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탁오의 생애와 사상
51세 되던 1577년 이탁오는 운남성(雲南省) 요안부(姚安府)의 지부(知府)로 발령받았습니다. 그는 부인과 가족을 데리고 그곳으로 부임했지요. 그곳에서 3년간 근무하고 연임 요청이 있었으나 거절하고 가족과 헤어져 혼자서 운남성 대리부(大理府)의 계족산(鷄足山)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대장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1581년(55세) 그는 황안으로 가 가족과 잠시 재회하였으나 곧바로 도(道)를 배우는 일에 전념하고, 부인과 장녀 부부를 고향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1588년 그에게 부인 황씨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머리 묶고 부부가 되었지.
끌리는 사랑에 두 사람은 묶이지 않았네.
오늘 아침 들었네. 당신의 죽음을
문득 떠오르는 정, 애달프고 슬프구나.”(「哭黃宜人」)
이탁오는 당시 삭발을 하고 막 출가한 상태였지요. 부인이 살아 있었을 때 그는 이미 부인과 가족을 떠나서 출가를 했었습니다. 부인의 부보(訃報)를 접하고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지었습니다. 제목은 「황의인에게 곡하다(哭黃宜人)」입니다.
“물에 다가가 물고기 노는 것을 보았네.
봄이 오는 산에서 새가 홀로 우는구나.
가난할 때 사귄 친구도 버리지 못하거늘
하물며 쌀겨로 끼니를 함께한 아내는.”
여기에서 ‘쌀겨로 끼니를 함께한 아내’라는 표현은 어쩌면 죽은 부인에게는 사치스러울지 모르겠습니다. ‘기근’을 함께한 아내라고 해야겠지요. 신랑도 없이 어린 두 딸을 키우다 기근 중에 잃고 고통을 당한 아내였습니다.
“기결(冀缺)과 양홍(梁鴻)을
어찌 다른 사람들에게 견줄 수 있겠는가?
대장부는 천하에 뜻을 두었다네.
한스럽구나. 그대가 함께할 수 없음을.”
자신을 위해서 고생하고 희생한 부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마음인데 이탁오의 표현은 다소 다릅니다. 이탁오는 기결과 양홍의 이야기를 빌려서 기꺼이 남편의 뜻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부인의 의젓한 마음을 기렸습니다.
기결(冀缺)은 춘추시대 진나라 사람으로 『춘추좌씨전』에 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벼슬을 하다 물러나 부인과 함께 들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이 부부는 항상 서로 공경하고 손님 대하듯이 정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기결이 밭에서 김을 매고 있는데, 그의 아내가 새참을 가져와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서로 처음 대하는 손님처럼 극진하고 공경하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서, 마침 지나가던 관리가 그것을 보고 임금에게 소개하여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결의 이야기를 어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겠는가라는 말은 자기 부인과 자기가 바로 그렇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한편 양홍(梁鴻)은 가난하지만 절개가 곧았다고 합니다. 그는 결혼을 하고 나서, 7일이 지나도 색시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색시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양홍은 “내가 바라는 여자는 비단옷을 입고 분을 바르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 함께 누더기 옷을 입고 산속으로 들어가 살 수 있는 그런 여자였소.”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색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면서 생활했습니다. 나중에 양홍은 왕실을 비방하다 오나라로 도망가 방앗간에서 날품팔이를 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의 아내는 항상 밥상을 준비하여 눈을 아래로 깔고 밥상을 눈썹 위로 들어 올려 남편에게 공손히 바쳤다고 합니다. 이탁오의 부인도 이렇게 하였음을 이탁오의 시는 말하고 있습니다.
부인이 사망하고 4년 뒤, 이탁오가 1602년 76세 때, 그는 예과(禮科)의 도급사중(都給事中)의 장문달(張問達)의 탄핵을 받았습니다. 조정에서는 이탁오의 서적을 모두 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지요. 이 때문에 이탁오는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같은 해 3월 25일 이발사의 칼로 스스로 목을 그어 숨을 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