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특별했던 맥주들 : 밸러스트 포인트 스컬핀
최근 몇 년만에 고향 친구와 만났다. 중학생 때 부터 매일 같이 붙어다니던 사이라 어색함 하나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문득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생각해보니 첫 만남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어떠한 계기가 있긴 했지만, 그 보다는 몇 번의 만남과 교류를 지속적으로 거치며 친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비슷하게 내 인생을 바꾼 무언가와 처음 만난 순간도 보통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운이 좋게도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는데, 바로 2024년 12월 1일의 추운 겨울 밤 홍대 거리에서였다.
대학생으로서 첫 번째 해를 보내고 있었던 나는 술이 가진 다양한 매력에 빠져 다양한 종류의 술을 찾아마시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내가 가장 관심 있었던 분야는 바로 칵테일이었는데, 단맛이 나고 마시기 편한 술부터 도수가 높고 진한 술까지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고, 직접 만들며 하나하나씩 새롭게 알아가는 재미가 컸기 때문에 주류 반입이 금지된 기숙사에서도 몰래 술을 사 모아 조주를 연습할 정도였다.
칵테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나는 ‘주류 갤러리’ 라고 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자주 방문하였는데, 거기서 나는 칵테일에 대한 것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주류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특히 2014년은 한국에서 크래프트 맥주가 태동하던 시기였는데, 그 덕분인지 많은 맥주 마니아들이 매일같이 맥주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카페 옆자리에서 흥미로운 얘기를 하는 것을 우연히 엿듣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간혹 그런 글을 클릭할 때 마다 나는 다양한 맥주들의 이름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수도권에서 자취하던 나를 보러 어머니가 울산에서 올라오셨다. 그 날 어디를 다녀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일정의 마무리를 홍대 주변에서 하고 있었고, 나는 집에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술을 한잔 하고 들어가자고 제안하였다. 그렇게 술집을 찾아 주변을 헤매던 도중, 내 생에 첫 바틀샵인 ‘바틀원(지금은 폐업함)’에 우연히 들어가게 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10평 남짓한 공간에 수많은 맥주 병들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나는 입이 떡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모르는 맥주 뿐이였지만 그런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 매료되어 몇 분 정도는 그저 구경만하다가 그제서야 ‘혹시 여기서 구매한 맥주를 마실 수도 있나요?’ 라고 직원분에게 물으며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쉽게도 바틀원은 오직 테이크 아웃만 전문으로 하는 매장이었기에 매장 내 소비는 불가했지만, 그 대신 아주 가까운 거리에 그들의 펍이 운영 중이었고 그 쪽에서 생맥주까지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바틀샵에서 나온 우리는 조금 더 걸어 내 생에 첫 크래프트 펍인 ‘브루원’으로 발걸음을 향하였다.
어둑어둑하고 조용한 밤거리를 걷다보니 맥주가 그려진 표지판을 발견하였고, 상가의 2층으로 올라가니 말씀해주신 펍이 등장하였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니 따뜻하면서도 포근한 분위기의 펍이 우리를 반겼고, 공간에서 나는 은은한 나무 냄새가 내 마음을 편하게했다.
조심스레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판을 받았는데, 도대체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맥주밖에 없어 당황하던 찰나, 주류 갤러리에서 칭송받던 한 맥주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밸러스트 포인트 스컬핀'
맥주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주로 간단하게 '스컬핀'이라고 불리던 이 맥주는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위치한 양조장 '밸러스트 포인트(Ballast Point Brewing)'의 대표 맥주였다. 밸러스트 포인트 양조장은 미국 크래프트 맥주 초창기인 1996년에 설립되어 한때 샌디에이고를 대표하는 양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맥주 라벨에 물고기 일러스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밸러스트 포인트의 창립자인 잭 화이트(Jack White)가 바다를 깊이 사랑했던 사람으로, 서핑과 낚시를 즐기던 그의 열정이 자연스럽게 브랜드에 반영된 결과였다. 이러한 독특한 라벨 때문에 "맥주에서 비린내가 난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유쾌한 개성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밸러스트 포인트는 다양한 스타일의 맥주를 생산하는 양조장이었지만, 스컬핀이 처음부터 그들을 대표하는 맥주는 아니었다. 양조장이 설립되던 1990년대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인기를 끌던 스타일은 맥아의 묵직하고 고소한 맛과 송진 같은 진한 쓴맛이 특징인 클래식 IPA였다. 이 역할을 밸러스트 포인트에서는 눈다랑어가 그려진 '빅 아이(Big Eye)'라는 맥주가 담당했고, 한때는 클래식 IPA를 이야기할 때 가장 모범적인 예시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되던 맥주였다.
※ IPA(India Pale Ale)란?
IPA는 맥주의 스타일 중 하나로, 맥주의 원료 중 하나인 홉(Hop)을 다량 첨가해서 만든 쓴맛이 진하고 홉의 풍미가 강한 맥주를 의미한다.
