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6일 예산 군립도서관에서 <와인 인문학> '와인이 바꾼 세계사' 2번째 강의가 있었습니다. 강사는 인문학 살롱, 후마니타스 아카데미의 유혜선 대표입니다. 연세대, 숙명여대, 백석예술대 등에서 교수를 역임한 유 선생님은 <인문학 살롱 TV>를 운영하는 유튜버이기도 합니다.
이번 주 강의는 프랑스와 이태리의 대표적인 와인 6종류를 소개하고 그 상품 브랜드의 배경이 되는 역사와 문화이야기를 곁들였습니다. 여기서는 역사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마지막에는 제가 강의를 듣고 편의점으로 달려가 구입해 마셔본 프랑스 와인 <나디아>에 대한 감상을 추가합니다.
먼저 샴페인 <모엣 샹동(Moët & Chandon)>이야기입니다. 저는 샴페인이 서양 사람들이 생일 때나 마시는 주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 그것을 흉내 내서 친구 생일날 샴페인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와인이고 사실은 사이다 같은 가벼운 음료수가 아니라 정식적이고도 격식이 있는 술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더구나 유혜선 선생님이 그 술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아서 자세를 고쳐 앉아 그동안 샴페인에 대한 저의 잘못된 오해를 스스로 반성했습니다.
샴페인이라는 말은 프랑스 북동부 샹파뉴(Champagne)라는 지역에서 나왔습니다. 샹파뉴를 영어로 발음하면 '샴페인'입니다. 그 샹파뉴에서 생산된 와인 중에 스파클링 화이트 와인을 샴페인이라 부릅니다. 스파클링(sparkling)이란 '반짝이는', '탄산이 든' 그래서 기포가 있다는 뜻입니다. 알코올이 생기면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덕분에 톡톡 쏘는 맛과 청량감을 주는 와인입니다.
샹파뉴에서 생산되는 샴페인 중 유명한 것으로 3대 샴페인이 있는데, 돔 페리뇽, 뵈브 클리코 하이프 하이직, 그리고 모엣 샹동이 있습니다. 샹파뉴가 아닌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그것이 스파클링 하는 화이트 와인일지라도 샴페인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고 합니다. '스파클링 와인'이라고 표시할 뿐입니다. '샴페인'은 말하자면 일종의 상표권입니다.
이 샴페인이 루이 15세 시대에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국왕 자신이 이 샴페인을 좋아했고, 이를 알게 된 퐁파두르 부인이 적극적으로 구입하고 생산을 지원했기 때문입니다. 국왕의 애첩이었던 그녀 자신도 '삼페인은 음주 후에 여성을 아름답게 만드는 유일한 와인'이라며 좋아하고 사랑했으며, 모엣 샹동이 프랑스 왕실의 공식 샴페인으로 자리매김하는데 기여했습니다.
포도 품종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 샤르도네 등을 혼합(블렌딩)하여 만드는 이 모엣 샹동은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생산됩니다. 이 회사는 1743년에 설립되었으며, 1730년대부터 베르사유 궁전의 왕실 인사들과 교류하며 샴페인을 공급했습니다. 1744년부터 공식적으로 루이 15세의 정부가 된 마담 퐁파두르가 이 샴페인의 충성 고객이자 큰손 고객이었습니다. 그녀 덕분에 샴페인 하우스 '모엣 샹동'은 프랑스 궁정에 와인을 납품할 수 있었으며 유럽 전역의 왕실에도 영향을 미쳐 고급와인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현재는 세계 최대 샴페인 생산 업체 중 하나입니다.
