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아침에 해고를 당한다는 기분이 이런거구나, 윤서는 맥이 탁 풀린다. 어제 퇴근하고 회식자리에서 술까지 주고받던 동료들이 이제는 데면데면하게 그녀를 대한다. 아무 통보도 없이 그녀의 책상을 치워버리는 것으로 그녀는 해고를 당했다. 출근하고나서야 자신이 이미 잘렸음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얘기는 어디까지나 남의 얘기려니 했던 윤서는 뭘 뭘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예전 자신의 책상이 있던 자리에 멀뚱히 서 있다.
그러자 김과정이 다가오더니 "윤서씨, 커피 한잔 할까?"라며 그녀를 애써 사무실밖으로 내보내려한다. 얘기라고 해봐야 해고에 대한 이야길테며 왜 어제 저녁까지 윤서에게 아무 언질도 줄수 없었는지에 대한 뻔한 변명이기에 그녀는 그제서야 "아뇨. 가볼게요"라고 꾸벅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온다. 인사는 왜 했을까 멍청하게...
어떻게 집에 왔는지도 모르게 그녀는 이미 원룸에 들어서고 있다. 퇴근하면 늘 하던 그 차례대로 일단 외투를 벗고 오는 동안 전화라도 온게 없나 폰을 확인하고는 편의점에서 사다놓은 삼각김밥으로 밥을 먹는다. 그리고는 마실물을 꺼내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녀가 냉장고로 향하는데 그제야 뒤늦은 울분과 회한이 밀리들면서 그녀를 꺼이꺼이 울게 만든다. 그렇게 한참을 바닥에 고꾸라져 울던 윤서는 침대로 가서 죽은 사람처럼 가만 누워있는다 . 그러다 그녀는 모로 돌아누우며 몸을 잔뜩 웅크린다. 신기하게도 그러고 있으면 고통이나 아픔이 많이 줄던 기억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렇게 한시간 이상을 있어도 분노와 수치심, 배신감은 가시지 않았다.
해서 그녀는 옷을 트레이닝으로 갈아입고 조깅을 하러 나간다. 비록 빈촌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동네가 좋은건 가까이 강이 흐른다는 것이어서 그녀는 강을 향해 죽어라 달려간다. 뛰는 동안 온몸은 땀에 젖고 헉헉 숨이 가빠온다. 가슴에 통증이 느껴질때쯤 그녀는 강에 이른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가? 동료들 사이에서 모나게 군것도, 횡령을 한것도, 상사에게 대든것도 없는데 왜 잘렸을까...그 생각이 강을 바라보던 시선을 다시 그녀 자신에게로 향하게 한다. 안되겠다. 돌아가자
.
처음 며칠은 그 무엇을 해도 시들하고 소소한 즐거움마저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자신이 '루저'라는 생각만 들어 윤서는 이럴바에는 다 잊고 잠을 자기로 한다. 그렇게 한 일주일 밥먹고 화장실가는 시간만 빼고는 내내 침대에서 뒹굴었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은 골목 입구의 약국에 가서 수면제를 사다 먹기도 하였다. 그러다 하루는 잠에서 깬 뒤 섬망이 찾아와 자신의 집도 가재도구도 모든게 낯설게 느껴져 힘들어하기도 하였다.
남자 약사는 "가능하면 운동하셔서 몸을 피곤하게 해서 자는게 제일 좋아요"라고 충고를 하였다. 얼핏 자기보다 한두살위쯤으로 보이는 그는 마치 오래된 지인처럼 그녀를 걱정해준다. 언젠가 심하게 몸살이나서 동네 내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이곳에서 지은게 전부였는데. 그래, 내게는 이웃이 있었지 하면서 윤서는 그들 모두에 감사의 마음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살아지는가. 돈이 있어야 하고 소비를 해야 하고 같은 목적을 갖고 모인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살아야 한다 인간은. 그런데 그녀는 오롯이 혼자 버려진 것이다.
그녀가 모처럼 수면제의 힘을 빌지 않고 자려고 한 날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밤새 뒤척이다 보니 이젠 잠도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해서 윤서는 동이 터올때쯤 트레이닝복을 주워입고 며칠 쉬었던 조깅을 다시 하러 나간다.
그렇게 그녀가 좁은 골목길을 달려나오는데 맞은편에서 누군가 역시 조깅을 하며 달려오고 있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하며 그녀가 옆으로 길을 내어주는데
"안녕하세요?"라며 상대가 말을 걸어온다. 그제야 상대의 얼굴을 바라본 그녀는 그가 약사임을 알아차린다. 약사복에 수놓여진 이름 석자가 떠오른다. 한기석.
"어머, 안녕하세요?"라고 하자 그가 "그래요. 이렇게 뛰는게 좋아요. 수영은 더 좋고"라고 말하며 씩 웃는다.
"네.."하고 둘이 서로를 지나칠 즈음, 기석이 제안을 한다. 언제 차 한잔 괜찮겠냐고.
그날의 일은 그저 동네 이웃끼리 나눈 소소한 인사치레 정도의 것이라 여기고 그녀는 그것을 그닥 마음에 두지를 않았다. 그러다 통조림을 열다 손가락을 베이고나서 집에 소독약이며 밴드마저 없다는 걸 알고 그녀가 약국으로 갈일이 생겼다. 그녀의 손가락 상처를 본 기석이 꽤나 걱정이 되는지 약을 내어주면서 제가 드레싱은 해드릴수 없고요, 빨리 가셔서 흐르는 물에 일단 씻고 소독하고 연고바르고 밴드붙이세요 라며 조목조목 알려주는걸 보면서 윤서는 그가 단순한 이웃이상의 감정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나이 서른넘어 직장에서 해고당한 백수에 별다른 재주나 기술도 없는 자기가 약사와 어울리랴 싶은 마음이 그녀를 짐짓 무표정하게 만들어 그녀는 짧게 "네"라고 대답하고 약국을 나왔다.
