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우리는 많은 한인분들을 만났다.
처음 며칠은 미국 뉴저지 온누리 교회 게스트 하우스에서 숙박을 했고 버지니아에 와서는 버지니아 교회 김기화 집사님댁에서 묵었다. 뉴저지 온누리 교회 부목사님 반지하에 리모델링을 한 건물인데 요즘 리모델링해서인지 특히 방의 조명이 근사했다. 조명 불빛의 강도를 조절할수 있는 시스템이 맘에 들었다. 안방은 매우 컸고 마루와 부엌을 길게 만들었다. 두명이 앉을만한 식탁 공간이 아늑했다. 집 밖에는 청설모가 도토리를 주워 담장을 넘나드는 곳이다. 한블럭 돌아가면 ذH mart 한인 마트가 있어서 먹고 싶은 것들을 그 때 그때마다 사서 먹을수 있었다. 마지막 날까지 단팥빵과 두부를 먹다가 언처서 나중엔 두부 보기도 힘들 정도로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우리 네 식구가 그 좁은 탁자에 둘러앉아 아빠 생일 케잌도 먹고 아침 저녁 함께 했던 시간이 즐거웠다.교회는 걸어서 5분도 안되는 거리라 새벽 예배와 주일 설교때 자주 가서 예배를 드릴수 있어서 좋았다.
몇몇 분들이 식사 초대를 해주셨는데 첫날은 부목사님이 불고기 백반을 그리고 권사님댁에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많은 음식을 준비해주셨다. 그곳에 함께 자리한 한 집사님 가정은 처음 이곳에 오셔서 주유소 3개를 경영하시다 지금은 쇼핑몰 건물주이신 분이셨다. 한인들이 이민오셔서 성공하신 모습이 보기 좋았다. 미국 사회에서 성공의 잣대는 집과 자동차다. 어느 정도 미국 땅에 자리잡고 성공한 분들은 좋은 저택을 산다 그리고 좋은 차를 구입한다. 가족이 4명이면 각자 차를 모니 4대가 필요하다. 가기에 캠핑같은 걸 더 한다면 트럭란대를 더 산다. 모든 집의 로망이란다.
뉴욕 한복판 한인거리에 인투교회에서는 많은 청년들을 보았다. 대부분 한국에서도 교회 열심히 다니던 청년들이라 뉴욕에 와서도 교회를 이주 잘 나온다. 그중 10여년전 이스라엘에 성지 순례로 만났던 한자매를 우연히 그 교회에서 만났다. 남편이 박사.공부하러 왔다가 변호사 공부로 방향 전환하고 지금은 뉴욕의 한 로펌회사에서 근무하는 젊은이였다. 아내는 3달 후에 아이를 낳는 임산부다. 우리가 온다는 걸 알고 맛있는 쿠키를 준비해주었다. 10여년전 인연이 이렇게 뉴욕에서 연결될줄이야 . 고마웠다. 기억해줘서.
설교를 들었던 3명의 청년들이 헌재 유정이를 데리고 타임 스퀘어 밤거리를 같이 돌아주었다. 젊은이는 젊은이들끼리 어울려야한다. 그들의 특권을 즐길 시간이다.
퀸즈에서는 동원 참치회를 먹었다. 한국에서 먹는 것처럼 그렇게 먹었다. 한인이 운영하는 횟집이라 그럴텐데 그래서 더욱 한국 같았다. 외국이란 느낌을 전혀 느낄수 없다. 카페도 한국인이 운영하는 카페다 손님도 다 한국인이다. 2세들이지만 한국 카페를 즐긴다. 미국안의 한국 사회다.
뉴욕 마지막 날에는 한국에서 만난 두분의 목사님을 뵈었다. 이민사회에서 교회 목사는 어렵다. 특히 이민 사회에 한국에서 목회하다 오신 분들은 서로 맡지 않는 부분들이 참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민 사회에 사는 많은 분들이 여전히 한국적인 예배 방식을 원하기에 한국 목회자들을 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미국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분들이 목회하시면 더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목사님이 마지막으로 뉴욕 야경열 보여주셨다. 참 아름다운 광경이다. 뉴욕시가 종말 가깝게 느껴졌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첨탑이 갖은 색으로 빛났다. 밤공기가 너무 차서 빨리 돌아올수 밖에 없었지만 잊혀지지 않는 마지막 뉴욕 밤공기를 맡고 보고 와서 기억에 많이 남는다. 목사님이 핫하다는 가방을 선물로 주셨다. 트레이드 죠 가방인데 이곳에선 4불 하는 것이 십만원도 넘게 팔린단다. 뭐든 핫한 것이 봏다.