그녀는 지롱드 강가의 보르도 지방에 있는 샤또 와이너리(생산처. 즉 와인 생산 시설과 포도밭, 창고, 시음 공간 및 관광 시설까지 포함하는 복합적인 시설)를 기업화해서 루이 15세의 파티용 샴페인의 수요에 부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1748년부터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는 매년 120병의 샴페인을 공급받았으며 여름 별장에는 별도로 200병을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모엣 샹동은 알코올 도수가 12도 정도이며, 요즘 가격은 5만 원에서 10만 원 사이입니다. 300년 가까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 와인의 가격이 생각만큼 그렇게 비싸지는 않습니다. 생일 선물로 적당한 가격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참고로 퐁파두르 부인(1721-1761)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녀의 본명은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Jeanne Antoinette Poisson)입니다. 어려서부터 루이 15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영재교육을 받은 여성으로 그녀의 어머니는 고급 매춘부였습니다. 퐁파두르를 가르친 사람은 '르 노르망 드 투르넴(Charles François Paul Le Normant de Tournehem, 1684~1751)'이라는 후원자로 그녀의 실질적인 생부라고 의심받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많은 돈을 들여 어린 퐁파두르를 교육시켰습니다. 나중에는 자신의 조카와 퐁파두르를 결혼시키고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애첩이 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소심한 꽃미남으로 알려진 루이 15세는 파티와 사냥을 즐겼습니다. 가면무도회에서 그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사냥의 신 다이아나(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 신)로 분장하여 접근하여 유혹하는 퐁파두르에 넘어가 그녀를 궁전으로 끌어들이고 정부(애첩)로 임명했습니다. 퐁파두르는 당시 유부녀 신분이었으나 1744년부터 그녀가 사망하는 1764년까지 국왕 옆에서 공식적인 애첩으로 활동했습니다. 루이 15세는 소심하고 실증을 잘 느끼는 사람이었는데 퐁파두르는 그런 국왕의 변덕스러운 취향을 맞추기 위해서 미술, 문학, 실내장식, 디자인, 도자기 와인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여 프랑스 궁정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프랑스에서 로코코 문화가 꽃피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습니다. 퐁파두르를 후원하고 가르친 남성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은 퐁파두르가 출세한 뒤에 국왕의 건축물 관리 총감을 맡거나 왕실 미술 아카데미를 관리하는 등 행정가이자 재정가로서 여러 가지 국책 사업을 도맡아 추진했습니다.
루이 15세의 총애를 등에 업고 '왕관 없는 여왕'이라 불리며 프랑스 왕실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퐁파두르는 지성과 미모와 권력을 무기로 귀족들의 모임을 적극 주관하고, 문화 살롱의 여주인(살로니에르)으로서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 작가들을 지원했습니다. 당시 유럽 문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이자 당대 계몽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볼테르도 그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으며, 디드로, 루소, 몽테스키에 등 지식인들도 재정적 지원을 많이 받았습니다. 나아가 퐁파두르는 그들을 옹호하고 종교 세력의 반발을 막고 백과전서의 출판을 지원함으로써 계몽주의 사상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가 유럽에서 최강대국의 지위를 잃고 부르봉왕조가 몰락하는 데 있어 퐁파두르의 책임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과 프랑스 대혁명의 폭발 그리고 프랑스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그녀의 역할도, 아이러니하지만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퐁파두르 부인이 보드로 와인의 생산에 큰 지원을 한 것과 대조적으로 루이 15세의 조카 콩티 왕자는 부르고 뉴 와인의 생산을 지원했습니다. 콩티 친왕(Louis François de Bourbon, prince de Conti, 1717-1776)은 루이 아르망 2세 드 콩티 공의 아들이자, 부르봉 왕가의 일원으로 당시 유명한 와인 생산지인 로마네의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퐁파두르 부인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결국 그는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포도밭의 남쪽 한 부분의 인수에 성공하였고 자기 이름을 따 '로마네 콩티(Romanee Conti)'라고 하여 와인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이 와인이 바로 사상 최고가의 와인 신기록을 세운 로마네 콩티 와인입니다. 2018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945년 산 로마네 콩티 와인 한 병 가격이 6억 3천만 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와인은 생산 연도(빈티지)에 따라 등급이 다르지만 한 병에 수백 만원에서 수천 만원에 달합니다. 최상급은 1억 원을 넘어갑니다. 그런데 실지 구매 시 다른 종류의 와인과 함께 12병 묶음 세트로 판매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전체 가격은 더 비싸집니다.
로마네 콩티 가격이 이렇게 비싼 이유는 우선 연간 생산량이 약 5천에서 6천 병으로 극히 적습니다. 그리고 마케팅이 뛰어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격이 꾸준히 상승하여 이러한 가격이 형성되었습니다. 아울러 모든 공정을 사람의 손으로 직접 하며 품질 관리를 엄격히 하여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오르는 투자성 와인이라는 성격도 이러한 고가의 가격이 형성된 이유입니다.
