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덕률 은사님께 드리는 한 편의 감사 인사
오늘, 새벽에 대전으로 전국합창대회 가는 버스 안에서 홍덕률 총장님의 글을 신문 한 귀퉁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만났습니다.
〈청년 극우화, 대책 급하다〉라는 제목 아래, “홍덕률의 세상 읽기.”
대구대학교 총장으로 계셨던 홍덕률 교수님!!!
제게는 여전히 ‘총장님’이기 전에, 사회학과 강의실 맨 앞줄에서 눈을 반짝이며 듣던 은사님입니다.
민주주의 이론, 사회 계층론, 정치사회학, 매스컴과 사회, 사회운동론, 직선 총장을 위해 헌신하신 실천가의 모습….
선생님의 강의를 따라다니며 저는 “세상이 이렇게 보일 수도 있구나”라는 두근거림을 처음 배웠습니다.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구조적 폭력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갈라놓는지, 언어와 프레임이 어떻게 여론을 만들고 때로는 사람을 향해 칼날이 되는지 배웁니다.
이제 저는 고등학교에서 ‘정치와 법’을 가르치며, 교실에서 그때 배운 언어를 조심스럽게 풀어 보려 하고 있습니다.
1. “청년이 변했다” 말하기 전에
홍 총장님의 이번 칼럼은 ‘청년 극우화’를 단순히 “요즘 애들이 문제”라고 몰아붙이지 않습니다.
극단적 경쟁 구조 속에서 밀려난 청년들의 불안,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분노, 그 분노가 향하는 방향을 정교하게 짚어냅니다.
“한 번 뒤처지면 다시 올라갈 사다리가 없다”는 감각,
“열심히 해도 내일이 보이지 않는다”는 체념.
저는 이 문장들을 읽으며, 교실에서 만나는 학생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수능을 앞두고도, 내신 등급표보다 더 무서운 건
“선생님, 저는 이미 늦은 거죠?” 하고 묻는 학생들의 목소리입니다.
청년 극우화는 어느 날 갑자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튀어나온 현상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 온 구조적 불안이 향할 곳을 잃고 “가장 약한 사람”을 향해 쏟아지는 과정일지 모릅니다.
홍 총장님은 그래서, 청년 문제를 교육의 실패, 종교의 실패, 정치의 실패가 얽힌 사회적 병리로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지점에 저는 깊이 공감했습니다.
2. 교실에서 ‘똘레랑스’를 이야기하는 이유
정치와 법 시간, 저는 한 학기 동안 학생들과 ‘똘레랑스(tolérance, 관용)’를 가지고 여러 차례 토론합니다.
“혐오표현도 표현의 자유인가?”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까지 우리는 참아야 하는가?”
“관용과 무관용의 경계는 어디인가?”
학생들은 처음엔 ‘좋은 말’ 대답을 합니다.
“서로 이해해 줘야죠.”
“다름을 존중해야죠.”
하지만 실제 사례를 들려주면 이야기는 훨씬 복잡해집니다.
이주노동자를 향한 ‘단일민족’ 담론,
여성과 성소수자를 향한 온라인 조롱,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향한 “출근길 방해” 댓글,
특정 지역, 특정 대학을 향한 집단 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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