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산 30
아내가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나와 스무 해 이상을 살았다는 사실도 위대했지만,
더욱 사랑스럽고 위대해 보이는 건
지금도 나하고 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금은 석모 대교가 개통되어 차량 이동이 가능하다. 대다수 섬이 그렇듯 다리가 세워지지 않아 배를 타고 들어갈 때 섬 여행의 낭만은 배가된다.
석모도 역시 다리가 세워지기 전 강화도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갈 때가 더 섬 같았다. 외포리 선착장에서 승선하는 이들은 새우깡을 사 들고 배에 오른다.
“너무 신기하고 재미나요.”
아내는 처음에 꺼리더니 날렵하게 낚아채는 갈매기들의 새우깡 수탈에 재미가 붙었다. 통통 살이 올랐어도 날렵한 갈매기들이 손에 든 새우깡을 낚아채는데 거칠지 않고 유연하다. 먹거리를 통해 사람들과 친해진 갈매기들은 아예 물고기를 잡아 생계 꾸리는 건 잊어버린 듯하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이 행정 주소지인 석모도席毛島는 해안선 길이가 42km에 이르는데 오늘 걷게 될 해명산에서 낙가산을 지나 상봉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가 섬의 중앙을 남북으로 뻗어있다. 석모도 남쪽의 민머루 해수욕장에서 보는 일몰이 장관을 연출하여 이곳을 서해의 3대 일몰 조망지로 꼽는다고 한다.
은빛 발산하는 바다와 소담한 섬마을 풍광을 눈에 담고
배에서 내려 순환 버스를 타고 전득이 고개로 이동한다. 3월에 막 접어들었지만, 음지엔 녹지 않은 눈이 꽤 수북하다. 등산로는 군데군데 미끄럽다. 잠깐 사이에 서해가 보인다. 눈 산행이랄 수도 없고 봄 산행도 아니지만 모처럼 바다를 보며 걸으니 몸도 마음도 후련하다.
“막상 나오니까 참 좋네요.”
아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이다. 모처럼 가볍게 산행을 하고 바닷가 외포리에서 회도 먹을 겸 외출을 제안했는데 아내의 대답이 석을 죽인다.
“회만 먹으면 안 돼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한번 찔러봤다는 양 아내는 등산복을 찾아 입고 주섬주섬 배낭을 챙긴다. 함께 한라산을 다녀온 후 한 해가 훌쩍 지나서의 동반산행이다.
헐벗은 갈색 나목들이 봄단장하려면 아직은 멀어 보인다. 산 아래 논들은 비어있기는 하지만 네모반듯하게 잘 구획되어 있다. 그 뒤로 주문도와 불음도, 이름 모르는 몇몇 섬들이 아직 동면을 취하는 듯 고요하기만 하고 외포리 선착장 너머로 헐구산에서 고려산, 국수산이 왼쪽으로 몸 낮춰 늘어서 있다. 더 지나와 돌아보면 마니산 뒤로 계양산도 흐릿하다. 아침 햇살에 은빛 발산하는 바다와 소담한 섬마을 풍광을 눈에 담으며 해명산海明山(해발 327m)에 닿았다.
“힘들지 않지?”
“아직까지는요.”
“같이 섬에도 오고 산에도 오니까 좋지?”
“네에~ 여부가 있나요.”
해명산 정상에서 삶은 달걀 하나씩을 먹고 길을 잇는다. 진행하게 될 낙가산도 낮게 몸집 낮춘 가축을 연상하게 한다. 큰 굴곡 없이 부드럽게 능선을 잇고 있다. 그런데 가다 보니 바위 절벽도 있고 완만하게 해안으로 이어지는 바위 언덕도 보인다.
“바다에 송전선이 세워져 있네.”
“응, 여기 석모도를 통해 저기 보이는 주문도로 전력을 보내는 거지.”
육지의 야산에서만 보았던 송전선이 바다를 가로지르며 세워진 게 처음엔 신기했었다. 예전에 친구 동은이와 와보아서 알게 된 풍월을 읊었는데 아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해안 너머 산 아래로 가옥 몇 채 안 되는 마을은 마치 영화 세트처럼 아담하다. 왼쪽 발아래로는 보문사 지붕이 보인다.
“낙산사 가봤지? 거기 있는 홍련암이랑 경남 남해의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 기도 도량이야.”
아내와 산에 오니까 자꾸 아는 체하게 된다. 스스로 존중받기 어려운 남편이었기 때문임을 자각하곤 씁쓸한 웃음을 짓고 만다.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보타 낙가산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는 낙가산(해발 235m)은 정상석도 없고 대신 넓은 마당바위가 있는데 1000명은 족히 앉을 수 있다 하여 천인대라 불리기도 한다. 폭 5m, 길이 40m의 제법 너른 바위이긴 하지만 경사가 있어 1000명이 앉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어 상봉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햇살마저 따사로워 봄기운이 물씬하다. 좌우로 개펄이 펼쳐진 바다를 끼고 걸으면서 기분이 고조되는지 앞서 걷는 아내의 걸음이 경쾌하다. 작은 계단을 넘고 절벽에 세운 철 난간을 지나 산불 감시초소도 지난다.
