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결혼해"라고 전화너머에서 미경이 이야기한다. 언제 해도 할 재혼이라 여겼지만 경수는 전처인 그녀로부터 직접 들으니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이혼한 지 1년도 안돼서 하는 재혼이다 보니, '혹시 결혼생활 중에?"라는 의혹도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이제와서 설령 그렇다해서 달라지는건 없다.
그는 쿨하게 축하해주기로 한다.
"근데, 누리좀 당신이 맡으면 안돼?"라고 경미는 작심하고 말한다.
재혼을 하게 되었으니 아이를 데려가라는 뜻이다. 갈라설때는 양육권을 갖고 그리도 집요하게 늘어지고 합의한 양육비 이상을 매번 요구하더니 이제는 아이를 데려가라는 그녀가 야비하기만 하다.
"재혼상대가 애를 거추장스러워하나?"
"딱히 뭐...근데, 그쪽도 애가 있어서..그 애, 전처한테 주고 오라고 했거든"
요는, 둘다 아이들은 떼놓고 합치기로 했다는 것이다.
서로 좋아서 아이를 낳을때는 언제고 이제와서는 버리지 못해 안달난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수는 씁쓸함을 너머 욕지기가 나는걸 간신히 참느다.
"이번 주말 어때? 내가 누리한테 얘기해놀게"라며 미경은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하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대학 선배의 소개로 만나 그나름 뜨겁게 연애기간을 거쳐 혼전임신까지 해서 결혼했다면 갈라서지 않는게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5년의 시간은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사그라들게 만들었고 가끔은 서로를 무시하고 냉대하게 만들었으며 나중에는 서로 밥 먹는 모습까지 보기 싫어져서 둘은 이혼에 '합의'했다. 그리고 아이 누리는 미경이 맡기로 했다.
그렇게 1년이 채 안돼 그녀는 다른 남자에게 간다고 아이를 데려가라고 한다. 뭐가 그리 급해서 ...씨발, 경수는 욕이 튀어나온다.
회사근처 국밥집에서 미경의 전화를 받은 경수는 밥이 체하는 느낌이다. 식당을 나와 그는 곧바로 약국으로, 그리고는 텅빈 사무실로 온다. 오늘 미경의 재혼통보만 충격이 아니었다. 그날 아침, 현주는 출근하자마자 이달까지만 다니겠노라 사퇴의사를 밝혔다. 이유는 결혼이라고 했다. 요즘은 다들 맞벌이 못해서 안달이어서 경수는 그런 그녀가 이해가 안되었지만 마흔이 다된 여자가 내린 결정을 뭐라 할수도 없어 축하한다는 얘기만 하고 곧바로 구인 광고를 냈다. 아직 구직자는 하나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경수가 이 회사를 차린건 아들 누리가 세살을 막 넘기고였다. 아이는 제법 '아빠'를 우렁차게 발화하였고 그런 아이를 생각한다면 언제까지나 쥐꼬리만한 월급장이로 살수는 없다는 생각에 자기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온라인으로 소가구, 생활용품을 수입해 파는 일이었고 거의가 중국에서 들여왔다. 그러다보니 중국어 능통자가 필요했고 그래서 '중국어관련 전문자 우대'라는 구인광고를 내서 현주를 채용하게 되었다.
현주는 대학 졸업후 줄곧 학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쳤다고 했고 딱히 회사 경력이 없었다. 그래도 경수는 그녀의 언어능력만 보고 뽑았다. 그렇게 그녀는 거의 3년을 그와 한솥밥을 먹었는데 이제 시집을 가겠단다, 동시에 회사를 나가겠노라 한다.
축의금은 한 30이면 될까...경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사무실 문이 살짝 열린다. 퇴근한줄 알았던 현주가 고개를 살짝 들이민다. 그녀의 한손에는 묵직한게 담겨있는 비닐봉지가 들려있다.
"다시 생각해보면 안돼요? 그동안 정도 많이 들었는데"라며 경수가 그녀를 뒤늦게 붙잡는 시늉을 한다. 그러자 그녀는 사온 족발을 한점 집어주며 "저때문에 갑갑하셨죠? 말도 잘 못알아듣고 눈치도 없고"하면서 그녀가 미안해하는 기색이다.
