문이 닫히면 언제나 다른 쪽 문이 열리듯 그곳에 나는 자네의 친구로서 존재하고픈 심정이라네. 자네에게 주어진 삶, 자네가 소망하는 삶에 자네가 충분히 만족하기만 한다면 자넨 이미 완전한 존재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걸세. 자네가 늘 커다란 웃음소리를 내며 눈빛을 더욱 빛내기를……,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네.

죽어서도 자네의 친구가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 끼적거려 보았네.


지금은 함께 산행하는 산우이기도 한 병소와의 우정을 떠올리다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선다. 많이 지체하고 말았다. 이정표에 4.6km라고 표기된 공작산 정상으로 걸음을 옮긴다.

다시 우거진 숲길을 내려서서 공작산 양편으로 신봉로와 굴운로로 갈라지는 사거리 임도에서 수타사 반대편의 공작산 쪽으로 이어간다. 활짝 날개를 펼친 형상이라 하여 지은 이름이 공작산이다. 멀리 다른 산에서 보면 실제로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간간이 쇠로 박은 발 디딤대도 밟고 밧줄도 잡고 올랐다가 다시 내려서며 정상에 다가선다. 정상 주변은 더욱 가을을 닮아가고 있다.

공작산-공작골 노천저수지를 중심으로 한 조.jpg 공작골 노천저수지를 바라보며 홀로 산행을 명상한다


경사진 바위 구간 몇 곳을 올라 정상에 다다르자 정상에도 인적 없이 바람만 스쳐 지나간다. 해발 887m의 산정은 사방이 훤하게 트여있다. 정상부 소나무에 가려 치악산이 보이지 않지만 다른 쪽은 조망에 문제가 없다. 날씨도 청명한 편이어서 산그리메 넘고 또 넘어 마루금 짚어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강원도의 여느 산에서와 마찬가지로 휘하 고봉들을 거느린 가리왕산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오대산과 계방산이 하나처럼 붙어서 아스라하고 레이더 기지를 품은 가리산, 그리고 춘천 쪽으로 금병산, 삼악산이 먼 이웃처럼 느껴진다. 북동으로 흐릿한 설악산에 눈길을 던지다가 풀었던 배낭을 멘다.


“오늘 유일한 길손이신데 벌써 가신다니 서운하구먼.”

“여름에 친구랑 다시 한번 오겠습니다. 무탈하시기 바랍니다.”


내려가는 길은 주 등산로인 공작현 방향으로 잡는다. 군업리를 날머리로 잡고 내려가야 종주에 걸맞겠지만 교통편이 맞지 않는다. 지름길이 탈출로이자 제대로 귀가할 수 있는 길일 듯싶다. 내리막길도 울창한 숲길이 많다. 잣나무 숲을 지나 노천저수지를 또 지나고 다행히 등산로 입구에서 만난 산객의 도움으로 홍천터미널까지 동승하게 된다.


“잘하면 병소하고 약속한 시각에 맞출 수 있겠는걸.”



때 / 초가을

곳 / 수타사 입구 - 수타계곡 - 궝소 - 약수봉 - 작은골 고개 - 수리봉 - 안공작재 - 공작산 - 공작현 입구 - 삼거리 - 노천저수지 - 공작골 등산로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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