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태홍 Jun 09. 2024

5km 마라톤, 7번째 뜁니다

5월 25일 토요일, 오늘은 '바다의 날' 기념 마라톤 대회가 있는 날입니다. 

2주쯤 전에 우편으로 배번호와 티셔츠를 받았습니다. 대회요강, 참가자 유의사항, 대회코스 지도, 참가자 명단 등이 담긴 40쪽 분량의 자료도 함께 왔습니다. 마치 작은 신문처럼 편집이 된 타블로이드판 자료집입니다. 주최자가 한국해양산업 총연합회와 한국해운신문이라고 하더니 거기 신문사에서 발간한 모양입니다. 참가자 명단을 보니 참가자 수가 굉장히 많아 1만 명 정도 됩니다. 이름을 보니 외국인 참가자들도 20명이 넘습니다.


마라톤 장소는 상암동 월드컵공원 평화의 광장. 출발은 8시 30분입니다. 며칠 전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출발 1시간 전까지 모이고 8시경에 경품권 추첨을 하여 상품을 준다고 합니다. 그 말에 귀가 솔깃해져 서둘러 출발을 합니다. 지난번에는 가방을 가지고 가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새로운 도전을 해봅니다. 휴대폰도 가지고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몇 번을 주저합니다. 휴대폰 없이 외출하면 꼭 휴대폰 쓸 일이 생기고 위급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잠시 한나절 휴대폰을 휴대하지 않을 뿐인데 이러저러한 걱정이 앞섭니다. 생각해 보면 토요일 오전에 무슨 급한 일이 있을까요? 이것이 혹시 휴대폰 의존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감하게 휴대폰 전원을 끄고 한쪽에 내려놓습니다. 휴대폰 쓸 일이 생기면 주변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겠지요. 달리다 사고 나면 동료 참가자들이 구급차를 불러주겠지요. 휴대폰 없이 달리면 훨씬 더 편합니다. 주머니 안에서 덜렁거리는 휴대폰을 신경 쓸 일도 없고, 물품보관소에 맡겨놓고 분실 걱정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은 그런 편함을 느껴봐야겠습니다. 


반바지를 입고 대회본부에서 보내준 티셔츠 차림으로 길을 나섭니다. 월드컵 경기장 가는 6호선 전차를 탔습니다. 전차 안에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들도 마라톤 참가자인 모양입니다. 국방색의 마라톤 티셔츠를 입었습니다. 그중 한 아주머니는 무릎에 밴드를 하고 다른 아주머니는 약간 뚱뚱합니다. 지금까지 마라톤 대회에 6번이나 참가했는데 마라토너는 날씬하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냥 평범해 보이는 수다쟁이 아주머니들인데 마라톤 선수들입니다. 대회장에 가까워지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전철에 오릅니다. 월드컵 경기장에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이 내리는 것을 보니 열차 안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라톤 참가자들입니다. 신기한 경험입니다.


월드컵 경기장으로 갔습니다. 앞 광장에는 참가 단체들의 천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수광양 xx 공사, 인천 xx 고등학교, 동진상선, 한국해운조합, 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 한국해양조사협회, 대한해운 등등 바다와 관련된 단체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우리나라가 삼면이 바다이고 해양산업이 발달하였다고는 하나 이렇게 많은 단체와 사람들이 바다와 관련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습니다. 오늘은 가방도, 휴대폰도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아서 물품보관소에 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참가자들 구경에 나섭니다. 


광동제약, 티웨이, 경희대 학생 모임 등 단체 참가자들도 있습니다. 대학생들도 많고 30, 40대 직장인들도 많이 보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넓은 광장이 비좁아서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어떤 천막 안에서는 동료들끼리 편하게 주저앉아 캔 맥주를 마시고 있습니다. 즐거운 분위기입니다. 한잔 마시고 뛰면 몸이 더 가벼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화장실 쪽을 둘러보니 최신식의 화장실 전용 컨테이너가 3대나 들어와 있습니다. 이런 공동화장실은 보통 여자 화장실이 부족하여 그 앞에 긴 줄이 생기는데, 여기는 남자 화장실 앞이 긴 줄입니다. 아마도 내부구조가 잘 만들어져 여성용이 충분하게 배치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무대 쪽에서는 체조 음악이 나오고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이돌 가수 공연 같이 멋진 춤을 춥니다. 혹시 무슨 걸그룹 일까 생각했는데 치어리더들입니다. 체조를 따라 하라고 음악에 맞추어 체조 시범을 보이고 있는데 체조는 따라 하지 않고 넋 놓고 구경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어서 경품 추천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후쿠오카 2인 왕복 카페리 승선권, 오사카 크루즈 승선권, 통돌이 세탁기 등등 많은 경품 추천이 있었습니다. 어떤 초등학교 학생 한 명은 제주도 크루즈 여행 티켓에 당첨되었습니다. 2장이나 받았는데 덕분에 가족여행을 가겠습니다. 저도 추첨표를 넣었는데 모두 꽝이었습니다. 


