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태홍 Jan 05. 2024

영화 <사카모토 류이치>와 <백남준> 그리고 박원순

2024년 새해 둘째 날. 날씨가 포근해져 조용히 산보하기 좋습니다. 거리 한쪽에는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아직도  쌓여 있습니다. 차가 다니는 길과 인도는 눈이 녹아 깨끗합니다. 그런데 오늘 동네 영화관에 예술 영화가 두 편이나 걸려 있습니다. 하나는 피아노 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비디오 관련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려면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헌책방에 들려 책을 두권 샀습니다.


한 권은 <평생독서계획>(클리프턴 패디먼 등저, 이종인역, 연암서가, 2010)입니다. 눈에 띄는 제목입니다. 그동안 책을 읽어왔지만 계획을 세워서 읽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책은 독서도 계획을 세워서 읽으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2010년에 나온 책인데 6쇄나 찍었으니 판매에 성공한 책입니다. 133권의 책을 소개하였는데 서양 작가들의 책이 많습니다. 고전 서적도 있고 근현대에 출판된 소설도 소개했습니다. 새해는 '나도 계획을 세워서 독서를 해보자'며 이 책을 샀습니다.


책 뒤쪽을 펼쳐보니 문득 예술에 대해서 이런 말이 쓰여 있습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해 왔다. 하지만 예술은 3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이다. 상상력을 밑천으로 삼는 예술가는...... 3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현대인처럼 보인다."(역자후기, 471쪽)


예술이란 무엇일까? 검색을 해봤습니다. 문학, 음악, 미술, 영화, 무용이 예술이랍니다. 어떤 것을 창작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만들어낸 것이 예술작품입니다. 이러한 작품은 생명력이 영원한데 과학은 다릅니다. 과학에는 자연과학도 사회과학도 인문과학도 있습니다. 이런 과학은 진리를 밝혀내는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 옛것이 되어 그 가치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예술은 영원합니다. 아름다움과 영원을 추구하는 예술가. 이점에서 예술가는 부러운 존재입니다.


한 권만 살려고 계산대로 가다가 우연히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책을 봤습니다. 책제목은 <박원순, 생각의 출마>입니다. 2017년에 출판된 책입니다. 3년 뒤인 2020년 7월에 박원순 시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책은 160쪽 되는 아주 가벼운 책으로 읽는데 부담이 없을 것 같아 같이 사기로 했습니다. 평소에 박원순 님의 정치사상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에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특히 주택과 청년, 그리고 지방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했습니다. 정말 하찮은 문제로 모든 것을 잃은 안타까운 분입니다. 마지막에 그렇게 자신을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실망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박원순 님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되어 서둘러 영화관으로 들어갔습니다. 일본의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1952-2023)의 영화 <오푸스>입니다.  관람료가 5,000원이었는데 이 돈으로 사카모토 류이치의 마지막 공연을 관람한 셈입니다. 


영화는 흑백으로 진행됩니다. 커다란 홀에 피아노만 한대 놓여 있습니다. 사방에 마이크가 여러 대 설치되어 있고 바닥에는 전선이 어지럽게 널려있습니다. 오직 피아노만으로 그가 추구했던 음악을 보여줍니다. 연주되는 곡의 제목은 영화 마지막에 한꺼번에 보여줍니다. 그러니 연주회가 진행되는 100여분 동안 관객은 연주하는 곡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문가나 평소에 그의 음악을 잘 들었던 팬이라면 알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전체가 하나의 곡처럼 들렸습니다. 가끔 가다가 귀에 익숙한 멜로디가 들리기도 하고 또 자꾸 듣다 보니 어떤 멜로디는 익숙해지기도 했습니다.


중간에 피아노 치는 손이 딱 멈추면서 "다시 합시다."라는 말이 들립니다. 듣는 사람은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는데 예술가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모양입니다. 어디서부터 다시 치는지는 모르겠으나 다시 치는 부분이 귀에 익숙해져 반복되는 멜로디를 정신없이 따라갑니다. "잠깐 쉬었다 하시죠."라는 말이 들립니다. 사카모토가 말합니다. "힘들지만, 지금 무척 애쓰고 있거든." 죽음을 앞에 두고 힘겹게 피아노를 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관객도 충분히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저 말투가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이 마지막 콘서트가 가족과 함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아들이 감독했고 그의 부인이 제작했다고 합니다. 암투병을 하는 아버지와 그를 간호하고, 보살피는 아들과 아내의 대화입니다. 피아노 건반에서 흘러나오는 한마디 한마디처럼, 가슴이 저린 대화입니다.