아내라는 이름, 가장 밀접한 이름이었음에도 막상 부르거나 적으려면 어색하고 난해했었다. 지금은 아이 둘과 네 식구가 살지만 십수 년 시부모님을 모셨던 아내다. 서울시 효부상을 받았을 때 남편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그 효심을 알아준다는 게 너무 기뻤었다.
“살아오면서 단 한 차례도 표현한 적 없지만 역시 당신은 훌륭한 내 아내였소.”
그러나 혼자만의 웅얼거림에 그치고 만다. 아내는 앞서가 상봉산 정상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석모도 남쪽 능선 끄트머리의 상봉산 정상부(해발 316m)는 바위지대이다. 이곳 또한 노을 질 무렵이면 낙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만한 분위기다.
상봉산 자락에는 인천의 유일한 휴양림인 석모도 자연휴양림이 있는데 수목원과 산림문화 휴양관, 통나무로 지은 숲 속의 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산 북쪽으로는 성주산(해발 264m)이 고립되어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성주산과 상봉산 사이에 간척을 통해 형성된 농경지인 송가평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아래 올망졸망 작은 섬들이 유영하듯 떠 있고 북으로 교동대교가 보인다.
“저 다리 뒤 흐릿한 곳은 북한인가 봐요.”
“황해도”
북한 땅 황해도에 먼 시선을 맡기면서 툭 던진 말이 주워 담고 싶을 만큼 어색하다.
“오늘 완주했으니까 한턱 단단히 낼게.”
아내가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나와 스무 해 이상을 살았다는 사실도 위대했지만, 더욱 사랑스럽고 위대해 보이는 건 지금도 나하고 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그럴듯한 만찬을 즐기고 싶었는데 겨우 완주를 명분 삼고 만 것이다.
“이제 돌아 내려갑시다.”
상봉산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바다를 조경하는 일체의 구성물들을 바라보다가 뜬금없이 타이타닉호가 떠오른다. 침몰하는 배, 타이타닉. 그 배와 운명을 함께한 타이타닉의 선장…….
“당신은 당신의 남편이 침몰 직전에 이르렀을 때도 운명을 함께 해주었지.”
앞서 걷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혼잣말이 이어진다. 사업 부진으로 경제적 곤란을 겪었을 때도 그러했고, 허울뿐이다시피 했던 남편이 거의 바닥까지 내려앉았을 때도 아내는 흔들림이 없었다.
“운명을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은 파손된 배를 수리했고, 그 배를 다시 바다에 뜰 수 있게 했소.”
아직은 너끈히 항해할 정도로 수선되지 않았지만 지금도 당신은 그 배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승선하리라고 맘먹고 있소. 그래서 당신은 위대할 뿐만 아니라 천사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오. 다시 산불감시초소로 회귀하여 낙가산으로 돌아오는데 콧등이 시큰해진다.
“아내여!”
이젠 당신의 남편이 우리의 배를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운항할 것이오. 다시는 암초에 부딪히는 일 없이, 다시 배에 바닷물이 스며드는 일이 없도록 당신이 참고 견뎠던 멀미를 완전히 멎게 해 주겠소. 아름다운 해넘이를 볼 수 있고, 다시 일출의 찬란함을 만끽하며 지나온 항해를 추억 삼을 수 있는 곳. 소박한 우리의 소망이 있는 그곳에 닻을 내릴 때까지 조금만 더 견뎌주기 바라오.
보문사 삼거리에서 비탈진 내리막을 걸어 내려오며 아내의 손을 잡는다. 폭풍우와 파도를 견뎌준 아내한테 감사하고픈 마음이 마구 드는 것이다.
보문사로 내려오자 눈썹바위 아래 조각된 마애석불좌상이 눈에 띈다. 높이 9.2m, 폭 3.3m의 이 석불에서 기도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찾는 여인이 많다고 한다.
“우리가 셋째를 갖는 건 무리겠지?”
“낮술 했어요?”
석실 앞 바위틈에 커다란 향나무가 용트림하듯 기둥 줄기를 비틀며 향을 내뿜고 있다.
“술 마셔야 애를 갖나?”
“산에 같이 오면 안 되겠네.”
“한때 이 절에는 승려와 수도사들이 300여 명이나 있었다는군.”
“…….”
보문사에 이들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데 사용했던 두께 20cm, 지름 69cm의 화강암 맷돌을 보존, 전시하고 있다는 게 화두로 이어질 분위기가 아닌지라 엉거주춤 경내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내려선다.
석모도의 소담한 바닷길 탐방을 마쳤어도 아직 출렁이는 바다 한가운데에 머무는 느낌이다.
때 / 초봄
곳 / 전득이 고개 - 해명산 - 새가리 고개 - 낙가산 - 보문사 삼거리 - 산불감시초소 - 상봉산 - 보문사 삼거리 - 보문사 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