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경은 아무리 웹을 둘러보아도 신경정신과라는 이름의 의원들 대부분이 '정신'쪽에 치우쳐있고 상담없이 약만 주지 않는다는걸 알고는 몇날 며칠을 고민한다. 자신의 속을 털어놓기가 죽기만큼 싫은 것도 있지만 , 그 정신과약이란게 일종의 허가받은 마약이라는데 끊을수는 있는건가,하고...
그녀는 정말 약만 타기를 원했고 그렇게 들어선 <의현 신경정신과>는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없었다.포털에 올려진 후기로는 대기시간만 2,3시간이라던데..하면서 그녀가 현관에서 우물거리는데 접수간호사가 다가온다.
"어떻게 오셨어요?"
"저..약좀 타러 왔는데요"
"아, 초진이세요?"라며 간호사는 문진표를 내민다.
이런게 정말 싫지만 일단 한달치만이라도 약이 시급해서 현경은 문진표에 열심히 체크를 해나간다. 어떤 문항은 보지도 않고 가운뎃 번호에 v자를 그린다 .
"근데 사람이 원래 없나요?"현경이 불쑥 던진 질문에 간호사는 여태 밀렸다가 이제 겨우 시간이 났다고 답한다. 현경은 문진표 작성한걸 간호사에게 내밀자 간호사는 벌써?라는 표정을 짓더니 잠시만요, 하더니 진료실로 들어간다.
의현은 많아봐야 30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의사였다. 현경은 포털에서 이미 원장이 젊다는 글을 보았고 그래서 또 온것이다. 젊으면 그래도 말이 통하지 싶었달까.
"잠을 못 주무신다고요?"
"네..근데 약국에서 주는 약은, "
"수면제 마구 사서 드심 안돼요. 일단 상담하시고, 수면장애 원인을"
"선생님, 죄송한데 약만 주세요. 저, 얘기하기 정말 싫거든요"라고 하자 의현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런분들이 간혹 계신데 그러면 저희 걸립니다"라고 그가 단호하게 거절의 뜻을 밝히고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라고 한다. 그의 결연한 표정에 현경은 풀이 죽어 '그'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3년 사귄 남자가 있고 1년은 동거를 했는데 알고보니 그동안 따로 만나온 여자가 있다는 걸 알고는 헤어졌다. 그런데 둘이 같이 붓던 적금통장을 자신의 동의도 없이 깨서는 혼자 다 갖고 가버렸다....
그런말을 하는 현경의 얼굴이 화끈 달라오른다. 그러자 의현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라며 상담종료를 알린다.
현경은 한달치 약을 달라고 애원하였지만 의현은 2주치만 원내처방으로 내주었다. 다시는 안온다는 마음으로 현경이 병원을 나서는데 오랜만에 눈발이 날린다...떠나간 동석이 그립다..자기 돈을 모조리 갖고 도망치듯 집을 나간 그가...그러다가 그녀는 눈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에 한두정거장 걷기로 한다. 그도 그럴까? 나처럼 잠을 못자는건 아닐까, 하다가 그럴리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양다리였다고 해도 현경에게 마음이 더 많았다면 결코 나가지 않았으리라는 결론에 이른다. 잠이나 자자...
그날밤 현경은 의사 의현이 처방한 약을 입에 털어넣는다. 정신과약을 먹어본 적이 없는터라 그냥 후기만 본 그녀는 '온몸이 나른해진다' '의식이 흐려진다'등의 글에 겁을 먹고 있었지만 처음 한시간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다 그녀는 어느새 잠이 쏟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침대속으로 파고든다...
그때였다. 꿈결엔가 전화벨이 울린다.
"저..낮에 뵀던 이의현입니다. 정신과"
"아..선생님"
"혹시. 잠 안온다고 많이 드심 안됩니다. 처방대로 드시라고요"
환자가 자기만 있는것도 아닐텐데 그래도 신경을 써준 그가 고마우면서도 그녀는 부담스러웠다.
"네 알겠습니다"하고 그녀는 먼저 전화를 끊고 잠속으로 떨어진다.
그녀는 자는 동안 많은 꿈을 꾼거 같다. 대부분이 동석과 함께 한 날들이 뒤엉켜 이뤄낸 몽상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눈을 뜨는 동시에 그것들은 아주 희미한 흔적만 남기고 대부분은 증발해버렸다.
"잠은 좀 주무셨나요?"
2주후 병원을 찾은 그녀에게 의현이 걱정스레 물어온다.
"가끔은 못자요. 그래도 대부분은.."
"그러다 잘 자게 됩니다....헤어졌다는 그 남자분은 이후"
지난번 괜히 동석의 이야기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래서 정신과를 오기가 싫었던건데...그래도 대답은 해야 해서 그녀는 말한다.
"잘 생각 안나요 이제는"이라고.
"2주만에요?"라며 의현이 의심스럽다는듯이 되묻는다.
정신과약을 오래 먹으면 끊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어 현경은 자의로 약을 끊어보기로 하고 새로 타온 2주치 약은 비상약으로 두기로 한다. 그날범 그녀는 약을 복용하지 않은채 자려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고 피로감만 쌓여간다...그러다 간신히 빠져든 가수면 상태에서 그는 동석과 함께였다. 그가 '널 사랑해'라고 말하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다'고.