아무리 상처가 깊지 않아도 역시 소독약이 들어가자 찌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그래 이렇게라도 사람이 준 상처를 잊자 하고 그녀가 호호 불어가며 기석이 내준 연고를 바를때였다 . 전화가 걸려왔다. 기석 그였다.
"저...한기석입니다...약국"이라며 그가 쑥스러워하며 자신을 밝힌다. 내 번호는 어떻게, 하다가 아,개인정보,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 예전 몸살약 지으러 갔을때 혹시 모르니, 전화번호 주실래요? 했던 기억이 난다. 전화로 듣는 그의 음성은 낭랑하고 맑고 투명하였다. 느낌이 좋은 남자라는 생각이 윤서를 스쳤다.
"드레싱 잘됐는지 걱정돼서요.."라는 그의 말에 그녀는 훗, 웃음이 나온다.
"잘 했어요. 별것도 아닌데"라고 하자 "아뇨, 그런거 우습게 보면 안돼요. 덧나기라도 하면..."하다가 "혹시 시간되시면 오늘 저녁"하고 그가 힘들게 말을 잇는다.
그는 약대를 나와 처음엔 대학병원 약국에 근무하다 자기 약국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윤서가 이곳에 이사올적에는 없던 약국이니 얼마 안됐구나 싶다.
그러면서 기석은 실은 강에서 조깅하는 걸 몇번 봤노라 말한다. 아는척을 할까 하다 괜히 방해하는거 같아 그러지 않았다며 괜찮으면 앞으로 아침 운동을 같이 하겠냐고 제안해온다. 그말에 그녀는 물끄러미 그를 보다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그러자 그의 여린 인상을 주는 얼굴에 금방 당황한 빛이 스쳐간다.
"저, 백수예요. 얼마전에 부당해고당한..."이라고 하자 기석이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눈치다.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네요"라며 그녀는 남은 파스타를 서둘러 먹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기석이 말한다. "제가 괜한 말을..."
이후 그녀는 동네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베이커리 아르바이트, 심지어는 강변 휴지며 쓰레기를 줍는 공공근로까지 해가며 겨우겨우 입에 풀칠을 하였다. 그러고 들어오면 곧바로 잠에 빠졌다. 이제 수면제 없이도 잘수있다는 게고맙게 여겨졌다. 아침에 출근시간에 맞춰 허둥지둥 버스 장류장으로 , 전철역으로 뛰어가는 직장인들도 더 이상 부럽지 않았다. 가끔 약이 필요하면 기석의 약국이 아닌 좀더 멀리 있는 노부인이 하는 약국으로 가서 약을 샀다. 왠지 기석과 마주치는 일은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식당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파김치가 돼서 집으로 오던 그날밤, 그녀는 어둠속에 우두커니 서있는 기석과 마주친다. 설마 자기를 기다릴까 하면서도 자기를 기다리는게 맞을거라는 모순된 감정에 그녀는 심란했지만 애써 무표정하게 그를 지나쳐 원룸건물로 들어선다.
"왜 그래요 사람이?"라고 뒤에서 기석이 한껏 화가 난듯 말을 한다.
"한참 기다렸어요.."라는 그의 말에 그녀는 발끈해서 뒤를 돌아본다.
"내가 기라디라고 했나요?..나 힘들어요. 그냥 둬요 혼자 있게"라면서 그녀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방에 들어서서 창문 밖을 내다보자 석고상처럼 그자리에 여전히 서있는 그가 보인다. 왜 가지 않는걸까....
"늘 궁금했어요 어떤데서 사는지"라며 그가 머뭇머뭇하며 그녀의 방에 들어선다.
"커피, 저는 인스턴트 밖에 없어요"라며 그녀가 커피를 한잔 타서 가져온다.
그 커피를 한두모금 마시고나서 그가 "커피를 잘 타시네요"라며 씩 웃는다. 이런 남자가 여태 혼자일리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아무래도 거리를 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는 힐끔 그의 왼손을 쳐다보지만 반지같은건 없다. 하기사 남자들은, 아니 여자들도 요즘 반지는 잘 끼지 않는다.
그러다 그녀는, 설령 이 남자가 아직 미혼이고 따로 여자가 없다 한들 나하고? 라는 생각이 들자 그것은 이상한 피곤함을 몰고 온다.
기석이 커피를 다 마셔갈 즈음, 그녀가 말한다 . 이젠 오지 말라고.
그말에 기석이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본다.
"당신의 성이 너무 단단해서"라고 그가 야릇한 말을 한다.
"내 성?"그러다 그녀는 "어떻게 할까요? 자요? 아니, 당신과 결혼할까요? 그게 가능해요?"라고 쏘아붙인다. 그순간 그가 와락 그녀의 얼굴을 끌어다 강하게 입을 맞춘다.
새벽 어스름 속을 걸어가는 그를 내려다보며 윤서는 이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좀더 월세가 싼 곳으로...아마도 어딘가에는 자신이 혼자서도 잘 지낼수 있을 그런 곳이 있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는데 그녀의 아랫도리에 뻐근한 통증이 느껴진다. 오랜만에 남자가 들어왔던 대가를 윤서는 치르고 있다. 다음엔 밖에서 보자던, 연락한다던 기석의 말 따위는 잊기로 하고 그녀는 간단히 샤워를 하면서 그가 자기 안으로 들어왔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옷도 입지 않은채 플란넬 침구속으로 파고든다 그러자 나른한 잠이 쏟아진다...이제 비로소 안전하다는 생각이 마치 자장가처럼 그녀를 잠의 늪으로 끌고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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