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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태홍 Dec 04. 2023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알게 된 몇 가지 사실

오늘 12월 4일 지인의 소개로 <서울의 봄>을 봤습니다. 

금년 12월 12일은 특별할 것 같습니다. 8일 후는 1979년 겨울 12.12사태가 발생한 지 25년이 되는 날입니다. 25년 전 그날 저녁에 저는 한남동에서 군인들이 충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1980년을 맞이하고 12.12사태는 기억에서 사라졌는데 영화를 보고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그날 영화 같은 일이 발생했다.


영화는 적당한 무관심으로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다면 정말 스펙터클한 장면으로 가득합니다. 전투 장면, 탱크와 장갑차가 질주하는 장면, 수많은 군용 차량과 부대가 이동하는 장면은 정말 영화 같습니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눠서 지략으로 그리고 무기로 서로 싸우는 모습은 참으로 감탄스럽습니다. 로마 장군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 못지않게 대한민국의 제2공수여단이 한강 다리를 건너는 모습은 웅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혼자서 막아낸 수도경비사령관의 모습은 비장하기도 합니다. 정말 멋진 전쟁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25년 전 12월 12일, 그런 일이 정말 우리들이 살았던 현실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영화에서는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반란군들이 우왕좌왕하면서 금방 무너질 듯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사실 당시 반란군은 좀 더 체계적으로 준비했었고 그렇게 약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 이미 수경사 전체 장교 4백50명 중 3백90명이 반란군에 합류했다고 합니다.(「12·12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 육필 수기 - 진압 실패 10시간, <시사저널>1781호, 2023.12.2. 시사저널 편집국, 2006.05.16 승인기사) 전두환은 영화에서 만큼 약하지 않았고, 전두환을 둘러싼 반란세력도 사실은 좀 더 적극적으로 반란에 가담했었습니다. 현실은 좀 더 우울했었고 절망적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1970년대 말에 정말 영화 같은 기막힌 현실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둘째, 그때는 휴대폰과 인터넷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삐삐라는 것을 이용해 친구들과 연락했던 것이 1990년대였습니다. 휴대폰은 그 뒤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인터넷도 1212 사태가 발생하였던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PC통신 천리안이 생긴 것도 1990년대 초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답답하게 느꼈던 것은 진압군 측에서도 반란군 측에서도 서로 연락이 바로바로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바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연락을 주고받아야 할 상황에서도 그것이 안된다는 것이 생소했습니다. 


사실 영화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좀 더 실감 나게 보여주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현실에서 답답한 상황은 더 심각했습니다. 당시 한남동 참모총장 공관에서 무언가 사건이 터지고 그 주변에 차량들이 막혀 있다는 소식이 서울 각지에 퍼졌습니다. 그런데 대다수 국민들은 그런 상황이 왜 일어났는지, 어떻게 된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쿠데타 세력에게는 참 좋은 환경이었지요. 그들은 좀 더 세련되게 완전 범죄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여주듯이 그들의 범죄를 온몸으로 막아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영화는 하늘을 날거나 전차를 집어던지는 할리우드 영웅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우리 시대 영웅들의 모습을 잘 그려주었습니다.



셋째, 전두환의 쿠데타는 정보 장악부터 시작되었다. 


전두환은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서 사살된 뒤 수시로 전 국민이 보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때 그의 직위는 국군보안사령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보안사령관이 저렇게 힘이 있지? 궁금해했습니다. 영화는 그 이유를 잘 보여줍니다. 전두환은 당시 국내에서 돌아가는 모든 정보를 한 손이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전두환에 잡혔으므로 중앙정보부의 정보 라인도 반란 세력이 장악한 상황이었습니다.


영화에서 반란군을 진압하려는 수도경비사령부, 육군본부, 국방부 등을 쿠데타 세력이 감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진압군의 통화내용, 병력 배치 상황 등이 모두 반란군에게 들어갑니다. 이미 전두환이 쿠데타를 생각한 순간 게임은 끝났습니다. 모든 정보가 그의 손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움직임이 그의 손에 있으니 진압은 하나마나였습니다. 정치군인 전두환의 정보 장악은 이후 1980년대의 언론 통제와 장악, 그리고 언론 통폐합 사건으로 발전된 것 같습니다. 전두환 세력은 권력을 나누어 가지면서, 그리고 돌아가면서 적어도 100년 정도는 계속 통치할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뒤집고 발전한 것입니다.



넷째, 아직도 전두환을 전두환이라 부르지 못하는 세상이다.


영화에서 전두환은 이름이 전두광으로 표현됩니다. 그의 친구이자 쿠데타 세력 제2인자 노태우는 노태건으로 나옵니다. 영화적인 상상력을 가미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름을 다르게 표현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씁쓸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전두환을 찬양하고 신처럼 모시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반란죄로 단죄되고 1212 사태는 쿠데타라는 것이 법으로 정의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민주세력을 욕하고 폄하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 한 구석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잘 보여줍니다.