그녀가 그런 그의 손을 잡는데 눈이 떠진다. 잔게 아니다...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에 메슥거린다. 어지럽기까지 하다. 이미 지난 2주간 먹은 약이 뇌를 새로 세팅해버린것만 같다. 이제는 약을 먹어야만 잠을 잘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했다. 그녀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서랍에서 약을 다시 꺼내 한봉 털어놓고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걔랑 헤어졌어...우리 합치자. 혼인신고도 하고"라며 동석이 애원하듯 말한다.
의현이 준 약을 먹고 그녀가 깊은 잠에 빠져있을때 초인종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도어스코프 너머엔 그녀가 사주었던 패딩을 입고 입김을 내뿜고 서있는 동석이 보였다. 해서 그녀는 '나가서 얘기하자'며 그를 데리고
공터로 향했다. 둘은 한겨울 추위에 벌벌 떨며 나란히 섰다.
"왜? 내가 재활용 쓰레기라도 돼?"
그녀가 발끈하자 동석이 심각한 얼굴이 된다.그러더니 "그동안 누가 생긴거야?"라고 묻는다.
"응...의사야"라는 그녀의 대답에 동석이 믿지 않는 눈치다.
"난 왜 의사 만나지 말란 법 있어? "라고 그녀가 쏘아붙인다. 정신과의사,라며 그녀는 의현을 떠올린다. 자기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이말이 어이없지만 그렇다고 이 상태로 동석을 받아들일수도 없었다. 그러고는 담배를 입에 무는 그를 놔두고 공터를 빠져나오는데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렇게 2주후에 다시 찾은 병원은 대기 환자로 북적이고 있다. 이미 몇번 봤다고 간호사가 아는체를 하며 생긋 웃어준다.
"얼마나 기다려야 돼요?"라는 현경의 질문에 "한시간 반? 두시간?"이라고 그녀가 어림잡아 대답을 한다. 그말에 지겨워진 현경이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의현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강현경씨!
지금쯤 대기실에서는 대기환자들이 쑥덕거릴것이다. 순서를 무시하고 진료를 본다고...
그러나 의현은 그런것따위는 상관없다는 얼굴이다.
"이제 좀 자나요?"
"약 없으면 못자요. 정신과 약이 다 이런가요?"
"차차 줄여가죠 그럼..."이라며 의현은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약을 조정하는 눈치다...그러다 툭 내뱉듯 말을 한다.
"오늘 저녁 시간되시면"
"네?"
"저녁, 같이 할래요? 할 얘기도 있고..."라며 그가 잔뜩 긴장해서 묻는다.
"무슨..."하는데 현경의 명치끝이 아려오는 느낌이다..오래전 동석을 처음보았을때 느껴본 통증이다...
"제가 잘 아는 파스타집 있는데..그런거 좋아해요?"라는 동석의 말이 비현실적으로 들려온다. 그의 제안에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도 못한채 진료실을 나온 그녀는 처방전을 받아야 한다는것도 잊어버리고 유리문을 밀고 나오는데 뒤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는 간호사의 다급한 소리가 들려온다.
"강현경씨 들어가세요"
그소리에 현경은 눈을 비빈다. 모든게 낯설다. 회색 실크벽지며 길다란 대기의자들, 그리고 낯선 많은 얼굴들이...그들이 일제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여기가 어디지? 그녀는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뛰쳐나온다. 그렇게 건물 밖으로 나오자 동석이 추위에 웅크린채 서성이고 있다.
어? 하고 현경이 그를 보고 놀라하자,
"진료 끝났어? 금방 나온다더니.."라며 그가 어서 가자며 그녀의 팔을 끈다.
현경은 아무 기억도 안난다. 그녀의 기억은 지난번 공터에 동석을 혼자 남겨두고 돌아오던 것에서 끊겨있다 .이후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떻게 그 이후를 살아냈는지, 어떻게 견뎌냈는지...
"하나 물어봐도 돼?"
그말에 동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자기, 돌아온거야 나한테?"
그말에 동석은 대답대신 그녀를 자기쪽으로 밀착시킨다.
"지금 눈 오는거 맞지?"라며 그녀는 자기 손을 내밀어 내리는 눈을 맞는 시늉을 한다. 그러자, 동석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 겨울끝난게 언젠데.."하는데 하필 그때 띠디디 하면서 신호가 바뀐다. 둘은 어색한 거리를 유지한채 그자리에 멈춘다. 현경은 빨간불을 적의에 가득차 노려본다. 그런 그녀가 동석은 무서워진다.
그리고는 다음순간 , 달려오는 검은색 승용차와 현경이 부딪치고 그녀가 허공으로 붕 뜬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일제히 들려온다.
"저때문에...저때문에 그렇게 갔어요. 착한 여자였는데"라며 동석이 의현앞에서 눈물을 보인다.
"혹시 그분 성함이.."
"현경이요. 강현경"
동석의 대답에 의현의 키보드 두드리던 손이 멈칫한다. 얼마전 지독한 불면증을 호소하던 한 여자, 자살충동에 망상장애까지 있던 여자. 그래서 걱정끝에 자신이 전화까지 했던 그녀가 갔다는 소리에 그의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녀에게 미안한가요?"의현이 떨리는 음성으로 묻는다.
"통 잠을 잘수가 없어요....자면 올거 같아서, 꿈에 볼거 같아서 왔어요..자게 해주세요 선생님..."
동석은 한달치 약을 원했지만 의현은 2주간의 약만 원내처방으로 내주었다. 그 약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동석은 예전에 현경과 둘이 살던 그 집까지 걷기로 한다.
가다가 시장에 들러 해산물을 좀 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루종일 공장에서 힘들게 일한 그녀가 좋아하게 맛깔난 저녁상을 차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