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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삭 Oct 18. 2023

진실 게임에서 이기는 법

「사브리나 (SABRINA)」, 2018

못 찾겠다 꾀꼬리!


「사브리나 (SABRINA)」, 2018

닉 드르나소 작품 / 2018 맨부커상 후보작 선정


아니고요

  미국의 만화가 닉 드르나소의 작품인 「사브리나」입니다. 세계적 문학상인 맨 부커 어워즈에서 무려 그래픽노블이 후보로 선정된 초유의 사건이기도 한데요.


   그래픽노블인 만큼 모든 장면이 컷 안의 그림으로 채워져 있으나 소설의 탄탄한 스토리를 전개하고 만화의 시각적인 연출 역시 놓치지 않아 평단의 찬사를 받은 바 있습니다.


형식적인 인사와 갈 곳을 잃은 대답

  '사브리나'라는 평범한 여성이 실종됨으로써 시작되는 작품 치고는 그림체가 어째 청소년 만화 같기도, 폐쇄적인 느낌도 납니다.


  그러나 후술 하겠지만 작품이 갖고 있는 독특한 연출과 스멀스멀 독자에게 다가오는 비극, 또 현실을 처절하게 고발하는 주제의식을 가장 뒷받침해 주는 요소 역시 이 모호한 그림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I

줄거리

일상을 보내는 사브리나

  남자친구와 동거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브리나'라는 여성이 갑작스레 사라집니다. 우애가 좋았던 그녀의 동생, 산드라와 그녀의 연인이었던 테디는 갑작스레 모든 걸 잃은 기분에 빠져 허우적댈 뿐.


  특히 테디는 이 사실을 버티지 못하고 발작을 일으키다 옛 친구였던 캘빈의 집에 얹혀살게 되는데요. 공군으로 일하는 캘빈은 가정불화로 아내와 딸을 타지로 떠나보낸 탓에 테디의 거주를 흔쾌히 맞이합니다.


  희망이 가끔은 가장 잔인한 기다림을 만들기에, 두 사람은 각자의 기다림을 짊어지며 외면하고 싶은 고통에 힘겨워합니다. 


  캘빈은 큰 절망에 빠져 무기력해진 테디를 걱정하며 진심으로 그를 보살피고, 테디는 말 그대로 먹고, 싸고, 자기만 하며 시간을 허송세월 보냅니다. 올려다볼 수 조차 없는 막막한 슬픔 앞에서 그저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죠. 쳐다보면 다가올까 애써 시선을 돌리듯.


  고독을 묵묵히 버티던 캘빈 역시 다시 가족과 합치려던 계획이 잘 풀리지 않습니다. 딸랑 양육비만 잘 보내주는 아버지가 될 수 없다던 캘빈은 어쩌면 가족이란 자신이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곳임을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영상에 복면을 쓴 채 등장했던 티미와 피해자 사브리나

  테디와 산드라의 기다림이 무색하게 그녀의 실종 사건은 더욱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사브리나는 사실 잔인하게 살해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촬영된 스너프 필름이 인터넷에 유출된 것인데요.


  방구석 외톨이이자 게임에 빠져 살았다던 '티미 얀시'라는 남성이 일으킨 끔찍한 사건. 녹화 테이프를 여러 곳에 발송 후 본인도 목숨을 끊었기에 가해자와 피해자 말고는 질문도, 대답도 의미가 없어져버린 비극이 되어버립니다.


  하물며 티미가 생전 진성 음모론자였다는 점이 빌미가 되어 사브리나 납치살인사건은 온갖 음모론의 주인공이 되죠.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암흑 세력의 쇼다!

곧 터질 정치권 이슈를 가리기 위해 무고한 미국 시민을 희생시켰다!

사브리나는 살아있다, 그 주변인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사브리나는 애초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대역배우를 세운 이 사건 자체가 사기극이다!

피해자의 남자친구라던 작자는 어디로 튀었나! 어째서 함구하는가.

잠재적 용의자를 먹이고 재워주는 캘빈 로벨이라는 자는 누구인가!
공군에서 일한다는 캘빈은 분명 이 거대한 부조리극의 앞잡이가 분명하다.
우리는 속지 않는다.
이 
시스템은 천천히 국민들을 빨아먹기 위해 변화했고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한 군대가 매일 밤 집결되고 있으며
조용히 진행될 학살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진실을 추구할 것이다.
진실은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진실을 증명해 보이겠다.
기자들에게 시달리는 캘빈

질문에 짓밟힌 답변은 어디로 가는가.