포도 품종은 피노 누아(Pinot Noir)이며, 이 포도로 만든 와인은 복합적인 향과 깊이 있는 맛을 낸다고 합니다. 다른 품종인 샤르도네(Chardonnay)도 함께 최대 15%까지 혼합될 수 있습니다. 로마테 콩티의 맛은 은은하며, 부드러우며 향기가 귀족적이고 여성적이라고 합니다. 변덕이 심한, 프랑스 북부의 추운 지방이 만들어낸 포도가 우려내는 풍미입니다. 현재 시장 가격을 보면 로마테 콩티 1967년 산이 2,900만 원, 1986년 산이 3,400만 원, 1988년 산이 3,000만 원입니다. 알코올 도수는 13도입니다. 너무도 비 현실적인 가격이, 귀족이 만들고 귀족들이 마시는 와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세계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습니다.
유럽에서 지중해로 흐르는 강이 하나 있습니다. 론강입니다. 이 강은 스위스 남부의 알프스 산지에서 기원하여 제네바를 거친 뒤에 프랑스 리용에 도달하여 곧장 남쪽으로 흐릅니다. 이 강을 따라 약 200여 km를 내려가면 아비뇽이 나옵니다. 버스로는 약 3시간 거리, 고속열차 떼제베로는 약 1시간 15분 거리입니다.
아비뇽은 중세가 끝나갈 무렵인 14세기에 교황의 아비뇽 유수(1309-1377)로 유명한 곳입니다. 유수(幽囚)란 잡아 가둔다는 뜻으로, 프랑스 국왕이 로마 교황을 1309년부터 1377년까지 약 70여 년간 자기 영향력하에 있던 아비뇽에 붙잡아두었습니다. 당시는 십자군 전쟁의 패배로 교황의 권위가 무너지고 각지에서 군주 세력이 난립하던 상태였습니다. 특히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힘이 막강했는데, 그는 전쟁 준비와 왕권 강화를 위해 많은 세금이 필요했습니다. 마침 교황이 관할하던 교회는 헌금을 모아 상당한 부를 축적했는데, 세금은 내지 않았습니다.
필리프 4세가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자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격노하며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노쇠한 교황을 납치하여 감금했습니다. 교황은 충격을 받고 사망하였는데 필리프 4세는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 클레멘스 5세를 교황으로 추대하고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이전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이후 70여 년간 이어진 아비뇽 유수의 시작입니다. 이후 교황청이 다시 로마로 돌아간 1378년까지 7명의 교황이 바뀌었습니다.
아비뇽 유수 기간에 교황에 취임한 요한 22세는 와인을 좋아하여 포도 재배에 관여했습니다. 교회에서 와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기 때문에 성찬식에 꼭 필요했습니다. 그는 아비뇽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작은 마을(샤토 네프 뒤파프)에 여름 궁전을 짓고 포도나무를 심어 와인을 생산했습니다. '샤토 네프 뒤 파프(Chateau neuf-du-Pape)'란 '교황의 새로운 성'이라는 뜻입니다.
아비뇽은 여름이 덥고 건조한데 8월에는 기온이 19도에서 31도까지 오릅니다. 반면에 겨울은 2도에서 10도 사이로 온화한 편이지만 추운 날은 영하 3도까지 떨어지기도 합니다. 습한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는 아비뇽은 바람이 많이 불고 흐린 날이 많습니다. 이 지역은 또 자갈이 많아 샤또네프 뒤파프 와인은 '돌과 바람이 키운 포도로 만든 와인', '돌 투성이 땅, 강렬한 햇볕, 거센 바람을 이겨내, 교황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시련을 닮은 와인'으로도 알려졌습니다. 브랜드 이미지는 '시련을 극복한 사람의 와인' 또는 '인생의 힘든 시기에 홀로 서 있는 자를 위한 와인'입니다.
