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과 자아
아침에 눈을 뜨고, 정해진 역할에 맞춰 하루를 분주히 살아내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를 때
“이게 진짜 ‘나’인가?”
“아니면 그냥… 내가 맡은 ‘역할’일 뿐인 걸까?”
어쩌면 많은 이들이 한 번쯤, 혹은 자주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회사에서는 ‘팀장’ 혹은 ‘신입’으로,
집에서는 ‘엄마’, ‘아빠’, ‘자식’으로—
우리는 하루에도 몇 가지의 역할을 오간다.
그런데 그 역할들이 너무 오래, 너무 강하게 나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진짜 나’의 자리는 점점 희미해진다.
역할은 틀이고, 자아는 그 안의 사람
사회는 누구나 각자의 ‘역할’을 요구한다.
그건 일종의 틀이다.
조직을 유지하고,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그 틀에 맞추기 위해 나를 계속 깎아내고 비우다 보면,
더 이상 그 안에 내가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타인을 돌보는 데 능숙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은 자꾸 뒤로 밀어놓게 된다.
늘 유쾌하고 밝은 사람은
힘든 감정을 밖으로 꺼내는 걸 주저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누구였지?”라는 생각 앞에
낯선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충돌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역할과 자아가 충돌하는 건,
내가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내 안의 ‘나’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저 주어진 틀에 아무렇지 않게 녹아들었다면,
자아의 목소리는 점점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내면 어딘가에서
“나는 이게 아닌데”
“이런 말투는 내 방식이 아닌데”
“이렇게 살아가고 싶었던 건 아닌데”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면—
그건 아직 내가 나 자신을 잊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럴 땐 잠시, 나와 역할 사이에 ‘쉼’을 놓아야 한다
무작정 역할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부모이고, 동료이고, 사회의 일원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자아를 지워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필요한 건
‘틈’과 ‘쉼’이다.
하루 10분이라도,
내 이름으로, 내 말투로, 내 기호에 따라 움직이는 시간.
누구의 기대도, 평가도, 눈치도 없는 시간.
산책을 해도 좋고,
좋아하는 글귀 하나를 필사해도 좋고,
혼잣말로 마음속 이야기를 정리해도 좋다.
그런 조용한 시간 속에서
‘역할’과 ‘나’ 사이에 균형이 조금씩 회복된다.
나답게 산다는 것
‘진짜 나’로 산다는 건,
어떤 대단한 선택이나 과감한 결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작은 순간,
아주 짧은 말 한마디에서도
그 사람다움이 스며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그건 나한텐 좀 어려워요.”
“이건 제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이에요.”
같은 짧은 문장 하나가
내가 ‘나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
아무리 많은 역할을 짊어지고 살아도,
그 모든 역할을 수행하는 출발점은 ‘나’라는 사실.
역할은 외피이고,
자아는 본질이다.
그 본질이 약해지지 않도록,
오늘도 잠깐의 여유 안에서
스스로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보면 좋겠다.
“괜찮아, 너는 아직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