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1968년 1월 21일, 무장 공비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
<북한산 – 1·21 사태 유일한 생존자, 김신조>
올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다. 한파까지 이어져 그늘진 곳의 눈은 꽁꽁 얼어붙었다. 춥다고 주말을 안방에서 까먹기가 싫어 배낭을 둘러매고 가까운 북한산 들머리로 향한다.
오늘은 구기동으로 가서 비봉능선을 다녀오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산 밑이라 바람이 더 매섭다. 이런 날씨에도 이북오도청 앞에는 꽤 많은 등산객이 산행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북한,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리 헌법 제3조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영토는 현재 실질적 중국령인 백두산 천지 북안까지 해당한다. 군사 분계선 이북의 땅도 대한민국의 영토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북오도위원회가 창설되었고 그 청사가 이북오도청이다.
현실적으로 행정 구역이나 도민들은 존재하지 않아도 통일 이후를 대비한 행정 조직으로서의 한정된 역할을 일임하는 기관이다.
이북 5도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상 도道에 해당하는 황해도,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를 말한다.
승가사도 온통 하얗게 덮였다
이북오도청을 지나 승가사 쪽으로 길을 잡았다. 도심과 달리 산중에는 쌓인 눈이 줄지 않는다. 들머리에서 아이젠을 착용해야 했다. 나무에 쌓였던 눈이 나부끼는데 구간마다 많은 눈이 내리는 것처럼 드센 바람이 분다. 그러고 보니 북한산의 설경을 보는 게 참 오랜만이다. 다른 산이었어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좋아하는 북한산이라 그 겨울풍치가 더 아름답다.
북한산에 대한 찬사나 칭송은 그 어떤 표현도 보편에 불과할 뿐이다. 영글지 못한 단어나 문장으로 북한산의 실체를 표현하는 것은 자칫 경솔한 짓일 수 있다. 올 때마다 늘 새록새록 새롭기에 북한산을 오고 또 오게 된다.
북한산의 겨울을 카메라에 담으며 승가사僧伽寺에 도착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인 승가사는 당나라 고종 때 대중을 교화하며 생불로 지칭되던 승가를 기리는 의미에서 이름 지어졌다.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가 중건과 중수를 거쳐 1957년 비구니 도명道明이 중창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비구니 상륜相侖이 계속 불사하며 이어오고 있다. 창건 이후 조선의 여러 왕들이 행차하여 기도하였고 조선 초기의 고승 함허涵虛가 수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절의 유물로는 보물 제1000호로 지정된 석조승가대사상이 있으며, 경내에서 100m가량 오르면 보물 제215호로 지정된 거대한 마애석가여래좌상이 있다.
승가사를 지나 더 얼어붙은 등산로를 걸어 승가봉에 이르렀다.
하얗게 분칠한 비봉능선에 많은 이들의 다양한 등산복 차림이 마치 곧 다가올 설날을 앞당겨 설빔을 차려입은 것처럼 보인다. 백운대와 만경대, 인수봉의 북한산 정상부로 이어지는 비봉능선 자락은 하도 많이 와서 그런지 늘 동네 앞산에 올라온 느낌이 든다.
비봉 꼭대기의 진흥왕순수비도 오늘은 선이 뚜렷하게 보인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국보 제3호의 순수비 높이는 154㎝, 너비 69㎝, 두께 16.7㎝로 1972년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여 보관하고 있으며 지금 보이는 저 석비는 그 복사본이라 할 수 있다.
사모바위 뒤편 바람이 잔잔한 곳에 자리를 잡고 간단한 행동식과 아직 식지 않은 커피를 마신다. 관복을 입고 머리에 쓰는 사모紗帽를 닮아 이름 지어진 사모바위 아래에는 1968년 1·21 사태 때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남파된 무장 공비 일당이 숨어있던 작은 굴이 있다. 지금 그 자리에 총을 겨누고 엎드린 그들의 밀랍 인형을 만들어놓았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잦은 도발로 남북갈등과 반목이 심했던 1968년 1월 21일, 전국이 충격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31명의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한 것이다.
“나, 청와대 까러 왔수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31명 중 유일하게 투항한 북한 특수부대원이 밝힌 침투 목적이다. 무장 공비나 간첩이 생방송 기자회견을 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때까지 투항 공비 김신조는 전향하지 않은 상태에서 육군방첩대(CIC)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청와대 습격을 위해 선발된 31명의 북한 124군 특수부대원들은 빠른 속도로 청와대 앞 500m까지 침투했다. 그들이 메고 내려온 군장은 무려 20kg. 그 속에는 트렌치코트, 양복, 운동화 등 다양한 내용물이 들어있었다.
“경기도 파주에서 마주쳤던 우 씨 나무꾼 형제 네 명을 살려준 게 결과적으로 실패의 원인이었다. 그들이 신고하지 않을 줄 알았다. 청와대 진입 직전 군인들이 이동하는 걸 알아채고 작전이 실패로 끝나겠다는 걸 직감했다.”
투항한 무장 공비 김신조의 기자회견 당시 발언이다.
“청와대 앞에서 남쪽 군경에 쫓길 때 총 한 발 쏘지 않고 남쪽 인왕산으로 도망갔다가 투항했다.”
김신조는 죽거나 아니면 살거나의 두 가지 갈림길에서 살고자 하는 길을 택했다. 달리 방법이 없어 투항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처음 공개했다.
1·21 무장 공비 침투사태로 인해 무려 250만 명에 이르는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고 군 복무 기간도 연장되었다.
청와대 습격 사건 이틀 후,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동해상에서 북한 해군에게 나포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과 협상에 나선 미국에 1·21 사태에 대한 북한의 사과를 받아달라고 요구했으나 미국이 거부했다.