이렇게 아비뇽 유수의 역사적 스토리가 담긴 샤또 네프 뒤파프 와인은 레드 와인으로 포도 품종 그르나슈를 포함해 최대 13가지 품종을 블렌딩(혼합)하며, 강렬한 과일 향과 부드러운 타닌이 특징입니다. 아울러 헤이즐넛과 초콜릿 향을 복합적으로 느낄 수 있으며, 톡 쏘는 듯한 향신료의 여운을 남깁니다. 이 와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죽, 허브 향이 더해지는 등 복합적인 풍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하니 혹시 마시게 되면 세심하게 음미해야겠습니다. 알코올 도수는 13도에서 15도 사이이며, 가격은 생산자, 생산연도 등에 따라 10만 원에서 100만 원까지 다양하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백년전쟁의 영웅 딸보(John Talbot) 장군을 기린 와인입니다. 이 와인에 사용되는 포도 품종은 주로 까베르네 소비뇽인데, 메를로와 까베르네 프랑 등 다른 품종도 함께 섞어 만듭니다. 주 품종인 까베르네 소비뇽은 카베르네 프랑과 소비뇽 블랑의 교배종으로, 숙성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맛을 냅니다. 선명한 산미와 부드러운 탄닌 맛이 특징이며 과일향과 흙내음을 발산합니다. 그리고 자극적인 느낌이 있으며, 달거나 텁텁하지 않고 깔끔한 맛을 자랑합니다.
특히 까베르네 소비뇽은 전세계에서 널리 재배되는 품종으로, 자갈이 많은 토양에서도 잘 자라며, 껍질이 두껍고 단단하여 다양한 기후에서도 잘 견딘다고 합니다. 서늘한 기후에서 자란 까베르네 쇼비뇽은 블랙커런트와 그린 페퍼 향이 나며, 따뜻한 기후에서 자란 까베르네 쇼비뇽은 블랙 체리와 올리브 향이 납니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재배되는 캠벨 포도와 같은 경우는 생식용으로 껍질이 얇고 알맹이가 큰 편인데 까베르네 쇼비뇽은 껍질이 두꺼운 대신에 알맹이가 작습니다. 당도는 캠벨의 경우 18 브릭스 정도인데 까베르네 쇼비뇽은 약 25 브릭스로 매우 달콤합니다. 포도 껍질이 두껍다는 것은 껍질에 색소와 풍미를 내는 많은 성분이 다양하게 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때문에 이 포도로 생산한 와인은 짙은 색을 띠며 높은 탄닌과 산도를 가지고 농축된 풍미를 발산합니다.
샤또 딸보는 까베르네 쇼비뇽을 주로 사용하여 만든 대표적인 와인입니다. 스테이크, 볶음 요리 등 육류 요리와 잘 어울리며, 숙성 잠재력이 높아 생산 연도가 오래된 것일수록 더욱 깊은 풍미를 냅니다. 도수는 약 13도, 가격은 10만 원에서 20만 원 수준입니다. 2002년 한국팀을 월드컵 4강까지 오르게 이끈 히딩크 감독이 이 와인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딸보(John Talbot) 장군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딸보 장군은 영국군 장군으로 백년전쟁(1360-1429)중 최대의 격전지였던 카스티옹 전투에서 사망했는데 특히 보르도의 도르도뉴 강변에서 최후를 마쳤습니다. 백년전쟁은 중세 말엽에 발생한 전쟁으로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한 뒤 시작된 중세 시대는 900년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봉건 제도가 쇠퇴하고 봉건 영주와 기사 계급이 몰락하였으며, 도시가 발전하고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 국가가 형성되었습니다.
1137년 프랑스 왕 루이 7세가 프랑스 남서부에 광대한 영토를 가졌던 알리에노르와 결혼을 했습니다. 신부 알리에노르는 결혼 조건으로 자기 땅을 프랑스 왕실 직영으로 편입시키지 않는다고 선언했는데, 나중에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이혼하고, 잉글랜드(영국)의 노르망디 공작인 앙리와 재혼했습니다. 그리고 지참금으로 자기 소유의 땅을 가지고 갔는데, 1154년에 앙리가 헨리 2세로 영국왕이 되면서 프랑스 남부 땅이 영국영토가 되어 프랑스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당시 알리에노르가 가지고 갔던 땅은 보르도 지방을 포함하여 프랑스 왕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땅이었기 때문에 프랑스로서는 그 땅을 포기할 수 없어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것이 백년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100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 국민들 사이에서 그동안 없었던 민족의식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전쟁영웅 잔 다르크가 등장하여 프랑스 민족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백년전쟁의 끝 무렵에 잔다르크는 딸보 장군과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잔다르크는 딸보 장군에게 "나는 피를 보고 싶지 않다. 그냥 물러가라"라고 요구했는데, 딸보 장군은 그 말을 듣고 고심하다 퇴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딸보 장군은 까지티옹 전투에 참여하다가 1453년에 전사했습니다.
