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분명 그라는 확신이 든다. 영주는 인파를 헤치고 그에게 달려가 그의 팔을 붙든다.
"혹시 예전에 로마에서"라고 묻자 그, 황기수가 긴장하는 눈치다. 그러더니 "예 로마에서"라고 답을 하였다.
순간 영주의 얼굴이 환하게 빛이 난다.
"그때 친구랑 갔었는데...<바위>호텔에 묵었던"이라고 하자 그가 기억을 더듬는 시늉을 하더니 "아, 대학졸업여행차 왔다던"하며 그녀를 알아본다
"그때 같이 왔던 친구분 성함이"
"은희요. 장은희. 저는 이영주"
"맞아요 맞아요"라며 그가 무척이나 반기는 기색이다. 둘은 어디가서 차라도 마시자면 인근 가까운 까페로 향한다.
"로마생활 접고 여기 와서 작게 여행사 차려서 지금까지..."라며 그간의 삶을 간략히 요약해준다.
"그때 제가 귀국해서 메일 드렸었는데"라고 영주가 말하자 "아네...답장을 몇번이나 썼는데...그때 가이드와 손님은 일 외의 관계는 맺어서는 안된다는 조항이 있어서.."라며 그가 머쓱해한다.
"그랬군요.."라며 영주는 로마에서 사흘간의 시간과 로마를 떠나올때의 아쉬움을 곱씹는다.
"지금도 <바위 호텔>이 있는지 궁금해요"라고 그녀가 말하자 "아직 있어요"라며 그가 싱긋 웃는다.
그리고는 "언제 한번 그때 왔던 친구분이랑 같이 식사 한번 해요"라고 한다.
그렇게 기수와 헤어져 곧바로 방송국으로 간 그녀는 작가실에서도 내내 그의 생각뿐이다. 친구 은희와 거의 충동적으로 결정한 유럽투어였고 처음엔 프랑스나 영국에 대한 로망이 컸었다. 그런데 파리나 런던을 가득 메운 여행객에 질려 그만 돌아갈까 할 즈음 로마에 닿았고 거기서 가이드 기수를 만났다. 그는 한국에서 대학을 휴학하고 잠시 아르바이트 삼아 이곳에 와있다고 했고 그녀들보다 한두살 위쯤으로 보이는 젊은 가이드였다. 그는 짧은 기간임에도 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고 바티칸을 돌아볼때는 '소매치기가 많으니 배낭은 앞으로 매라'는 조언까지 해주었다.
그렇게 돌아본 로마...
옛 제국주의 잔재들이 산재해있어 씁쓸한 느낌을 주면서도 로마는 유럽 다른 도시와는 확연히 다른 위엄과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던 테베강과 줄지어 늘어서 올리브나무들, 그리고 사흘내내 맑았던 하늘까지...
자유투어 시간에 영주네는 기수를 붙들고 로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시시콜콜한 그의 개인사까지..그는 졸업후 '작은 여행사'를 차리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는 10년후 한국에서 재회한 그는 정말 그때의 바람대로 여행사 오너가 돼있었다.
라디오녹화를 마치고 귀가한 영주가 은희에게 전화를 걸어 낮에 길에서 그를 보았노라 얘기를 한다. 그러자 은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우리 기억하디?'라며 물어온다.
"응"이라고 영주가 자신있게 대답하면서 "언제 셋이 저녁먹자고 했어"라는 말까지 덧붙인다. 그리고는 그가 지금은 여행사 오너라는 말도 한다...
로마를 거쳐 피렌체, 베네치아까지 다 둘러보았지만 단연코 제1은 로마였다고 그녀는 귀국후에도 당당히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였다. 그만큼 그녀에게 로마는 꿈의 도시, 그야말로 '영원의 도시'였던 것이다..
은희와 전화를 끊는 동시에 띵동 문자 알람이 울린다. 기수였다.
영주의 가슴이 콩닥거린다..반가웠다고.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그 사람 여전히 똑같아"라는 영주의 말에 은희는 이제 돌쟁이 딸을 얼르며"뭐가 똑같아 우리가 늙어버렸는데"라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영주는 아이의 볼을 토닥여준다. 그러자 아이는 까르르 웃는다.
"너도 빨리 시집가 "라며 은희가 '남편 그늘' 운운하며 영주를 부추긴다.
"그럴까?"라고 답하는 영주의 상상은 어느새 기수와 나란히 팔짱을 끼고 결혼행진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로 치닫는다.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진다...
"오늘 저녁 시간되세요?"라는 기수의 문자를 받은건 그로부터 1주일 후였다. 연휴가 껴서 사흘치 원고를 정신없이 써대던 영주는 시간이 나지 않음에도 "물론이죠"라고 답을 했다. 그리고는 그야말로 눈썹이 휘날리듯 원고를 마무리했다. 시간이 없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그를 다시 볼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의 가슴은 널을 뛴다.