  매일같이 들이닥치는 기자와 입맛대로 바꿔 보도되는 기사. 반 협박에 가까운 편지들과 신경쇠약을 일으키는 수백 통의 메일. 등장인물들은 이 소용돌이 속에서 조금씩 망가져갑니다.


  테디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모론자의 궤변을 매일같이 듣다 잠시 캘빈을 정말 국민을 학살하게 될 킬러로 착각하기도 하고, 두 달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은 테디에게 산드라는 비난을 퍼붓기도 합니다.


죽음은 언제나 산 사람들의 몫이다

  유일한 해결방법은 시간이라는 듯이, 비극은 안타깝지만 내일도 모레도 일어나는 일이기에 서서히 잊힙니다. 사브리나, 티미, 등장인물들이 겪던 고통들은 썰물에 끌려가듯 어느새 세상의 관심에서 사라지죠. 남은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그저 죽지 않은 존재들. 그 속에서 천천히 다시 일어나 보려는 사람들 뿐.





II

트루스 오어 데어


  트루스 오어 데어 Truth or Dare는 미국에서 우리나라의 '진실 게임'처럼 흔히 알려진 게임입니다.

1. 한 명을 지목해 Truth or Dare? 라고 물으면, 지목자는 트루스 혹은 데어 하나를 선택합니다.
2. 진실(Truth)을 선택할 경우 받는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야 하고,
3. 행동(Dare)을 선택할 경우 왕게임처럼 시키는 행동을 해야만 하죠.


  사실상 이 게임에 승패란 없습니다. 게임의 희비를 가르는 기준은 술래를 정하는 가위바위보, 진실의 유무가 아닌 그 자리에 존재하는 사람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누군가에겐 폭탄이기도 하고, 시시하며 예상 가능한 범주이기도 합니다.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르거나 교묘하게 허구를 섞은 경우도 있고요.


답변이 존재하는 질문은 따로 있으니

  그렇다면 트루스 오어 데어에서 이겨먹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마도 룰 밖에 있는 관찰자가 되면 되겠죠.


  조금의 진실도 발설하지 않은 채 게임에 뛰어듭니다. 매 질문마다 거짓말을, 모든 답변을 거짓말로 치부해 버립니다.


  모두가 인식하고 알고 싶어 하는 진실은 공통되어 있다는 룰을 부수고, 데어를 고른 이들에게 우스꽝스러운 행위를 시키는 것으로 만족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면서요.


사브리나의 소식에 절망하는 테디

  이 글의 제목에도 등장하지만 이 작품의 중요한 지점은 '진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찾고 싶어 헤집어대는 언론과 음모론자들, 컷 구석구석을 눈으로 뒤지는 우리가 엉뚱한 짓을 하고 있죠.


그래서 티미 얀시는 사브리나를 왜 죽였을까요?


  대체 군 기관에서 종사하는 캘빈의 인적사항을 음모론자들이 어떻게 입수했으며 티미는 마치 과시욕을 드러내듯 살인 행각을 촬영해 놓곤 왜 목숨을 끊었을까요?


  당사자들은 카메라의 플래시 소리와 켜켜이 쌓이는 메일함 속에 녹아든 이러한 궁금증들의 무게에 짓눌려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습니다. 진실 게임에서 이기고자 했던 이들은 여유롭게 손을 털고 의자를 빼고요.



    

   「사브리나」는 메시지를 철저히 숨기고 연막을 일으킴으로써 우연히 손에 잡힌 주제의식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SNS와 거짓말의 네트워크가 과포화된 현대에서 진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또 훨씬 쉽고 간편해진 거짓 폭력과 양산되는 음모 속에서 사람들은 쉽고 간편하게 희생됩니다. 포커페이스처럼 인물들은 간혹 무슨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끔, 가끔 감정을 너무 깊게 삼켜버릴 때면 표정에 달라붙어 있던 것들도 떼어지는 경우가 있듯이.


  속내는 어떻고 이 표정을 짓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린 네모난 컷을 끊임없이 뒤집니다. 이 비극에 대해 주변에 떠벌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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