8시 30분, 날씨가 적당히 흐려서 마라톤 하기에 참 좋은 날씨입니다. 드론 2대가 하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드디어 하프 팀이 출발합니다. 출발선 앞에서 불꽃이 올라가고 치어리더들이 파란색 찰랑이를 흔들어 줍니다. 선수들 중에는 흰머리 노인들도 여기저기 보입니다. 키가 커서 곧바로 눈에 띄는 곱슬머리 서양인도 있습니다. 흑인 여자도 있고 동남아시아 출신인 듯한 중년 여성도 있습니다. 


이어서 10km 뛰는 사람들이 출발합니다. 그 숫자가 4,5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1부, 2부 등으로 나누어 출발합니다. 저는 모르고 그 뒤를 따라가다 10km 뛰는 사람들 줄에 합류했다가 빠져나왔습니다. 4,500명이 다 빠지는데 10분이 넘게 걸립니다. 선수들 중에는 아기용 자전거를 밀고 달리는 아빠도 있습니다. 휴대폰을 등에 맨 사람, 어깨에 맨 사람, 그리고 팔목에 맨 사람도 있습니다. 역시 휴대폰이 달리는데 짐입니다. 집에 두고 나오길 잘했습니다.


드디어 5km 출발입니다. 출발 신호 불꽃이 도로 한쪽에서 올라갑니다. 앞에서는 출발이지만 뒤에서는 역시 걷습니다. 한참을 걸어갑니다. 엄마와 아들이 손을 잡고 앞으로 나갑니다. 다른 쪽에서는 엄마, 아빠, 아들, 딸 이렇게 한 가족이 뭉쳐서 뛰어나갑니다. 출발선으로 나오면서 뛰어나가는데 치어리더들이 찰랑이를 찰랑 찰랑 흔들어 줍니다. 멀리서 볼 때는 조그마한 학생들처럼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늘씬한 미녀들입니다.


지난번 여섯 번째 마라톤을 뛰고 난 뒤에, 앞으로 팔 굽혀 펴기 운동이나 플랭크 운동 등 상체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하체는 어느 정도 단련이 되었으나 허리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체운동은 커녕 2주쯤 전에 가벼운 상자를 옮기다가 허리를 삐끗했습니다. 심하기 다친 것도 아닌데 일주일을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아직까지 허리가 불편합니다. 오늘 잘 뛸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역시 달리는 자세가 이상합니다. 몸이 알아서 불편한 허리를 의식하고 살짝 살짝 허리를 비틀며 달립니다.


어쨌거나 오늘 목표도 쉬지 않고 달리는 것입니다. 도로는 넓고 좋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충분한 거리를 두고 달리기에 좋습니다. 저 멀리는 숲이 길다랗게 펼쳐져 있습니다. 숲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공기는 덥지도 않고 상쾌합니다. 1km 팻말이 보입니다. 시계를 보니 여기까지 7분이 걸렸습니다. 이 속도라면 5km는 35분 정도 걸리겠습니다. 조금 속도를 높여 봅니다. 갑자기 앞에 구름다리가 나타났습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둥그런 모양의 배부른 다리인데 그냥 뛰다가 왼쪽 다리를 삐걱했습니다. 무릎이 시큰 거립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속도를 줄이고 조금 걸어도 되는데 무리했습니다.  

 

숲으로 숲으로 들어갑니다. 이곳 마라톤 코스는 참 좋습니다. 도로 양쪽에 높이 자란 나무들이 빽빽합니다. 이곳은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이었는데 거기에 생태공원을 조성한 곳이라고 합니다. 월드컵 공원은 평화의 공원, 하늘공원, 노을공원, 난지천공원, 난지한강공원 등 5곳의 테마공원이 있는데 지금 달리고 있는 곳은 하늘공원과 난지천 공원의 사잇길입니다. 5km 참가자들은 하늘 공원 끝 부분에서 돌아오고 10km 참가자들은 좀 더 가서 노을 공원을 반바퀴 정도 돈 뒤에 돌아옵니다. 