이것은 도둑놈을 도둑놈이라 부르지 못하고 강도를 강도라고 부르지 못하고 살인자를 살인자를 부르지 못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요?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1212의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어떻게 반란을 일으키고 어떻게 헌법을 유린하는 지를 말입니다. 그래도 이런 영화를 대놓고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어찌 생각해 보면 놀랍습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소위 블랙리스트를 만든 사람들이 다시 활개를 치고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영화를 찍을 때 영화 제작 관계자들은 여전히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영화에 참여한 모든 배우분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다섯째, 당시 군대 내부에 심각한 하극상이 발생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새롭게 안 것은 1212 사태에서 수많은 하극상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부하가 상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심지어는 상관에게 총을 들이대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영화 대사에도 나왔듯이 이것은 항명죄이고 군법에서는 사형에 처해질 정도로 중형에 해당됩니다. 영화에서는 반란군이 하급 병사에서부터 최고 우두머리까지 그런 하극상을 벌입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부대에서 이런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싫든 좋든 많은 조직이 있습니다. 국가 기관에서 개인 회사에 이르기까지 각 조직에는 나름의 질서가 있고 규율이 있습니다. 특히 공공기관은, 더구나 군대는 상명하복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 질서를 무너뜨리고 자기가 속한 조직을 총으로 그리고 협박과 힘으로 뒤집어엎은 사건이 1212 사태라는 것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또 신군부의 쿠데타 성공은 꼭 그들의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 앞에 서서 그들을 비호하고 국민을 우롱한 수많은 언론인, 어용교수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그 안에서 벌어진 수많은 하극상과 불법적인 월권행위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우리 사회의 근간을 뒤흔든 행위에 대해서 말입니다.



여섯째, 당시 군인들 모두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저는 오랫동안 잘 모르고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나 정승화 당시 참모총장을 적당히 타협하고 쿠데타 세력에 협조한 사람들로 알고 있었습니다.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장군에 대해서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영화는 이분들이 반란세력의 위협에 대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힘이 없어서 패자로 물러섰지만 그분들의 저항이 결국 우리나라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민주화는 전두환 군부세력에 철저하게 저항한 광주시민들 그리고 1980년대에 자기 생명까지 내던지며 싸웠던 열사들, 그리고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의 노력으로 이룩되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그 한편으로는 쿠데타 세력과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함으로써 당시 군부세력이 정당하지 못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준 이 분들의 공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항이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과 그 세력은 정권을 오랫동안 계속해서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이나 장태완 장군 등의 저항은 결국에 군대의 비정상적인 일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려주었습니다.



일곱째, 사조직 하나회가 쿠데타 주역이었다.


신군부가 들어서고, 전두환이 대통령에 올랐던 당시에 외국에서 한국에 영향력이 있는 큰 정치 집단으로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군인 세력을 든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권력을 잡은 군인들이 주로 육사출신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모든 군인들이 쿠데타에 연루된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것이 아니라 당시 군인들의 일부 집단 즉 하나회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하나회에 대해서 잘 몰랐던 저는 혹시 영화에서 만든 창작 내용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조직으로 하나회를 만들었고 그들이 그 조직의 리더였으며 반란에 그 조직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회 뿌리는 결국에 박정희가 키웠다는 것도 인터넷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영화에서 보듯이 하나회 군인들은 우리 군대의 각 조직 모든 곳에 속속들이 점조직으로 침투하고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조직 해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IMF를 일으킨 대통령으로만 기억했는데 이 영화를 통해서 그분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여덟째, 총을 든 반란군에 맞선 훌륭한 군인들이 있었다.


그동안 저는 우리나라 민주화는 오로지 민주 시민들의 손에 의해서 이룩된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정당하지 않은 반란세력에 저항한 훌륭한 군인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분들 때문에 우리나라 민주화가 앞당겨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도경비사령부에서 사령관 명령을 따라 반란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동한 많은 군인들, 그리고 육군본부, 참모총장 공관 등에서 반란군을 막아서 그들과 전투를 벌였던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전두환과 같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당시 제5공수 특전여단 중대장에 임명되었다가 정병주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으로 끝까지 상관을 지켰던 김오랑 중령의 죽음은 특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나중에, 앞을 잘 보지 못한 미망인 백영옥 여사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성공한 전두환,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걸었다고 합니다.(이때 변호사가 고 노무현 대통령이었다고 합니다.) 반란의 여운이 서슬 퍼렇게 남아 있던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소송을 진행하다 자기 집 건물에서 실족사하였다니 참으로 슬픈 이야기입니다. 



아홉째, 다음 해 5월 광주로 간 군인들은 반란군들이었다.


1212 사태는 1979년에 일어났습니다. 박정희는 1961년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헌법까지 고쳐서 1979년까지 18년간 권력을 잡고 있었습니다. 60년대, 70년대가 박정희 시대였습니다. 영화에서는 '서울의 봄'이라고 했으나 서울의 봄은 정확히 1980년도 봄을 말합니다. 그때 만해도 일반 사람들은 전두환이 누구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 잘 몰랐습니다. 1980년 봄에 반란 세력은 이미 반란 작업을 마치고 언론 장악까지 끝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내란을 벌입니다. 1997년 4월 17일에 선고된 판결문(96도 3376)에 따르면 반란과 내란, 그리고 살인, 뇌물수수로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17년 형을 받았습니다. 반란은 12월 12일의 쿠데타를 말하며 내란은 헌정질서 파괴와 광주에서 벌인 민간인 학살 사건을 말합니다. 영화는 전두환 세력에 합류한 공수특전단 군인들이 정상적인 군인들이 아니라 반란을 일으킨 집단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광주에서 이 반란군들은 온갖 불법을 자행합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전두환 세력은 이미 장악한 언론을 통해서 광주시민들이 불법을 행하고 있다고 선전합니다. 적반하장이었습니다. 도둑놈들이 오히려 '도둑이야' 하고 큰소리친 것입니다. 당시 서울의 봄은 결국 오지 않았고 우리 사회는 깊은 빙하기에 들어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1980년대 10년간의 빙하기에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를 성숙시켰고 한류를 잉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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