다음날 아침은 예전에 이스라엘에 오신 목사님과 그 됴인 4분과 식사했다. 이스라엘 오셨을 때 갈릴리 헬몬산을 함께 올라가고 갈릴리 생선을 같이 먹고 팀이 요르단으로 간 이후에 그 차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내려오도록 도움을 주었던 분들이다. 그 때 고마움을 기억하시고 아침에 뉴저지에서 뉴욕까지 오신분도 계셨다. 아침을 함께 먹고 버지니아로 향하는 버스 터미널까지 태워주셨다. 이 목사님은 전날 아울렛을 함께 동행해주셨고 일본 라면을 사주셨다. 모든것이 다 감사할 뿐이다.
버스를 4시간 이상 타고 버지니아 비엔나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김기화 집사님이 우리를 태우러 나와계셨다. 화장실도 갈겸 집에 짐을 내리고 다시 점심이 준비된 멕시컨 식당으로 향했다. 너무 많이 먹었다. 뉴저지에서도 두부와 단팥빵을 너무 먹었고 어제 저녁 비빔밥 아침에 국밥.(국밥은 너무 속이 안좋아 먹지도 못했다) 다시 점심에 멕시컨. 우리는 그 맛있는 걸 손도 대보질 못했다. 속이 너무 안좋아서 입안에 넣을 수가 없다. 나뿐만이 아니라 남편 헌재 모두 그렇다. 점심을 먹고는 집에 와서 그 다음날 까지 자버렸다. 너무 피곤했나보다.
다음날 아침은 죽이다. 겨우겨우 먹었다. 그날 점심은 한인이 운영하는 마켓 투 마켓 이라는 식당이다. 무게로 재서 파는 식당인데 외국인들도 참 많았다. 이곳에선 두번을 식사했다. 첫날보다 둘째날이 더 맛있었다.무엇보다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골라 먹을수 있어 좋았다.
이 식당은 한국에서 기러기로 오신 여성분이 친한 언니뻘 되는 분과 동업으로 세운 식당이다. 이미 식당을 경영하고 있던 언니와 동업으로 이곳 정부 청사 건물에 가게를 세운 것이다.
그 옆에는 김기화 집사님의 아내분이 경영하는 네일 샾이 있다. 나도 집에서 부터 함께 지하쳘을 타고 출근을 같이 해보았다. 15분을 걸어 비엔나 역까지 가서 기차를 타고 30여분을 오면 내려서 바로 나오면 가게다. 건물 위치가 얼마나 좋은지 너무 보기 좋았다. 더군다나 친한 두분이 가게를 마주하고 있으니 한쪽에선 음식을 마음껏 먹을수 있고 한쪽에선 언제든 네일을 받을수 있으니 서로 윈윈이다. 마켓투마켓의 남는 음식은 노숙자들에게 제공된다고한다. 늘 신선한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이라 더 인기있을거란 생각이든다. 두분의 우정과 가게의 번영을 위해 기도했다.
네일샾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몽골인 3명이었다. 나는 몽골인을 처음 본다. 몽골인들은 중국인 같을 거란 생각이었는데 아니다 좀더 일본과 한국에 가깝다. 몽골인들은 러시아 알파벳을 사용한단다. 아마도 예전 소비에트 연방때에 공산주의화되면서 알파벳을 도입한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문장이 우리나라와 순서가 닽아서 몽골인들이 한국어를 배우기 쉽다고 한다. 몽골에는 생선이 귀하다 그래서 골다공증에 많이 걸린단다. 한 여성에게 생선을 좋아하냐고 물으니 생선 별로 좋아하지 않고 고기를 좋아한단다. 마음씨가 다 친절한 여성들이었다. 남의 발 맛사지 하는게 쉽지 않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성공한 한 한국인 분도 처음 미국에 와서는 6년간 네일 샾에서 일했단다. 고되지 않았냐고 물으니 아니었단다. 내가 돈을 벌수 있는 일이 있었기에 남의 발을 만지는 것도 고마운 일이었단다. 정신력에 놀랐다. 그래 그렇게 궂은 일도 마다않고 열심히 살았으니 이렇게 성공하고 살고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세월 고생한 보람이 있으니 지금은 그런 것도 즐겁게 말할수 있겠다 싶다. 오늘 일하는 몽골 자매들도 꼭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시기를 기도한다.