팔순을 내다보는 서울 성락교회의 원로 목사 김신조는 몇 해 전 모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푸에블로호 사건 당시 북에 납치된 미군 송환을 위해 내 목숨이 거래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124군 부대가 대량 남파될 것이란 내 말을 미군 CIC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미군은 내 말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1·21사태 이틀 뒤 첩보 활동 임무를 띤 장병 83명이 탄 푸에블로호를 보냈다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에 납치됐다. 바로 푸에블로호 사건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미국 정부는 김신조를 넘겨줄 테니 납치 선원들을 보내달라고 했다. 북측은 김신조라는 인물이 누군지 모른다고 대답했다고 하더라. 내 목숨을 건 거래 사실을 당시엔 까마득히 몰랐다.”
1968년 11월, 124군 부대 특수요원 120명이 또 남파되었다.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사건이다. 124군 부대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미국 정부는 이 사건으로 한국에 대해 전면적으로 태도를 바꾸게 된다. 한반도 방위 지원비 명목으로 1억 달러의 원조금을 보내, 한국군의 전방 목책을 철거하고 155마일을 철책선으로 깔게 하였다.
“그제야 미국에서 내 말을 믿었던 거야. 거리마다 콘크리트 탱크 저지선이 만들어지고 향토예비군 창설과 유격훈련도 그때부터 시행됐어. 군 복무도 6개월 연장됐지.”
현재 세계 10대 교회로 꼽는 서울 성락교회의 김신조 원로 목사는 슬하에 열한 명의 자손을 두고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으나 그가 투항하여 귀순한 후 북한의 부모를 비롯해 7형제가 고향 청진에서 공개 처형되었다고 한다.
“나는 124군 특수부대 1기생이었다.”
1·21 사태를 주도한 북한 124군 부대의 창설 배경에 대해서도 창설 기수의 김신조 목사는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김일성이 6·25전쟁 실패를 교훈 삼아 장기전 대신 속도전 수행을 위해 1만 명 규모의 특수부대를 창설하였다. 남한 8도를 육·해·공으로 침투해 단기간에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김일성은 항일투쟁 동지인 김책의 아들 김정태에게 특수부대 창설을 지시했다. 김일성은 전선戰線 없는 전쟁을 염두에 두고 육·해·공 특수부대를 일거에 침투시켜 한 달 이내에 남조선을 장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인민군이 대구·부산·대전 등을 동시 점령하고, 서울만 점령하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제주도를 제외한 육지 여덟 개 도에 특수요원 1000명씩 침투시키는 계획이었다. 서울과 경기도에는 2000명이 서해안과 육상을 통해 바로 투입하게 되어있었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제대로 된 무기 등이 갖춰지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일촉즉발의 사태에 자칫 방어가 실패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시린 등골이 더욱 오싹해진다. 사모바위에서 질퍽해진 산성길을 따라 대남문까지 걸으면서도 생존 중인 김신조 목사가 좀처럼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1968년 당시 북한의 국민소득은 한 사람당 250달러로, 남한의 70달러보다 3배 이상 많았다. 북한은 AK 자동소총과 탱크까지 만들었지만, 남한은 수류탄 만드는 게 고작이었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인 면에서 북한이 월등히 앞섰다.
“남조선이 더 커지기 전에 장악하라.”
김일성이 그렇게 지시했다는데 앞날을 제대로 내다본 것이라 하겠다.
“남한에 정착하고 보니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70년부터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지.”
김신조 목사는 또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죽이러 온 거지. 민간인이나 군인들을 죽이러 온 게 아니다.”
당시 청와대 인근에서의 교전으로 총소리가 난 즉시 그는 남쪽인 인왕산으로 도주했다.
“내가 영리하게 행동한 거지. 북쪽으로 동료들과 같이 가면 총을 쏘게 될 수도 있고, 북쪽으로 작전 병력이 투입돼 살아남기 힘들다는 판단이 섰어. 나는 생포된 게 아니고 투항한 거야.”
투항 후 그가 방첩대와 함께 투항 장소에 갔을 때 두고 온 체코제 ‘피피’ 기관단총과 소련제 ‘떼떼’ 권총을 조사했는데 기관단총 30발과 권총 8발이 장탄된 채 한 발도 발사되지 않은 게 확인된 바 있다.
설상가상이라더니 하산 즈음 또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등산객들 대개가 대남문 이후 뿔뿔이 흩어진다. 여러 갈래 길에서 각자 내려갈 길로 향하다 보니 사자능선 하산로가 비교적 한산하다. 비탈 내리막이라 다시 아이젠을 채우고 올라왔던 지점을 향해 천천히 하산한다.
“서른한 명이 내려왔는데 모두 처참하게 죽고 나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심적 고통과 자책에 시달렸다.”
눈길을 밟고 내려가면서도 얼마 전 인터뷰했던 그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들린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무장 공비 김신조 사진까지 실려 자녀들이 공비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받아 남한에서의 생활도 정신적 고통이 컸어.”
아내의 끈질긴 설득도 있었지만, 교회에 가기로 결심한 것은 자녀들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신조 목사는 “아이들이 교회에 나가고부터 나를 멀리하지 않고 오히려 얼굴빛도 밝아지고 성격도 활달해졌지.”라고 말하더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때부터 북한에서의 삶, 또 남한에서의 삶에 이어 세 번째 신앙의 삶이 펼쳐진 거야.”
때 / 겨울
곳 / 구기동 이북오도청 – 승가사 – 승가봉- 사모바위 – 대남문 – 사자능선 - 원점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