과거 영국에서 당시 식민지였던 인도의 동인도회사로 맥주를 수출하게 되었는데 많은 맥주들이 긴 항해를 버티지 못하고 쉬어버렸다. 이에 영국의 양조사들은 맥주의 보존력을 높이기 위해 고민했고, 방부제로 사용되던 홉을 맥주에 더욱 더 많이 넣어 완성시켰다. 이렇게 탄생한 맥주는 긴 항해를 버틸 뿐만 아니라홉의 진한 풍미와 쓴맛을 지니고 있었다.
몇백년 뒤 미국에서 미국산 재료로 양조한 IPA는 미국 홉에서 기인한 풍성한 과일-송진 향을 지니고 있었고, 이후 IPA는 미국의 크래프트 맥주 씬을 대표하는 맥주 스타일로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IPA의 트렌드도 변화했다. 홉의 지속적인 개발 덕분에 과일 향이 풍부한 홉들이 등장했고, 양조사들은 이러한 싱그럽고 화사한 홉의 매력을 더 강조하고 싶었다. 그 결과 묵직하고 달콤한 맥아의 존재감은 점차 줄어들고, 보다 가볍고 깔끔한 베이스 맥주에 홉의 과일 향을 더욱 적극적으로 담아내는 새로운 IPA 스타일이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밸러스트 포인트 역시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새로운 맥주를 출시했다.
스컬핀은 당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아마릴로(Amarillo)와 심코(Simcoe) 홉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졌으며, 폭발적인 자몽 껍질 향과 싱그러운 시트러스 풍미를 자랑했다. 기존 IPA 특유의 쓴맛은 유지하면서도 가볍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이 맥주는 시장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2010년과 2014년 세계 최고 권위의 맥주 대회 중 하나인 World Beer Cup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는 등 여러 국제 대회에서 수상하며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2014년, 밸러스트 포인트의 국내 첫 수입 시점에 맞춰, 나는 바로 이 펍에서 그 전설적인 맥주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맛있는지 한 번 마셔보자! 라는 마음에 스컬핀과 함께 몇가지 자체 맥주가 섞인 샘플러를 주문하였고, 몇 분 뒤 총 네 종류의 맥주로 구성된 샘플러가 테이블에 등장하였다.
친절하게도 샘플러에는 맥주를 마시는 순서가 제시되어 있었고, 이를 따라서 하나 하나 마시며 어머니와 함께 처음 마셔보는 맥주 맛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마지막 맥주까지 다다르게 되었고,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말처럼 마지막 맥주는 바로 그렇게 궁금했던 스컬핀이었다. 투명하고 밝은 황금색에 소복한 흰 거품. 일반적인 맥주 보다는 조금 진한 매력적인 자태를 뽐내던 잔을 조심스레 드는 순간, 무언가 이상함이 감지되었다.
‘이 자몽냄새는 도대체 어디서 나는거지?’
향의 근원을 찾기 위해 맥주 잔을 조금 더 코에 가까이 가져다대었고, 그 추측은 정답이었다. 작은 샘플러 잔에 서빙된 150미리 남짓한 맥주에서 화려한 시트러스 향이 맥주에서 퍼져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자몽 향수와도 같은, 그 동안 내가 알던 맥주와는 너무나도 다른 향이 느껴져 잔을 든채로 잠시 얼어있었으나, 맛까지 보자는 생각에 조심스레 잔을 기울여 목을 축였다.
입 안에 퍼지는 풍성한 자몽향, 경쾌함을 더해주는 적당한 탄산감, 약간의 단맛도 존재하지만 깔끔하고 쌉쌀하게 마무리되며, 쓴맛은 분명 강렬하지만 그 화려한 향 덕분에 또 다시 한 모금 더 마시고 싶어지는 그 전체적인 경험은 정말 놀라움 그 자체였고,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펍에서 나와 다시 바틀원으로 향해 스컬핀과 함께 몇 가지 다른 비슷한 스타일의 맥주를 추천받아 구매하고 있었다.
이 날이 나에게 정말 즐거운 경험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단순히 소위 말하는 ‘인생 맥주’와 처음 만난 날이기도 하지만, 이것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어머니와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어머니는 스컬핀을 마시고 1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스컬핀과 같은 맥주에만 머물러있지만, 나는 조금 달랐다. 어떻게 보면 미련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스컬핀을 마시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이 맥주보다 더 맛있는 맥주는 없을까?’