참고로 100년 전쟁의 영웅이며 프랑스 민족의 상징으로 잔 다르크가 떠오르게 된 것은 나중에 프랑스를 이끌게 된 나폴레옹(1769-1821)이었습니다. 잔다르크는 프랑스 동부의 작은 마을 동레미(오늘날의 로렌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프랑스의 정식 영토가 아니었습니다. 코르시카 출신으로 정통 프랑스인이 아닌 나폴레옹과도 처지가 비슷합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잔다르크를 잘 포장하여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자신과 겹쳐 보이고 미화할 수 있도록 잔다르크를 활용한 것입니다.
적국의 장군을 미화하고 와인의 브랜드로까지 채용한 것은 다소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보르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보르도 지방은 백년전쟁에서 영국이 패전한 뒤에 프랑스 땅이 되었지만 원래는 영국 영토였습니다. 백년전쟁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보르도 지방의 북쪽이자, 파리의 서쪽에 위치한 프랑스의 북서부 지방 노르망디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얽히고설킨 역사가 시작됩니다.
노르망디는 2차 세계대전 때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곳은 영국과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주 가까운 곳입니다. 845년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던 바이킹들(노르만인들)이 프랑스 전역에 침략해 들어왔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파리가 점령되고 각지가 습격을 받았습니다. 왕들은 서로 싸우느라 노르만인들을 몰아내기보다는 오히려 끌어들여 용병으로 이용했습니다. 이에 따라 노르만인들은 점차 프랑스에서 점차 더욱 세력을 넓혔습니다.
911년에 프랑스왕 샤를 3세는 노르만의 추장 롤로에게 센강 하류 지역을 제공하고 노르망디 공으로 봉했습니다. 이에 많은 노르만인들이 이 지방으로 이주하여 영지를 확장하고 독자적인 국가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1066년에 노르망디 4대 공작이었던 윌리엄 1세(William I, 1028년경-1087)가 영국을 정복하여 영국에서 노르만 왕가를 열었습니다. 이러한 공적 때문에 윌리어 1세는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이라 불립니다. (영국은 역사에서 모두 4번의 이민족 침략을 받았는데, 첫번째는 켈트족, 두번째는 로마, 세번째는 앵글로섹슨족, 네번째는 노르만의 침략입니다.)
윌리엄 1세의 장남은 프랑스 왕의 신하인 노르망디 공이 되고, 차남은 영국 왕이 되어 양쪽 지방은 일단 분리되었으나, 나중에(헨리 1세 때) 영국이 양쪽 지역을 합병하여 1106년 이후 약 100여 년 동안 노르망디는 영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1204년에는 다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가 노르망디를 공략하여 1259년(루이 9세)에 이곳은 다시 프랑스 왕국에 정식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러한 영토 분쟁이 백년전쟁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백년전쟁 전 보르도 지역은 영국이 통치했습니다. 당시 와인은 영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특히 보르도의 '클라렛(Claret)'이라는 와인의 명칭은 옅은 색의 와인이라는 뜻인데, 영국에서 와인을 칭하는 용어로 굳어질 정도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영국에서 보자면 프랑스는 유럽의 문화가 시작된 그리스와 로마, 이탈리아에 더 가깝고 문화가 발달된 선진 강대국이었으며 영국을 정복한 윌리엄 왕가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보자면 보르도 와인은 영국으로 수출되어 보르도 지역의 경제가 번창했으며, 영국과의 관계도 매우 우호적이었습니다. 보르도의 귀족들은 프랑스 왕가보다는 영국과 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백년전쟁의 결과로 1453년 이후 보르도를 포함한 프랑스 서부지역은 프랑스 왕가의 소유가 되고,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은 일시적으로 프랑스 와인을 끊고 포르투갈에서 포트와인을 수입하였습니다. 하지만 보르도 와인은 여전히 북유럽 시장을 개척하고 활발히 거래하면서 와인 산업의 명성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돈나 푸가타(Donnafugata)'는 피난처의 여인이란 뜻입니다. 19세기 이탈리아 나폴리의 왕 페르디난도 4세(1835-1908)의 아내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 1768-1814) 왕비의 '집 나간 귀족 부인의 전설'에서 유래한 브랜드입니다.