"내가 거길 왜 나가? 너나 나가서 잘해"라며 은희가 전화너머에서 영주 혼자 기수를 만나라고 한다.
"뭘 잘해. 그냥 저녁 먹는건데"라고 영주가 말하자 "기집애. 니가 그 남자 좋아한거 내가 몰라?"라며 그녀가 웃는다.
영주는 시간이 없어 다급히 화장을 하고 옷장에서 플란넬 원피스를 꺼낸다. 큼직한 플라워문양이 눈에 띈다. 그러고보니 긴긴 겨울이 다 갔다.
그녀는 이어링을 하고 그 원피스를 입고 뒷지퍼를 올리려는데 손이 올라가질 않는다. 그러자 기수가 뒤에서 옷지퍼를 올려주는게 상상된다 .결혼해야지...청혼하리라 마음먹는다.
귀국해서도 내내 그의 생각에 밤잠을 설치던 때가 스쳐간다. 그리고는 마침 집앞에 서있던 빈택시를 집어타고 그와 약속한 대학로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봄이네요 옷을 보니"라며 먼저 와있던 그가 활짝 웃으며 그녀를 맞는다.
봄이라는 소리에 나른해진 그녀가 역시 나른하게 자리에 살포시 앉자 그가 로마에서의 그 다정하고 따스했던 눈길을 보낸다. 순간, 그녀의 시선이 그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로 향한다. 아차...10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면 이 사람의 신상에 변화가 있을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구나...사랑이란게 이토록 무모한 것이구나,하면서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간파했는지 기수가 "돌아가신 엄마가 주신 반지예요"라고 설명해준다. 그소리에 "아"하며 영주는 마음을 놓는다. 그렇다면 아직 싱글이라는 얘기리라...
기수는 배가 고팠는지 금세 자기 몫의 음식을 먹어치운다. 괜찮으시면 ,이라며 영주가 슬쩍 그에게 자기 음식을 덜어준다. 그걸 마다않고 기수는 잘도 먹어댄다...얘기해야지 그리웠다고...
"은희씨는 잘 지내죠?"
그말에 영주는 "그럼요. 애도 있고 잘 살아요 . 남편, 변호사"라며 괜히 으스대기까지 한다.
"그렇군요"라며 기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실은"이라며 무언가 말을 하려던 그가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그리고는 디저트로 커피와 티라미수케익이 나올때까지도 침묵한다...뭘까?
디저트 커피를 반쯤 마신뒤에야 그는 주머니에서 뒤적뒤적 보석케이스를 꺼내 영주에게 내민다. 뭐죠? 하며 영주가 그 상자를 열어본다. 그 안에는 'roma'라고 각인된 반지 하나가 들어있다.
"고마워요"
"좋아할거 같아서"라고 말한다.
"그럼요"라며 그녀가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우려는데
"잘 산다니 다행이군요"
"그럼요 잘 "하는데 영주는 뭔가 뒤틀린 느낌을 받는다.
"은희씨한테 여러번 메일을 보냈는데.."라는 말에 영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자기는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가이드는 손님하고 일 외에는"
"규정은 그랬는데 너무나 보고싶어서..."라며 그가 말끝을 흐린다.
"다시 보면 꼭 주고 싶어서 여태 갖고 있었어요"라며 그가 조금전 영주에게 건넨 반지를 바라본다. 순간 영주는 그동안 먹은게 한꺼번에 체하는 느낌이다.
기수가 한사코 자기 차로 집까지 바래다 준다는걸 영주는 기어코 사양을 하고 빈택시를 잡아 탄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 알수가 없다....그러고 있자 기사가 물어온다. "아줌마, 어디로 가요?"라고.
아줌마,라는 호칭에 그녀가 움찔한다. 내가 그렇게 보이나? 한껏 멋을 부리고 나왔는데...
"마포 가주세요"라고 하자 그제서야 기사는 차를 출발시킨다..
그렇게 도착한 은희의 아파트앞에서 영주는 전화를 건다. 올라오지 뭔 전화?라며 은희가 여리여리한 베이지색 카디건을 걸치고 건물안에서 나온다.
"들어가자"라며 은희가 영주의 팔을 잡아 끈다.
"아니...줄게 있어서"라며 영주는 기수가 준 반지케이스를 건넨다.
"이게 뭐야?"하고 그걸 열어본 은희의 얼굴이 금세 굳어진다. "나한테 주라든?"
"아니...우리 둘 다한데...영원의 도시잖아 로마는. 사랑의 도시고.."라고 말하고 돌아서는 영주의 두눈에 눈물이 핑그르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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