그렇게 내 맥주 인생은 시작되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스컬핀은 나의 '인생 맥주'였지만, 슬프게도 스컬핀과 밸러스트 포인트는 내 곁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당시 나는 크래프트 맥주를 막 마시기 시작해 잘 몰랐지만, 2010년대는 대기업 맥주와 크래프트 맥주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크래프트 맥주는 '타도 대기업'을 외치며 다채로운 맛으로 맥주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고 있었고, 반대로 대형 브랜드는 시장의 파이를 갉아먹는 크래프트 맥주의 성장에 대응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들이 내놓은 묘수는 바로, 그들의 어마어마한 자본으로 크래프트 맥주 브랜드를 사들이는 것이었다. 2010년, 맥주 업계의 공룡 기업 AB-Inbev가 크래프트 맥주계의 전설적 존재인 구스 아일랜드를 인수하며 그 흐름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이름난 중소규모 양조장들이 하나둘 대기업에 매각되었고, 압도적인 품질로 인정을 받던 밸러스트 포인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2015년, 여전히 새로운 맥주를 찾아 마시는 데 열중하던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글로벌 주류 기업 콘스텔레이션(Constellation)이 밸러스트 포인트를 무려 10억 달러(한화 약 1조원)에 인수했다는 것이었다. 초반에는 기존 스타일을 유지하는 듯 보였지만, 새로운 맥주의 출시는 점차 더뎌졌고 국내 수입 빈도도 감소했다. 게다가 수입사가 크래프트 맥주 전문 수입사에서 하이트진로로 바뀌며 소규모 특별 라인업도 전부 단종되고 말았다.
이후 현지에서도 밸러스트 포인트의 브랜드 가치는 점차 하락했고, 결국 콘스텔레이션은 밸러스트 포인트를 또 다른 주류 기업에 매각하게 되었다. 한때 전설적이었던 양조장은 맥주 마니아들에게 서서히 잊혀졌다.
내가 크래프트 맥주를 마시며 처음 꿈꾸었던 '현지 양조장에서 스컬핀을 마셔보고 싶다'는 목표는, 몇 년이 지나도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가장 사랑했던 양조장이 쇠락해가는 것을 지켜보며 씁쓸함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8년이 지난 2022년, 개인 사업 준비를 하며 시간이 생긴 나는 미국 내 여러 도시를 방문하는 한 달간의 여행을 계획했고, 마침내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샌디에고를 찾게 되었다.
LA에서 2시간가량 차를 달려 샌디에고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한 달간의 맥주 여행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지만, 나는 꿈에 그리던 밸러스트 포인트 양조장으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눈에 들어온 웅장한 규모의 옥외 탱크와 양조장의 로고를 보며 전율을 느낀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내부로 들어서 구석구석 둘러본 뒤에야 바에 앉을 수 있었다.
메뉴판을 보기도 전에 나는 기다리지 못해 바텐더에게 스컬핀이 판매 중인지 물었고, 긍정적인 답변을 듣자마자 바로 한 잔을 풀 푸어(Full Pour)로 주문했다. 잠시 후 내 앞에 맥주 한 잔이 놓였고, 그 잔은 평범한 맥주가 아니라 지난 8년간 찾아 헤맨 바로 그 맥주였기에 더욱 감격스러웠다.
비록 내가 스컬핀 생맥주를 한 두번 마신 것이 아님에도 이토록 이 경험을 내가 꿈꾸던 것은, 나와 같은 맥주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현장에서 마시는 맥주는 완전히 다른 맥주다" 라는 얘기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보관과 운송에 민감한 IPA와 같은 스타일의 맥주는 신선도가 아주 중요한데, 이 차이를 내 첫 미국 여행에서 느끼고 난 뒤 나는 최대한 양조장 현장에서 맥주를 마시지 않는다면 그 맥주를 완벽히 재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마시는 그 맥주가 그 양조장이 의도한 맛과 컨디션에 100% 일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몇몇 지인들은 이미 샌디에고에서 스컬핀을 맛본 뒤 "스컬핀도 이제는 끝났다"고 했지만, 나는 내 혀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몇 년을 더 기다린 끝에 비로소 그 꿈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맛을 보기 전 사진을 몇 장 찍고, 처음 이 맥주를 마셨던 그때처럼 조심스레 잔을 코앞으로 가져가 향을 맡고 한 모금 넘겼다. 그 순간, 어머니와 함께했던 서울의 추운 겨울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던 그 첫 만남이 스쳐 지나갔다. 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여전히 풍성한 시트러스 향, 짜릿한 탄산감, 쌉싸름한 쓴맛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만큼의 감동은 아니었다.
왜였을까? 그동안 5천 종 이상의 맥주를 마시며 내 입맛이 변했던 것일까? 아니면 실제로 스컬핀의 품질이 바뀐 것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꿈에 그리던 스컬핀은 기대만큼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후련하기도 했다. 어쩌면 오랜 목표를 드디어 달성했기 때문일지도, 혹은 '이보다 더 맛있는 맥주를 찾겠다'는 최초의 목표를 이미 훌쩍 넘어섰음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약간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몇 잔의 맥주를 더 마신 후 나는 양조장을 나섰다. 비록 아름다운 재회는 아니었지만, 인생의 중요한 목표를 이루었던 날이었고, 그렇게 나는 스컬핀을 뒤로한 채 또다시 새로운 인생 맥주를 찾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