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각예술 Aug 31. 2023

묻습니다, 아멘.

「곡성」, 2016

곡성

「곡성, 2016

나홍진 감독 / 곽도원, 천우희, 쿠니무라 준 주연


  「곡성」은 단편영화 「완벽한 도미요리」와 장편영화 「추격자」등의 작품들을 제작한 나홍진 감독의 공포, 미스터리 영화입니다.


  다양한 종교의 레퍼런스가 들어가 있으며 영화 내적으로는 곡성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종구 일가를 두고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 이면을 조금만 살펴본다면 '나홍진'이라는 인간이 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 전지전능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I

줄거리


시골동네 경찰인 종구

  작고 조용한 마을 곡성에는 종구와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동네 파출소 경찰이었던 종구는 그리 살갑진 않지만 자신의 가족, 그중에서도 딸인 효진을 끔찍이 아끼며 옹기종기 살아갑니다.

  

  그러나 곡성에 거주하던 외지인을 중심으로 바람 잘 날 없는 파란이 마을을 뒤덮기 시작하는데요.


  과거 외지인에게 강간당했던 여성이 알몸으로 마을을 배회하거나, 갑자기 미쳐버려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는 등 주민들끼리는 막연하게 외지인이 사건의 원흉인 것처럼 소문이 퍼질 뿐이었습니다.


  종구는 이 사건에 대해 잘 아는 듯한 동네 여자 무명을 만나거나 외지인이 등장하는 악몽을 꾸는 등 그저 께름칙한 일이라며 넘기는 듯 보였으나, 종구 일가에게도 큰 위기가 닥치게 됩니다.


변해가는 효진

  사랑스러운 외동딸 효진이 변해간다. 일전의 소녀는 온데간데없이 홉뜬 눈과 알 수 없는 광기를 품으며.


  종구는 아무런 물증도 없이 외지인을 찾아가 '왠지 의심 가는' 그를 겁박하기도 하고 신통하다던 무당을 모셔 금기시된다던 을 날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뾰족한 수 없이 이해할 수도 직면할 수도 없는 고통들이 이어지고, 그저 하나의 인간일 뿐이자 딸을 지켜야 하는 아버지로서 종구는 너무나도 큰 몰이해 앞에서 허덕이죠.





II

묻습니다, 아멘.

작품의 질문



  악마와 신. 무명과 외지인. 아버지와 딸이라는 개체가 존재하는 이 세상이자 곡성이라는 작은 땅의 이야기. 


  작품은 묻습니다. 보잘것없고, 이유 없이 신의 권능대로 죽고 사는 인간이 우리 앞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의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가?


  눈앞에 있는 것이 악마라고 치자. 우리는 우리의 구원자가 악마는 아니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는가? 이 같은 질문은 영화의 전체적인 모호함과 열린 결말로서 쐐기를 박습니다.


외지인과 마주한 종구

  관객은 엔딩까지 달려가는 영화를 보며 외지인이 악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왜 악한 것인지, 종구의 딸에게 왜 그런 짓을 한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조차 없죠. 단지 외지인은 악마로서 존재할 뿐이니까요.


  뿔이 나고, 눈이 빨갛고, 목소리가 듣기 싫을 뿐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악마라는 존재를 확인할 뿐


  그가 선하고, 악하고, 내게 어떤 짓을 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전지전능과 무력감에 대한 공포만을 가지는 게 전부일 뿐이죠.


  한 편 천우희 배우가 분한 무명은 이름 그대로 고유명사 없이 어슬렁대는 존재입니다. 전지전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도 조금 민망할 정도의 그냥 동네 여자.


  심지어 조금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때때로 관객에게 그녀는 일이 최악으로 치달을 때까지 방관도 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결말에서 악마임이 드러나는 외지인도 손쉽게 제압하지는 못하고, 결국 종구 가족을 구원하지도 못하고요.


무명

  곡성 영화를 떠올려보면 산이나 지역 풍경 같은 자연 관련한 인서트가 굉장히 많이 들어가는데 아마도 무명, 고유명사 없는 초라한 신은 이 웅장한 자연과 동일시되도록 유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웅장하게 마을을 내려다볼 뿐인 산과 물에게는 살인사건, 도둑, 강간, 사기, 거짓말, 욕심. 이런 죄악에 대해 해답을 물을 수도 없듯이 무명도 그러하므로. 그리고 작품의 시선이 바라보는 오늘날의 ‘신’도 그러하겠지요.


  아마도 이야기하고 싶었다기보단 질문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신에게.


  어째서 당신은 방관하십니까?


  아무리 물어봤자 신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냥 시원하게 모든 것을 설명하고 가족들에게 닥친 재앙을 걷어주길 바라던 종구에게도 무명은 말합니다.


기다려. 절대 그놈에게 홀리면 안 돼.


  아이러니하죠. 선악을 떠나서 절대적인 존재와 원활하게 소통하고 계획대로 따르는 관계는 외지인(악마)과 그의 파트너인 것 같아서요.


  결국 이 모든 의혹과 질문은 종구의 사촌인 견습 신부와 외지인의 조우 장면에서 마지막 질문을 맺습니다.


어째서 두려워하느냐?

우리가 뭘 안다고 두려워하는가?





III

인간의 멍청한 동력, 자유의지



  선악에 대한 회의감과 모호함은 ‘존재’ 자체로 정리됩니다. 신은 신이고, 악마는 악마. 이는 모호함을 거부하고 유기성과 이유에 대해 탐구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언제나 부딪힙니다.


  그러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종구’라는 캐릭터로 표현됩니다. 딸을 살리기 위해 인간을 아득히 초월하는 존재 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불굴의 의지, 자신을 도와주려는 줄도 모르고 신을 거부하는 인간의 아집.


  관객의 입장에서 보기에 종구의 선택은 어리석고 바보 같을 뿐 그는 평범한 인간입니다. 딸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아버지. 어떤 존재가 선하고 악한지 구분하기엔 너무 무지함과 동시에 자신의 삶과 존재 이유가 어떤지도 파악할 수 없는 개체.


  결국 인간이 만든 영화, 인간이 묻고 싶었던 질문. 인간의 자유의지로 묻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 우리의 창조자들은 그 이유를 알고 행동하는가?"


  풀 수 없는 문제를 남겨둔 신은 아직도 소매를 걷고 뭔가를 할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38평 좌불안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