이탈리아 나폴리의 왕 페르디난도 4세(Ferdinando IV, 1751-1825)는 나폴리 왕국의 왕이었습니다. 나중에(1816년) 나폴리 왕국이 시칠리아 왕국과 통합하여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이 되었습니다. 이때 이름은 페르디난도 1세(Ferdinando I)이며, 부르봉 왕가의 군주입니다. 그는 두 번이나 왕위 박탈을 겪었는데, 1799년에 혁명이 일어나 나폴리에서 왕위를 박탈당한 적이 있으며, 1806년에 프랑스군이 침략하여 왕위에서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1815년 나폴리 전쟁 이후에 복위되었다가 1816년에 양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고 즉위한 뒤에는 1825년 사망할 때까지 국왕으로 재위했습니다.
부인 마리아 카롤리나는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으나 프랑스혁명으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아 앙투아네트의 언니입니다. 동생처럼 언니도 왕비가 되었지만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남편 페르디난도가 왕위에서 두 번이나 쫓겨난 기간 동안에 고난을 함께하다 정작 남편이 국왕으로 다시 복귀했을 때는 이미 사망했습니다. <돈나 푸가타>는 이런 그녀를 기리는 와인입니다.
카롤리나는 1796년 침략자 나폴레옹의 군대를 피해 시칠리아로 피난을 갔는데 당시 그녀가 머물던 건물이 오늘날의 돈나 푸가타 와이너리라고 합니다. 돈나 푸가타는 1851년부터 시칠리아에서 160년 이상 와인을 양조해 온 이탈리아 시칠리아 최고의 와이너리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알코올 도수는 12도에서 14도 사이이며, 가격대는 2만 원에서 20만 원 사이입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줄리아 지역의 와인인 <미아니(Miani)>는 만화 <신의 물방울> 도입부에 등장하는 와인으로 광기 어린 괴물 와인, 혹은 살로메에 비유됩니다. 살로메는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악녀 헤로디아의 딸입니다. 헤로디아는 필립보 임금과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시숙인 헤로데 안티파스와 결혼했습니다. 그러자 세레자 요한은 이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는 요한을 죽이려고 했지만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아 감히 처형을 하지는 못하고 옥에 가두어 두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안티파스의 생일을 맞아 연회가 벌어졌을 때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아름다운 춤을 추었고 이에 고무된 안티파스가 살로메에게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에 살로메는 어머니의 사주를 받아 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 줄 것을 요구하여, 안티파스 왕은 곧바로 요한을 처형했습니다. 잘린 요한의 목은 접시에 담겨 살로메에게 바쳐졌습니다.
이러한 살로메의 이미지를 와인 <미아니>와 관련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미아니>는 '관능과 욕망의 와인', '퇴폐적 관능 그 자체를 표현하는 와인'으로 묘사됩니다. <미아니>는 진득하고 강하면서도 목 넘김이 좋은 와인입니다. 마치 광기와 집착을 의미하듯 피처럼 끈끈하고, 극도로 응축된 과일을 씹는 듯한 맛을 내며, 요한의 피가 흐르는 듯한 끈적끈적한 풍미를 가진 와인입니다. 높은 품질과 극소량 생산으로 유명하며, 국내 수입량도 많지 않습니다. 알코올 도수는 13도에서 15도 사이, 가격은 20만 원에서 40만 원 사이입니다.
와인 강의를 듣고 편의점을 들러 와인을 한 병 샀습니다. 편의점에는 많은 와인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가격은 1만 원에서 10만 원 넘는 것까지 다양했습니다. 프랑스 와인, 이탈리아 와인, 스페인 그리고 칠레 와인이 많았습니다. 평소에는 거의 쳐다보지도 않은 곳인데 와인 코너가 따로 있고 너무 많아서 놀랐습니다. 프랑스 와인 중 화이트 와인을 골랐는데 알코올 도수는 10.5도, 할인행사 가격으로 13,000원이었습니다. 평소에 가끔 마시는 막걸리의 10배나 되는 가격입니다.