하기사 20대 어린 여자였으면 '보는 즐거움'이라도 있었겠지만 나이 마흔이 다된 노처녀다 보니 솔직히 사무실에 들어서면 우중충한 느낌이 드는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기에게는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었기에 경수는 현주를 놓고 이상야릇한 상상은 하지 않으려고 그나름 노력하였다. 그러다보니 든든한 우애나 신뢰, 우정같은게 둘 사이에 싹이 텄는데, 이제는 아내도 가버리고 현주도 간다고 한다. 그생각에 그는 주책맞게도 눈물이 질끔 나온다.
"어머 사장님 , 우세요?"라며 현주가 안그래도 큰눈을 동그랗게 치켜뜬다.
"아니..뭐가 들어가서.."라며 경수는 슬쩍 눈물을 훔쳐낸다. 그리고는 현주가 사온 소주를 종이컵에 붓다가 묻는다. "현주씨도 한잔 할래?"그말에 현주는 주저하더니 또다른 종이컵을 내밀며 "주세요"라며 생긋 웃는다.
그러고보니 5년동안 한번도 이런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슬며시 그를 스치고 간다. 해서 그는 꾺꾹 눌러 그녀의 종이잔에 술을 붓는다.
"신랑은 좋겠네...이렇게 능력있는 와이프를 데리고 살아서"
"어머? 요즘 그런 표현 안되는데? 같이 사는거지, 뭔, 데리고 살아?"라며 그녀가 살짝 눈을 흘긴다.
이상하다 . 오늘따라 송현주 저 여자가 나를 자극한다,라고 그가 생각한다. 지금보니 나이는 비록 들었지만 젊었을적엔 꽤나 예뻤을 얼굴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수는 그녀의 손을 한번만, 딱 한번만 잡고 싶다.하지만 맨정신에 어떻게 그러랴....
둘이 어떻게 근처 모텔까지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먼저 잠을 깬 경수 옆에는 알몸의 현주가 누워잇다. 혹시나 자기가 술김에? 하는 생각에 그가 이불을 들춰보자 자신도 알몸이었다. 그렇다면...
그때 현주가 눈을 뜬다. 그러더니 그녀는 당황해하면서 주섬주섬 자기 옷을 주워입다가 중심을 잃고 방바닥에 나동그라진다. 그런 그녀를 경수가 일으키려 하자, 그녀가 매섭게 그 손을 뿌리친다. 그리고는 한참을 노려보더니 다급히 모텔방을 빠져나간다.
이 관계도 내가 망쳐버렸구나..하는 생각이 들자 그는 명치가 저릿해온다.
혹시나 현주가 있을까, 기대하는 마음에 사무실로 돌아왔지만 현주의 책상은 그새 말끔히 치워졌다. 술이, 아니 자신의 부주의가 모든걸 망쳤다는 생각에 그는 사과를 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녀가 받지 않을거 같아 그녀의 연락처에 주던 시선을 거두며 밖을 본다. 그러자 청명한 한겨울의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그는 결심한듯 전처 미경에게 전화를 건다.
"누리, 지금 데리러 간다"
그말에 미경은 살짝 당황한 눈치다.
"주말에 오라니까?"
"내가 니 종이야? 시키는 대로 하게?"라고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저쪽은 놀랐는지 아무말도 없다...
아이와의 관계만은 제대로 정립하고 지켜가기로 그는 마음먹는다. 그리고는 채근당하지 않기 위해 현주의 그달치 월급을 이체하고 사정이 있어 결혼식에는 못갈거 같다는 문자를 보낸다. 그리고는 곰곰 생각하다가 돈 10을 축의금으로 이체한다. 축의금 30은 역시 과했다는 생각이 든다...뭐든지 오버하면 깨지는게 세상사라는걸 그는 다시한번 절감한다.
그리고는 그가 컴퓨터를 켜자 중국 거래처에서 담당자 양의 메일이 와있다.양, 그의 서툰 영어가 너무도 정겹다. 생은 오묘하다. 들고남이 어쩌면 이리도 정확할까. 빈자리는 다른게 와서 채워준다ㆍㆍㆍ
그러다 그도 서툰 영어로 양의 메일에 답을 하다보니 가슴이 따스해진다...
내일 누리를 데려와서는 실패없는 생을 살리라, 그는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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