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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Jan 06. 2023

영화리뷰 , 에릭로메르 <수집가 >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의 선택에 실패


  

오래전, 홀로 휴가를 떠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 아련하고 촘촘한 내러티브의 영화 <녹색광선>을 본적이 있고 그 영화의 잔상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느 평자의 말을 빌려면 ‘자성적 아름다움’이 돋보인 이 영화를 감독한 사람이 누굴까, 하다 그가 바로 프랑스 ‘누벨바그’영화의 한 기수였던 에릭 로메르라는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영화에 조금만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누벨바그’라는 용어를 자주 접했으리라 본다. 이것은 1950년대 후반, 기존의 프랑스 영화를 비롯한 기존 영화들의 전반적 전통에 반기를 들어 영화의 상업성과 작가주의를 결합하려는 시도로 요약될수 있고 에릭로메르가 바로 이런 트렌드의 한축을 담당했다고 볼수  있다.  

        

소설가이기도 한 에릭로메르는 <여섯개의 도덕이야기>라는 남녀간의 애정을 변주한 연작집을 출간했고 <수집가>는 그 속에 포함돼있고, 영화 <수집가 la collectionneuse, 1967>는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에릭로메르가 감독한 영화다.


이미 애인이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결국은 원래 여자에게로 돌아가는 과정과 심리를 차분하고 가벼운터치로  풀어낸 이야기며 인간의 내면과 인간의 생존법에 대한 언급이 가미된다.     

      

흔히 ‘모랄리스트’라 불리는 로메르는 이런 과정속에서 남자가 어느 여자를 택했는지의 정당성보다는, 이 과정속의 남자의 생각의 변화, 심리상태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그럼으로서 일상의 사소한 일들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무관심하다는게 같이 살수 없는 이유는 아니다’라는 극중 여주인공 아이데의  대사에서 느낄수 있는것처럼 삶이든, 남녀간의 애정이든, 인간 행위의 일체는 서로간의   간극을 안고 있음을 보여주며, 인간의 3/4은 기생하고 쓸모없는 일에 종사한다는 남자주인공 아드리앙의 말은 삶의 공허, 생존의 비열함을 동시에 지적하는 대목이라 할수 있다.    

      



영화<수집가>의 스토리는 대강, 애인이 사진일로 런던으로 떠난 아드리앙이 지인의 집에 초대받아 일어난 일을 묘사하고, 친구 다니엘, 그리고 어리면서 거의 매일 남자를 바꿔 자는 ‘수집가’ 아이데와의 한달여의 생활을 묘사한다. 그러다 후반에 다니엘이 그곳을 떠나고 골동품 수집가인 샘이 등장하고 비즈니스를 위해 아이데를 샘의 집에 데리고 가서 샘과 함께 지내게 하면서 아드리앙은 자신의 도덕관 moral에 심각한 회의에 빠진다. 그리고는 아이데가 샘이 금방 아드리앙에게서 사들인 고가의 화병을 깨뜨리면서 이야기는 빠르게 결말로 치닫는다. 아드리앙은 아이데를 샘에게 조공했던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에 염증을 느껴 아이데를그집에서 데리고 나와 비로소 온전한 둘만의 사랑을 꿈꾸지만, 도중에 아이데가 다른 남자들과 히히덕거리며 만날 약속을 잡는걸 보면서 그녀에게 환멸을 느껴 곧바로 그녀를 길위에 버려두고 자기의 숙소로 돌아온다. 그러나 조금전 이루어진 갑작스런 아이데와의 이별에 아픔을 느껴 고통스러워하다 드디어 런던에 있는 애인에게 가기로 마음먹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프랑스어에서 ‘moral(모랄)’이라는 형용사는 ‘도덕적인’이라는 뜻이지만 더 넓게는 물리적인 것과 대립되는, 정신에 관한 것을 뜻한다. 로메르 자신이 책 <도덕이야기>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렇게 이름지은 것은, ‘구체적, 물리적 사건없이 거의 모든일이 화자나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덕이라는 단어를 좀더 광범위하게, 정신의 경험과 상상의 세계를 다룬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즉 로메르 자신의 말처럼  ‘ 사람들의 행동 자체가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면서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관심이 있는 것’을 잘 보여준 영화가 바로 <수집가>라 할수 있다. 즉, ‘특정한 느낌이 분석되고 주인공 자신들 스스로 그 느낌을 분석하는 매우 사유적이고 자성적인 이야기’로 요약될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원작이 된 로메르의 책 <여섯개의 도덕이야기>에 대해선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에릭 로메르는 이중에서 <모드에서의 하룻밤>이 영화로 큰주목을 끌면서 대가로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득 이 영화의 진정한 함의는 이런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영화 <수집가>에서 아드리앙과 그 친구 다니엘은 자신들의 기존의 도덕관념으로 자유분방하고 성적으로 문란한 아이데를 통제,  지배하려는 태도를 보이지만, 그런 행위자체가 아이데처럼 독립적이고 기존 도덕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자신들의 숨은 욕망을 말하는건 아닐까 하는것이고,  이런  인간의 자기모순, 이중성, 도덕의 위선적 측면을 일상적이고 캐주얼하면서 나른하게 지극히 프랑스적으로 그려낸 영화가 이작품이라 본다.

이런 추론의 연장선에서 아드리앙이 런던에 있는 약혼녀에게 돌아가는 것또한 어찌보면 사회가 허용한 내에서의 '안전한 룰'을 택한 결과라 할수 있으며 또한  길거리에서 다른 남자들과 만날 약속을 잡는 아이데의 거리낌없는 행동에 대한 반격인 동시에 자신은 그만큼의 '용기 있는 삶'을 택할수 없음을 반증하는 것으로도 풀이된다.



그야말로 윤리교과서에나 나올법한 '도덕'이라는 용어가 이젠 사어처럼 돼가고 있지만 실은 우리의 1분 1초가 '도덕적인가 아닌가'의 갈등속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도덕에  초점을  맞춘  로메르의  혜안과  용기에    진심어린   찬사를   보낸다.

                                                               

eric rohmer192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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