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앞에서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타인을 마주했다, 그리고 나를 배웠다.

by 난화

지난 토요일 아침,

나는 자원봉사라는 이름을 빌려 그곳에 갔다.

’사랑의 집‘

이름부터 따뜻하고, 의미로 가득한 공간.

그 안엔 발달장애와 지적장애를 가진 이들이 머물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오늘은 좋은 하루가 될 거라고.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솔직하게는,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내 마음에 고요한 균열이 일었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웃었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어눌한 말투, 일정치 않은 리듬의 몸짓. 그러나 그 웃음만큼은, 생애 가장 환하고 투명했다.

나는 웃지 못했다.

내 얼굴에는 밝은 표정을 지으려는 의지가 있었지만, 마음은 따라오지 못했다. 그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맑고 투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을 피하고 싶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낯섦. 그것은 내가 그들보다 다르다고 믿어왔던 오랜 습관이 드러나는 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문득,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생각을 들었다.

‘나는 이들보다 조금 더 건강하게 태어났으니,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언뜻 다짐처럼 보이지만, 그 문장 안에는 위선이 섞여 있었다.

나는 나의 ‘정상’을 그들의 ‘결핍’ 위에 세우고 있었다.

그들을 동정하면서 동시에 스스로의 우월감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그 생각이 나를 찔렀다. 웃는 얼굴 앞에서 눈물이 맺힌 건, 그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 한켠에 웅크린 오만함이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마음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뿌듯함도, 보람도 없었다. 대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내 안에 오래 머물렀다.

햇살 좋은 오후였다. 거리는 평온했고, 사람들은 일상처럼 웃고 있었다.

하지만 나만은 정적 속에 있었다.

내가 조금 더 ‘정상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삶을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믿어왔던 시간들이 하나둘 무너지고 있었다.

그 웃음들 앞에서 내가 얼마나 비좁은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그날 이후, 동정이라는 감정의 실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연민은 어디까지가 타인을 위한 것이고, 어디부터가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것인가.

나는 정말 그들을 이해하려 했던 걸까, 아니면 그들을 통해 나의 선함을 증명하려 했던 것일까.


삶은 기능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의 문제다.

내가 본 그들은 불완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충만했고, 어떤 설명도 필요치 않은 온전한 생이었다.

우리는 종종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분류하고, 이해라는 명목 아래 타인의 존재를 줄이려 든다.

하지만 인간다움은, 이해의 결과가 아니라 이해하지 못함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다.

나는 그날 그들의 세계를 다 알지 못했다. 여전히 모른다.

그러나 그 알지 못함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다짐하지 않는다. ‘더 잘 살아야겠다’고.

대신, ‘더 정직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정직함은, 나 아닌 타인의 삶 앞에서 나의 시선을 끊임없이 돌아보는 일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안다.


햇살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내렸지만, 그날 나는 그것을 온전히 견디지 못했다.

그 따뜻함 앞에서 나는 부끄러웠고, 그 맑음 앞에서 나는 작아졌다.

그러나 바로 그 작아짐 덕분에, 나는 조금 더 진실한 방향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언젠가, 나 또한 누군가에게 맑게 웃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아무 의도도, 설명도 없이.

그저, 존재로서의 인간이 인간을 만나는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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