버지니아에 있는 동안 많은 식사를 했다. 일식집 한식당 그리고 김기화 집사님 댁에서 구운 소고기와 돼지고기까지 정말 맛있고 귀한 식사를 대접받았다. 감사하다는 말 밖에 더 무엇을 말하랴 .
아참 펠로우슆 교회에서는 이탈리안 식을 먹었다. 미국에서의 이탈리언 특별한 경험이었다. 웨이터들이 너무 배 나온 미국인들이라 좀 어색한거 빼고는 맛도 있고 다양한 음식을 시켜주셔서 감사했다.
이스라엘 도착 전날 암만에서 먹은 저녁 식사도 맛있었다. 비행기를 밤새 타고오느라 지친탓에 스테이크를 먹고 싶었다. 지난번 걸었던 곳에서 다시 식사를 했다. 참 맛있었다.
지금은 새벽이다. 미국은 아직 오후라 그런지 저녁에 소고기를 먹었어도 배가 고프다.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내일은 드디어 다시 이스라엘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김치 찌개를 끓이고 된장 찌개를 끓일 것이다. 빡빡했던 미국 일정과 만남속에 피어난 사랑과 감사함이 오래 기억될것이다.
중국인들은 이민와서 중국집을 만들지만 한인들은 이민와서 한인교회를 세운단다. 특별히 퀸즈에 가는곳마다 있던 한인교회 긴판과 정말 넓은 부지에 세워진 한인교회의 위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요즘은 유개인 회당이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아서 유대인 회당을 빌려 기독교인이 사영하다가 교회로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특히 유대인들이.아주 견고하게 세운 회당이라 다시 한인들이 교회를 세웠을 때 매우 쾌적한 환경에서 예배드릴수 있는 장점이 있다.
목회자분들 중에는 투잡을 뛰는 분들도 많다. 사모님들도 일을 가지신분들도 많다. 내가 머문 댁의 집 리모델링을 목사님이 하셨다고한다. 부엌을 넓히고 벽을 크게 뚤어 창문을 크게 만들어서 정원이 한눈에 보이게 디자인된 집이 예뻤다. 미국에서 투잡은 보편적인 일이다. 미국에선 여성들이 직장을 갖기가 더 수월하다. 물론 마트에서 일한다든지 세탁소같은 곳애서 일하는것 부터 시작을 한다. 가장 잘된 케이스는 그 샾과 세탁소를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거다
2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미국 사회에서 50년 이상 살아온 한국인들이 있다. 그들의 땀흘림이 오늘의 미국 한인사회를 만들었다. 한 분을 뵈었는데 그분도 처음에 와서는 네일 샾에서 일했단다. 내가 손은 몰라도 남의 발을 씻겨주고 예쁘게 발톱소지해주는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니 그녀가 말했다. 돈을 벌게 해줘서 그 일도 너무 감사했어요 .. 모든 한인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것 같았다. 그렇게 열심히 사신 분이 우리 가족에게 미국에서 가장 핫한 신발 HOKA를 선물해주셨다. 당신의 예루살렘은 어디냐는 남 ㅕㄴ의 설교에 자신은 매일 아침 하는 큐티라고 말한다. 그녀의 하나님을 향한 늘 한결같기를 소망했다
요즘 미국 한인들의 걱정은 이 미국 땅이 하나님의 마라로 세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동성애를 인정하는 미국 사회에서 교회에서 조차도 받아드려야하는 사회 풍조가 그들을 힘들데 한다. 기독교인들에게 동성애를 인정해야하는 문제는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시키는 일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외면할수도 없어서 교회에선 큰 고민이기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