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남자

by 박순영

동수는 지난밤도 외박을 하고 안들어왔다. 이번달 들어서만도 벌써 두번째다. 은진은 더 참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이 관계를 정리하기고 마음 먹는다. 어릴때 부친의 계속되는 외도로 결국 마음의 병을 얻어 세상을 등진 모친을 둔 은진이기에 남자의 '바람'에는 진저리를 내는 터고 그 '끝'을 알기에 더 끌 필요가 없다 생각돼 짧게 식탁위에 메모를 남기고 둘의 오피스텔을 나온다.


겨울바람이 매섭다. 한 열흘 봄날같은 따스함이 계속 되더니 다시 혹한이 왔다. 이래야 겨울이지..하면서 그녀는 끌고 나온 캐리어를 차 트렁크에 싣고 시동을 건다. 그런데...어디로 가나...


h가 운영한다는 작은 주점이 아마 이 근처 어디려니 그녀는 짐작한다. 이따금 서평이며 영화평, 그밖의 다양한 칼럼을 쓰는 그의 블로그에 자주 언급되는 그곳이 여기 어디리라 하고 그녀는 차를 외진 골목에 주차하고 걸어보기로 한다. 동네는 서울의 70년대 흑백사진을 연상시키는 레트로한 감성을 자아낸다. 여긴 아직 재개발의 바람이 불지 않았나보다,하고는 그의 주점을 무작정 찾아나선다. <골목길>이라는 상호를 찾느라 그녀는 겨울 냉기속을 배회한다. 물어볼 이도 없다...

그렇게 주점이 있음직한 골목 서너곳을 뒤지다 결국 <골목길>을 찾아낸다. 그러자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와서 뭘 어쩌자는 건지 알수가 없다....

그의 블로그에 댓글 몇번 달고 답글을 받은게 다인데...그로부터 읽을만한 책과 영화를 몇번 추천받은게 단데..이렇게 와서 뭘 하려 했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다.

그녀는 일단 주점의 위치를 알아낸것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차로 돌아간다..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오는데 로비에서 동수가 서성이고 있는게 보인다.

"니 짐 다 뺐드라?" 그가 볼멘소리를 하지만 은진은 그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그대로 지나쳐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다.

해외 에이전시에서 온 팩스를 들여다보는데 사무실문이 열리며 동수가 들어선다.

"여기 사무실이야. 나가서 얘기해"라며 그녀가 먼저 앞장을 선다.


"우리 결혼하자"라는 동수의 말에 그녀는 헛웃음만 나온다.

"결혼? 외박하고 들어와서 하는 말이 결혼?"

"이상하게 들리겠지만...니가 생각하는 그런거 아냐..그리고 난 너랑 못 헤어져"라며 그가 입을 꼭 다문다.

"미쳤구나 아주..나, 안그래도 원룸 봐둔거 있어서 그거 계약할거야"

"그러지 말고 결혼하자. 나 의심하지 마"하고 그는 준비해온 반지를 내민다.

"돌았어. 미친 자식"하고 그녀는 까페를 서둘러 나온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주점 <골목길>은 영업을 안하는지 불이 꺼져있다. 눈을 헤치고 이곳까지 달려오는 동안 은진은 '내가 뭘 하는 건가'했지만 결국에는 오게 되었다. 그렇게 불꺼진 주점을 한시간 이상을 멍하니 쳐다보다 그녀는 다시 차를 돌려 그 동네를 빠져나온다.

그리고는 그날밤, 그의 블로그에 들어가자 그가 새로 공지를 올려놓은게 보인다. 한동안 휴지기를 가져야 할거 같다고 .무슨 일일까...

그리고는 사무실 소파에서 그녀는 불편한 잠을 청한다. 꺼떡하면 동수가 들이닥쳐 눕곤 하던 그 소파....딱딱한 쿠션감이 그녀를 자꾸만 잠에서 깨게 한다. 아무래도 소파를 바꿔야겠다...



다음날 동수는 또 사무실로 왔다.

해외 에이전시에서 계약을 체결하겠다는 답장이 와서 분주하게 답문을 작성하던 무렵이었다.

"나 지금 바빠. 번역 섭외도 해야되고."라며 그녀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동수를 외면한채 말했다.

은진이 1인출판을 시작한 지도 벌써 5년째다. 처음엔 소소하게 전자책으로 시작해서 이젠 제법 돈이 되는 종이책까지 발간하게 되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손해를 감수해야했다. 폐업신고를 하면 다 정리되는 것이었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미진한 무엇인가 남아있다는 생각, 동수의 글을 자신의 출판사에서 내고 싶은 마음, 그런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계속 일을 끌어왔다. 그러다 이번에 에이전시를 통해 해외작가 j의 책을 계약하게 된것이다.

"천천히 해. 나 잠좀 잘테니까.."라며 동수가 사무실 그 소파에 눕더니 이내 코를 곤다.



그렇게 자는 동수를 놔두고 그녀는 퇴근을 한다. 불도 끄지 않고 사무실을 나오자 지나가던 관리인이 '불 안 껐어요'라고 알려준다. "안에 사람 있어요"라고 대답하고 그녀는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그러자 또 <골목길>이 떠오른다. 폐업한게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리고 갑자기 블로그를 그만 둔 h가 마음에 걸려 아무래도 한번은 그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는 그녀는 차를 몰아 다시 그 동네로 향한다. 퇴근길이어서 차는 한참을 지체해서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리고는 이제는 익숙해진 그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골목길>은 여전히 불이 꺼져있는 상태다. 분명 무슨 일인가 있다 싶어 차를 돌리는데 흰색 suv가 마주 오는게 보인다. 겨우 차 두대가 지나갈 만한 좁은 길목이어서 그녀가 차를 벽에 바싹 갖다대는데 suv가 그녀이 차 옆에 와서 멈춘다. 눈에 익은 번호판이다...

동수의 차였다. 어쩐지...낚시를 좋아하는 그라서 낚싯밥이며 낚시장비를 넣겠다고 중고차에 루프박스까지 얹던 그날이 떠오른다..



"너 왜 여깄어?"

동수가 먼저 물어온다.

"그러는 자긴?"

"나...가게문 열러 왔지. 니가 심통 부려서 며칠 문 닫았거든"

그말에 은진은 헉, 숨이 멎는것만 같다.

그럼 <골목길>이 자기 가게?라는 그녀의 표정에 "우리 둘 다 글쟁이잖아. 그걸로 밥 먹고 살기 힘들잖아. 니 출판 수입이야 뻔한거고..그래서 결혼하면 이걸로 살아야겠다 생각하고..."라는 그의 말이 그녀를 울게 만든다.

"그럼 외박한것도 "

"술손님들 밤 새잖아 ..."하고 그가 울먹이는 은진을 가만히 안아온다.

"들어가서 저녁먹자. 금방 해줄게"라며 그가 <골목길>의 도어락 비번을 누른다. 그러자 문은 스르르 슬라이딩되면서 열린다.


"휴지기를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돌아왔습니다"라는 그의 블로그 공지에 은진은 댓글을 달고 싶은걸 꾹 참는다. 내가 그녀라고. 당신글에 댓글 다는 여자가 나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비밀로 하기로 한다. 동수는 탕웨이의 영화 <시절인연>의 영화리뷰를 올려놓았다. 조금있으면 동수가 가게 문을 닫고 올 시간이어서 그녀는 부지런을 떨기로 한다. 그가 좋아해서 사온 해산물로 탕을 끓이기로 한다. 그리고는 ott창을 열어 <시절인연>을 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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