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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은 멀고 교실은 가깝다

정책은 멀고 교실은 가깝다

9월 17일 교육 이슈를 우리 반 하루로 풀어보면


아침 조회가 끝날 무렵, 아이가 손을 듭니다.

“선생님, 과목 선택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죠?”

짧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학교가 어떤 과목을 열 수 있는지, 2028학년도 수능은 무엇을 묻는지, 그리고 이 아이가 앞으로 무엇을 배우며 어떤 삶을 준비할지가 한꺼번에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자 교육 뉴스들을 훑고 나면, 이 질문이 결코 한 반의 고민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고교학점제와 함께 커진 ‘사교육 컨설팅’ 이슈입니다. 학교가 학생 상담과 과목 설계를 위해 외부 컨설팅에 적잖은 예산을 쓰고 있다는 보도는, 공교육의 역량이 어디에서 만들어져야 하는지를 다시 묻게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외주가 나쁘다”가 아니라, 학교 안에서 스스로 설계하고 운영할 수 있는 힘—진로 상담의 품질, 시간표를 짜는 기술, 선택과목을 개설할 판단력—이 충분히 축적되었는가입니다. 아이의 한 마디 질문에 교사가 자신 있게 길을 그려 줄 수 있으려면, 그 힘이 우리 내부에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학점제와 2028 수능의 리듬이 아직 완전히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이어집니다. 선택의 자유는 넓어졌지만, 평가의 기준과 연결이 느슨할 때 학생과 학부모는 불안해지고, 학교는 설명에 더 많은 시간을 씁니다. 이 불일치를 메우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거창한 개혁안이 아닙니다. 예측 가능성을 회복하는 일, 즉 ‘우리 학교가 앞으로 3년간 어떤 과목을 어떤 원칙으로 열 것인지’를 한 장의 지도로 공개하는 일입니다. 그 지도 옆에는 ‘이 과목을 들으면 어떤 평가를 경험하고, 대입에서 무엇과 연결되는지’를 알기 쉽게 붙여 놓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선택 앞에서 강해지지만, 불확실성 앞에서는 지칩니다.


세 번째로 경기도가 전국 최초로 일부 서·논술 평가에 AI 채점을 도입했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기술은 우리의 일을 덜어주기도 하지만, 설명되지 않는 점수는 또 다른 불신을 낳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루브릭의 투명성과 이의제기 절차의 분명함, 그리고 무작위 표집 재채점 같은 안전장치입니다. 아이들이 묻습니다. “왜 이 점수인가요?” 그 질문에 교사와 시스템이 함께 답할 수 있을 때, AI는 비로소 수업의 동료가 됩니다.


창원에서 발생한 교권 침해 사건의 처분 소식도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징계가 내려졌다고 해서 관계가 회복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징계는 ‘끝’이 아니라 회복의 시작이라는 것을. 피해 교사를 보호하고, 가해 학생에게 책임을 묻는 절차와 더불어, 교실의 규범을 다시 세우고, 대화의 자리를 마련해야 다음 사건을 줄일 수 있습니다. 학교가 다시 배움의 공간이 되려면, 안전과 존중이 먼저 회복되어야 합니다.


경남의 학교폭력 피해율이 상승했다는 소식은 더 직접적입니다. 특히 초등에서의 언어폭력과 사이버 문제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지나칠 수 있는 농담과 짤, 밈에서 시작됩니다. 규칙은 바깥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학급에서 아이들과 함께 말의 규칙을 합의하고, 단체 채팅의 시간과 예절을 정하고, 목격자가 어떻게 개입할지를 연습해야 합니다. “멈춰 세우기–도움요청–기록 남기기.” 짧지만 강력한 세 문장을 아이들의 일상 언어로 만들어 주는 일, 그것이 예방입니다.


전교조가 고교학점제 폐지 서명운동에 나섰다는 소식도 적지 않은 파장을 예고합니다. 정책의 타당성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겠지만, 현장에서 당장 필요한 건 학교의 공식 절차와 정보가 투명하게 공유되는 일입니다.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는 학교에서, 교사는 정파적 선언이 아니라 학생에게 필요한 길 안내로 존재감을 증명해야 합니다.


오늘의 칼럼 두 편은 더 큰 지평을 건드립니다. 중국의 과학기술 도약 속에서 한국 교육이 놓치고 있는 전략적 상상력, 그리고 AI 시대에 평생교육의 판을 다시 짜야한다는 제안. 결국 배움은 학교를 넘어 생애 전반으로 이어져야 하며, 우리는 아이들에게 “시험 끝이 배움의 끝이 아닌” 삶의 구조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실은 오늘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복잡한 뉴스들을 우리 반 언어로 번역해 보겠습니다. 이번 주 안에 세 가지만 시작해도 충분합니다.

첫째, 선택과목 3개년 로드맵을 준비해 공개합니다. 개설 가능성, 선이수 관계, 평가 방식, 대입과의 연결을 한눈에 보이게 정리해 아이와 보호자가 예측할 수 있게 합니다.

둘째, AI 채점 안내문을 함께 내놓습니다. 루브릭, 샘플답안, 이의제기 절차, 사후 표집 재채점 계획을 담아 “왜 이 점수인지”에 먼저 답합니다.

셋째, 학급 규범 재설계 시간을 갖습니다. 놀림과 비난이 아닌 피드백의 언어, 밤 10시 이후 단톡 금지와 같은 생활 규칙, 사진과 밈 사용의 동의 원칙을 아이들과 합의합니다. 규칙은 선언이 아니라 약속일 때 살아납니다.


다시, 아침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선생님, 과목 선택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죠?”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네, 네가 하고 싶은 길을 찾자. 다만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함께 보이게 만들자.” 좋은 제도는 설계로 시작해 실행 역량으로 완성됩니다. 정책은 멀고 교실은 가깝습니다. 그래서 답은 언제나 우리 반에서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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