출발한 지 17분이 지나서 겨우 반환점까지 왔습니다. 물을 마시고 또 천천히 뛰기 시작합니다. 숲 속의 공기가 상쾌합니다. 속도를 조금씩 올려 봅니다. 녹음이 우거진 푸른 숲 속 길. 사이사이에 핀 하얀 꽃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쥐똥나무일까? 평소에는 향기롭던 꽃나무 향기가 역겹게 느껴집니다. 몸이 피곤해서일까? 향기가 너무 강렬해서 숨 쉬는 데 힘이 듭니다. 공기 속에 섞인 꽃가루 때문일까? 폐가 깊은숨을 쉬지 못합니다. 

 

표지판이 다시 보입니다. 앞으로 남은 거리는 1km. 뒤에서 따라오던 사람들이 추월해서 앞으로 나갑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돼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10km 뛰는 선수들 같습니다. 속도에 욕심이 생깁니다. 이 속도로 가면 반환점을 17분에 돌았으니 5km는 34분 걸립니다. 오른발에 힘을 주고 달려보고 왼발에 힘을 주고 달려봅니다. 왼발이 조금 더 편해서 왼발을 착지하는 순간에 힘을 내서 빨리 박차고 나갑니다. 그런 방식으로 왼발의 힘을 이용해 속도를 내며 한참을 달립니다. 


300m 남은 곳까지 왔습니다. 응원하는 사람들이 마이크로 "힘내세요!!!" 외쳐줍니다. 노래까지 틀어주니 정말 힘이 납니다. 경쾌한 음악소리에 발을 맞추어 속도를 올려봅니다. 하지만 이내 포기합니다. 이러다 중간에 힘들어서 걷게 되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속도가 느린 것은 여러 가지 변명거리가 많지만, 쉬지 않고 달리기를 실패하면 안 됩니다. 그래도 골인지점이 시야에 들어오자 마지막 힘을 내서 힘껏 뛰어 들어갑니다. 


시계를 보니 30분 53초 걸렸습니다. 어떤 아가씨가 외칩니다.

"오빠아, 잘했어요. 31분이야."

설마 나를 보고 외친 것은 아니겠지. 뒤를 돌아보니 젊은 오빠가 V자 사인을 하면서 뛰어들어옵니다. 간식을 받고 메달 주는 곳으로 가서 기념 메달을 받았습니다. 마라톤을 뛰기 시작했을 때는 허리가 불편했는데 반환점 돌고 나서는 허리 아픈 줄을 몰랐습니다. 잔디에 주저앉아 쉬면서 간식을 먹습니다. 빵을 입에 물고 간식 봉투 안을 보니 음료수와 멸치 한 봉지가 들어 있습니다. 바다의 날 마라톤 행사에 어울리는 상품입니다. 


"우리가 뛴 거리가 4.4km야."

옆에서 쉬고 있는 어떤 여성 참가자가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를 보면서 친구에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5km 참가자들은 실지로 뛴 거리가 4.4km라는 것입니다. 어쩐지 허리도 불편했는데 기록이 잘 나왔다 했습니다. 600m나 덜 뛰었습니다. 기록보다는 오늘 역시 쉬지 않고 뛰었다는데 저에게는 의미가 더 큽니다. 몸 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뛰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메달을 받고 간식을 받으러 가는 사람들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합니다. 누가 시켜서 이렇게 힘들게 마라톤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들이 사서 고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힘들게 뛰고 난 뒤의 행복감에 젖어 있습니다. 갑자기 요양병원이 생각났습니다. 이 순간에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병원에서 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99%의 확률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 슬픕니다. 그런 사람들, 그리고 그런 미래와 비교해 보면 여기 있는 사람들, 그리고 현재의 우리들은 너무도 행복합니다. 


각자가 또 현실로 돌아가면 각기 나름의 슬픈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요즘 며칠 아이들의 분가 문제로 살던 집을 내놓고 이삿짐을 정리하고 새 집을 찾는데 고심하고 있습니다. 잠시 그런 현실을 떠나서 오늘 마라톤에 참가했습니다. 현실을 떠나 잠시 나마 이런 행복에 젖을 수 있게 해 준 모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표해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5km 마라톤, 여섯 번째 참가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