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카사블랑카
쾌활하고 밝은 W 씨는 이곳 치과에 근무하여 몇 년을 보내다가 얼마 전 퇴사한 치위생사셨다. 한국에 바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얼마동안 있으면서 부지런히 놀고 있다고 하였다. 나는 대학생이고 휴학하고 모로코에 왔다고 하자 너무 어리다면서 자신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셨다. 그리고 언니라고 편하게 불러달라 했다. 호의적인 언니를 만나게 돼서 기뻤다.
다음날 맨 처음 시내로 가서 한 일은 A사 정품스토어에 들러 충전선을 사는 일이었다. 다행히 카사블랑카가 모로코의 수도여서 그런지 정품스토어가 있었다. 아랍 나라에 서양 기업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지만 막상 가서 보니 여느 정품스토어와 비슷했다. 이날은 눈을 질끈 감고 가난한 여행자에게는 큰 금액을 지출했다. 약 5만 원 정도였다.
카사블랑카는 수도이긴 하지만 영화 촬영지로서 유명할 뿐 사실 관광지는 별로 없다고 했다. 그나마 사원이 하나 있어서 잠시 구경하고 쇼핑몰로 발걸음을 옮겼다. 쇼핑몰에 들어서자 언니는 매우 신이 났다. 쇼핑이 굉장히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이 가방 어떤 것 같아? 나한테 잘 어울려?"
"나쁘진 않은데 좀 더 어울리는 게 있을 거 같아요"
"음 그렇단 말이지"
"여자들이랑 쇼핑하기 참 어려워. 난 다 비슷해 보이는데"
"호호호 원래 여자들이랑 다니면 그런 거예요."
언니가 고심 끝에 고른 가방은 쨍한 주황색의 토트백이었는데, 전에 봤던 가방들에 비해 좀 더 비쌌다.
"너무 이쁜데 가격이 비싸네. 색깔도 쨍한 주황색인데 자주 들고 다닐 수 있을까..."
그러나 언니는 결국 그 가방을 샀다.
"그냥 고민하지 말고 살래. 몇 년 동안 수고한 나한테 하는 선물인데 이쯤은 할 수 있잖아? 잘 들고 다녀야지."
쇼핑을 마치고 해변가로 갔다. 모로코 하면 물 한 방울 없을 것만 같은 사막을 많이 떠올리겠지만 사실 모로코의 북쪽은 모두 바다와 맞닿아있다. 생각해 보면 전에 처음 모로코에 건너올 때도 배를 타고 왔었다. 해변가에는 많은 카페와 음식점들이 즐비해 있었고, 그중 한 곳에 들어가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카사블랑카에서의 며칠은 책 속 빼곡히 가득한 문장 중 쉼표 같은 날들이었다. 낯선 이가 베풀어준 나그네에 대한 호의 아래서 어디에 거처할 것인지 또는 무엇을 먹을 건인지와 같은 타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다음 여정을 떠나기 전에 그동안 쌓여온 육체적 정신적 노동을 잠시 멈출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한바탕 수업 뒤에 있는 쉬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카사블랑카에서 쉼도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조금만 더 쉬고 싶기도 했지만, 예정대로 다시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