영화 처음에는 사카모토의 등 뒤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다 차츰 그의 얼굴을 카메라가 비춰줍니다. 그의 손가락은 계속해서 건반을 두드립니다. 어쩔 때는 슬프게, 어쩔 때는 기쁘고 경쾌하게, 어쩔 때는 우울하게, 또 어쩔 때는 웅장하고 힘차게 건반을 두드립니다. 죽음을 앞에 둔 예술가의 처절한 음악 발표회입니다. 또 어느 순간에는 관객들에게 손가락의 움직임이 피아노 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침묵의 순간이 또 중요함을 그는 강조합니다. 소리와 침묵, 소리와 침묵, 소리와 침묵으로 이어지는 긴 시간 동안 그는 관객들에게 죽음의 너머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연주회의 마지막에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건반만 움직입니다. 그리고 퇴장하는 발자국소리가 나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마지막으로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이 올라갑니다. 영화 내내 전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삶의 마지막을 이렇게 보여주다니 참으로 감탄스러운 예술가입니다. 사카모토는 이 영화를 찍고 2023년 3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번째 영화를 보기 위해서 다른 영화관으로 갔습니다. 영화 제목은 <백남준 : 달은 가장 오래된 TV>였습니다. 감독은 어맨다 킴입니다. 스티븐 연이 내레이션과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습니다. 영화에서는 고 백남준 님의 실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 톤이 상당히 가늘고 높은 것이 의외였습니다. 그는 영어, 독일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다수의 외국어가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는 느긋이 눌러앉아 외국어를 철저히 공부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같습니다. 그가 하는 영어가 알아듣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영화속 대화 가운데 나왔습니다. 그의 삶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백남준 님에 대해서는 평소에 아주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1998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백남준을 백악관에 초대했을 때, 클린턴 앞에서 악수를 하다가 그의 바지가 내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일부러 그랬을까? 아니면 단순한 실수였을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었습니다. 영화는 그것이 하나의 의도적인 퍼포먼스였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당시 옆에 있던 김대중 대통령의 난처한 표정도 재미있었습니다.


백남준(1932-2006)은 부잣집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일제시대에 태어나 해방을 맞이하고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동경대학교 미학 미술사학과에서 대학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독일로 건너가 뮌헨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석사, 음악학 석사를 취득하고 1964년에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피아노와 작곡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행위예술가로 활동을 하다가 나중에 TV모니터와 카메라를 활용한 비디오 예술가로서 성공을 합니다. 


1973년에 그는 세계 최초의 뮤직비디오 중 하나로 알려진 작품 Global Groove를 발표합니다. 이즈음부터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공 뒤에 그는 1979년부터 1996년까지 17년 간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조각과 교수로 있었습니다. 주로 미국에서 활동을 했었는데 1984년 새해 벽두에 KBS와 함께 <굿 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프로그램을 전 세계에 송출하였는데 이 일로 국내에서 화재의 인물로 크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영화는 백남준의 독일시대와 미국 이주 초기에 어렵게 활동을 하던 모습을 집중적으로 보여줍니다. 그의 예술활동과 주변 사람들의 비판, 그리고 TV, 비디오카메라 등 신기술에 대한 그의 관심이 어떻게 예술활동으로 승화되었는지를 상세히 보여줍니다. 부잣집에 태어나 일찍이 해외로 나가 철없는 기행을 일삼았다고 생각하는 비판자들에 대해서 영화는 그가 나름대로 얼마나 치열하게 현대 문명의 미래를 고민하고 예술을 추구했는지 설명합니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그가 민족주의에 대해서 비판한 부분이 나옵니다. 아마도 그 민족주의는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군국주의와 결합된 민족주의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는 자신이 세계시민임을 드러냅니다. 한국인 기자가 물었습니다. "어디에 묻히고 싶으세요?"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저는 죽으면 제 뼈를 세계 곳곳에 뿌렸으면 좋겠습니다." 기자가 또 물었습니다. "부모님 곁에 묻히고 싶지 않으세요?" 그가 답합니다. "한국에도 제 뼈의 일부가 뿌려지겠지요." 그의 마지막 국적은 미국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장례식이 미국에서 치러지기를 원했습니다. 그 이유를 기자가 물으니 "그곳이 제일 싸니까요."라고 답하였습니다.


백남준은 한국이 '조그만 나라'이고 '가난한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식민지를 겪었고 독일이나 일본, 미국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한 나라였습니다. 그러한 환경 조건에서 나오는 열등감을 최대한 극복하고자 노력한 것이 그의 예술활동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결국 그는 성공했고,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라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세계를 누빈, 거침없는 그의 활동과 성공이 사실은 정신적, 경제적,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이룩되었다는 사실을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정말 예술가다웠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고 박원순 님에 대한 영화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첫 변론>(2023)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이미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사망사건과 여성 관련 사건을 다룬 영화인데 2021년 발간된 〈비극의 탄생〉을 토대로 '박원순을 믿는 사람들'이 제작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성희롱 사건 피해자 측의 요청으로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영화 말고 제대로 된 전기적인 영화가 필요합니다. 유신 반대시위, 인권변호사, 시민활동, 서울시장 활동 등을 중심으로 한 영화가 좋을 것 같습니다. 그의 삶과 사상 가운데에는 우리 사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야당지도자 암살미수 사건과 '아름다운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