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갑산武甲山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에 소재하여 실촌읍과 퇴촌면으로 지맥을 뻗치고 있는 광주 8경의 하나로 임진왜란 때 항복을 거부한 무인들이 은둔하였다는 설도 있고, 산의 형태가 갑옷을 두른 것처럼 보여서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파릇파릇 새순 돋는 초봄이 오면 실바람에 몸을 맡겨 차분하고 조용하게 호젓한 산행을 하고 싶어 진다.
광주에서 여주를 거쳐 양평까지의 산길
분주하지 않으려 인적 드문 산을 고르다가 떠오른 곳이 광주의 무갑산이다. 오래전 하얗게 변한 겨울 무갑산이 불현듯 떠올라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광주로 길을 잡는다. 무갑산에서 시작하여 앵자봉, 양자산을 거쳐 백병산에서 하산하는 등산로의 총거리가 대략 25km쯤 된다. 봄기운을 충분히 느끼고도 남을만한 거리이다.
광주 초월읍 무갑리 마을회관에서 무갑사로 가는 진입로에도 봄기운이 솟고 있다. 멀리 무갑산 지붕에 깔린 아침 햇살이 따사로운 빛을 발산한다.
자그마한 절집 무갑사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돌아 설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크계단을 따라 오른다. 노송 아래 쉼터에서 바람막이를 벗는다. 온기 풍요한 숲길이기도 하지만 무척 가파른 된비알이 이어지니 얇은 바람막이도 더위를 느끼게 한다.
마을회관에서 2.28km를 오른 능선 갈림길에서 잠깐 만에 무갑산 정상(해발 578m)에 다다른다. 왼쪽으로 관산부터 앵자봉과 양자산이 이어진다. 전면으로는 태화산, 마구산, 노고봉이 백마산으로 길게 마루금을 긋는다. 곤지암리조트 앞으로 37번 국도를 내려다보고 바로 다음 걸음을 내디딘다.
늦가을 추락 시점을 연상시킬 정도로 낙엽이 수북하게 깔린 길이다. 관산 삼거리까지 이어나가 앵자봉으로 걸음이 빨라진다. 편안한 능선이기 때문이다.
막 지나고 있는 겨울의 지독했던 추위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얼었다 녹는 능선 흙길에서 금세 아지랑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것만 같은 분위기다. 길었던 동면도 지나고 나면 한나절 선잠에 불과하다.
무갑산에서 앵자봉 가는 능선 곳곳
한겨울 얼었다가
잦은 봄비에 젖었다가
햇살 겨우 받아 비탈에서 움튼 붓꽃
애타도록 부여안은 잉태의 시간
흐르고 또 흘러
따사로운 봄바람에
태동의 말간 미소 짓는 걸 보니
그토록 길었던 동면도
한나절 선잠이었나 보다
바위에 뿌리내린 소나무가 꼿꼿이 가지를 뻗고 있다
무갑산에서 3.94km를 가붓이 걸어와 소리봉(해발 609m)을 넘어 경사 완만해진 박석고개를 지난다. 풍수지리상 중요한 곳이어서 지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얇은 돌을 깔아 놓은 고개를 보통 박석薄石고개라 하는데 땅이 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흙을 밟지 않도록 돌을 깔아 놓은 곳도 그렇게 부른다. 산길 군데군데 쉬어가라고 나무벤치가 놓여 있는데 오늘 행보가 다소 긴 편이라 좀처럼 앉게 되지 않는다.
앵자봉(해발 667m)에 이르러서야 휴식을 취한다. 꾀꼬리가 알을 품고 있는 산세라 하여 꾀꼬리봉으로 불리다가 꾀꼬리 앵鶯자를 써서 앵자봉이 되었다. 인접한 양자산을 신랑산으로 여겨 각시봉으로 불리기도 했단다.
광주시 퇴촌면을 행정 주소지로 하는 앵자봉 일원은 천주교 성역 순례길로 지정되어 있으며 초기에 천주교인들이 숨어 살았을 만큼 들어갈수록 심산유곡에 들어선 느낌을 받는다고 적혀있다.
지금은 폐사廢寺되었으나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과 관련한 천진암 터가 이 산 아래에 있다. 천주교 수원교구가 중심이 되어 이 일대 신도들의 순례에 필요한 각종 시설을 설치하는 등 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천진암 입구에서도 이곳 앵자봉으로 올라오는 등산로가 있어 무갑산이나 관산으로 갔다가 하산할 수 있다.
통신 철탑이 이어진 등성이 우측의 양자산으로 향한다. 천진암 갈림길을 지나 피치를 올려 헬기장인 672m 봉에 다다른다. 두 번 더 헬기장을 지나고 다시 송전탑을 거쳐 주어재에 이르렀다가 강하면과 하품 2리로 나뉘는 갈림길, 자작나무 군락지를 통과한다. 다시 동오리로 내려가는 삼거리에서 고도를 올렸다가 남한강을 발아래 두고 양자산(해발 709.5m)에 닿는다.
여주시 산북면과 양평군 강하면, 강상면 사이에 솟아 앵자봉과 연맥을 이루는 양자산은 들판에 버드나무가 즐비하다는 의미의 양평楊平과 무관하지 않은데 양평에서 남한강 건너로 항상 버드나무와 함께 보였기 때문이다.
봄을 맞은 용문산 가섭봉과 백운봉에 엷은 구름이 드리웠다. 유명산과 중미산, 소구니산 등을 두루 살피고 마지막 백병산으로 방향을 튼다. 백병산으로 향하면서는 산길이 아니라 맨땅 신작로를 걷게 된다. 양평 MTB 랠리 코스로 조성한 길이다. MTB 랠리를 지나 왼쪽 숲길로 들어서 백병산 등산로로 들어선다. 수도 없이 산악자전거가 달리는 길이라 길 가운데가 움푹 패 있다.
백병산에서 지는 노을을 보고 하산을 서두른다
쇠기둥을 박고 밧줄을 매단 긴 오르막을 거쳐 백병산白屛山(해발 423.6m)에 도착한다. 흰 바위가 병풍을 이룬 것처럼 보여 이름 지은 백병산에서 용문산 아래로 양평 일대와 남한강 물줄기를 내려다보니 분주하지 않은 봄맞이 산행치고는 너무 길었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 가는 교통이 편한 병산리로 하산한다. 제법 가파른 흙길을 내려선다. 무선 간이 기지국을 돌아 굵은 밧줄을 잡고 고도를 낮춰가다가 중부내륙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고 봄 냄새 물씬한 들판을 지나 342번 도로에서 양평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잡아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