와인 브랜드명은 <나디아(Nadia)>, 제조사는 SICSOE이며, 꼬뜨 드 가스코뉴(Côtes de Gascogne) 지역에서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프랑스 남서부의 피레네 산맥과 가까운 곳으로 주로 화이트 와인을 생산합니다. 사용되는 포도 품종은 소비뇽 블랑, 샤도네이, 위니블랑 등이며, 신선하고 과일향이 풍부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 회사는 특히 가벼운 스타일의 가성비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곳 가스코뉴는 와인 산지로 2000년이 넘는 와인 생산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니, 로마시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을 때부터 포도를 키운 곳입니다.
<나디아>라는 이름은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프랑스 화가 앙리 마티스(1869-1954)가 그린 '나디아'를 모티브로 하여 브랜드화한 것입니다. 나디아를 그린 여러 드로잉 작품을 상품의 이미지에 활용하여 홍보합니다.
한 모금 마셔본 느낌은 알코올 도수가 10.5도로 높은 편인데 6도인 막걸리보다 부담이 없었습니다. 더 가볍고 약해서 도수가 10.5도 맞는지 다시 확인해 봤습니다. 입안에 넣고 혀로 굴리면서 여러 가지 맛을 봐야 하는데 아직 서툴러서 입안에 넣자마자 목으로 넘어가버렸습니다. 막걸리는 아무래도 곡물 부스러기가 느껴지는 텁텁한 맛이 있는데 이 와인은 투명한 색 그대로 맛도 투명했습니다. 뒷맛은 아주 깔끔하고 아무 맛도 여운도 없을 정도로 깨끗했습니다. 술을 만든 사람의 정성이 느껴지고 고급스럽다는 생각이 절로 났습니다.
강의에서 선생님의 설명으로는 와인의 맛은 생산자마다 연도마다 다 다르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시는 사람마다 또 다를 것 같습니다. 아는 만큼 맛이 다른 것이 와인입니다. 막걸리와 다르게 와인은 음미하는데 숙달이 필요한 술이고 그 점에서 까다로우며 '귀족적'인 술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선생님은 "와인을 마시는 목적은 취하는 것에 있지 않다. 와인의 맛이 그려내는 이미지는 와인의 숫자만큼 존재한다. 그리고 아름답고 심오한 이미지의 세계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 그것이 와인을 마시는 행위의 본질이다."라고 와인에 대해서 정의했습니다. 여기에서 '이미지'란 아마도 '분위기', 혹은 '상상의 세계'라고 말을 바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만큼 와인은 예술적이고도 낭만적인 여유가 전제되어야 비로소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술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와인 강의를 들으면서 프랑스 사람들이 종교 및 신화와 역사에서 그리고 예술 작품과 현실 세계에서 이야기를 가져와 와인의 맛과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방법을 잘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술 작품 하나를 창작하고, 그것을 잘 이해하고 설명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막걸리는 무엇일까? 그것을 마시는 행위의 본질은 무엇일까? 막걸리에는 와인에 곁들여지는 수많은 설명과 예찬과 이미지가 거의 없습니다. 예술적인 감각도 미적인 감성도 필요 없이 그저 생각 없이 마시는 것이 아마도 막걸리입니다.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그래서 무미건조하기 때문에 안주가 더 절실히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막걸리 자체가 내뿜는 미적인 혹은 예술적인 무엇이 없다는 것이지, 마시는 사람 머릿속까지 비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막걸리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존재하는 술입니다. 오직 안주를 벗 삼아 막걸리를 마시다 보면 막걸리는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고 이 세상은 행복한 세상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목적지는 와인과 같습니다.
우리의 막걸리를 생각해 보면 와인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프랑스 문화는,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래서 프랑스가 명실공히 문화대국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루이 14세, 15세, 16세가 활동하였던 부르봉 왕조가 무너진 이후에도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 파리는 패션, 뷰티, 디자인, 건축, 음악, 영화, 문학, 미술, 무용 그리고 요리에 있어서도 세계적인 중심지였습니다. 지금은 다소 침체되었고 부분적으로는 한류와 경쟁하기도 하지만 영향력은 여전합니다. 문화란 무엇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와인 강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