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가버린 여자

by 박순영

"이번 한번만...응? 한번만 봐주라"

진수가 빌다시피한다. 결혼이 엎어진게 벌써 다섯번째다.

예식이 다가오면 꼭 일이 터지거나 다른 데 돈 쓸일이 생겨서 번번이 미뤄와서 안그래도 해은은 이번에도 영 불안했는데 그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내가 진수씨한테 몇순위야? 자기 동생보다도 밀려? 그럼 나하고 왜 결혼하려고 해?" 라며 그녀는 쏘아붙이다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간다.

뒤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며 따라오는 진수를 남기고 급히 택시에 올라탄다. 그렇게 둘은 멀어져간다.


거래처 직원으로 만나 사귄게 벌써 5년이 다 돼간다. 둘의 연애는 그저그런 보통의 단계를 밟았고 사귄지 6개월만에 진수의 원룸에서 함께 밤을 보냈다. 둘다 가진게 없다면 없는 집안이라 양가 어른들도 그닥 반기지도 않았지만 굳이 반대도 하지 않아 명절이면 서로 왕래를 하면서 지냈다.

그러다 아무래도 딸가진 입장이어선지 해은의 집에서 결혼얘기가 먼저 나왔고 진수네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 날짜를 잡았다. 그런데 결혼을 코앞에 두고 갑자기 진수 부친이 뇌졸증으로 쓰러지면서 결혼은 무기한 연기되었고 이후 세번 더 줄곧 진수쪽 사정으로 결혼이 틀어졌다.

그렇게 되자 해은네서는 '아무래도 연이 아니다'라며 다른 선자리를 들이밀었지만 그래도 해은은 진수를 고집했고 둘만의 언약식도 치렀다. 그렇게 둘은 커플링을 나눠 끼고 언젠가는 꼭 결혼하기로 약속한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또, 결혼이 임박해서 진수의 여동생이 길가던 자전거에 부딪쳐 머리를 다쳤다고 한다. 워낙 돈이 없는 집안이라 진수는 결혼비용으로 모아둔 돈을 동생 병원비에 쓰게 된것이다.


"날 사랑하긴 해?"

그날밤 계속 전화를 걸어오는 진수에게 해은이 울면서 물어본다.

"알잖아. 내년엔 꼭 해 결혼"

그말에 해은은 아무 대답도 않고 전화를 끊는다.


남자는 마흔이 다된 나이치고는 꽤 동안이다. 신혼때 이혼해서 아이도 없고 무엇보다 자기 사업을 해서 경제력이 탄탄한걸 해은의 부모는 반기는 눈치였다. 오히려 한번 갔다와서 여자 귀한걸 알거라며 해은을 등 떠밀어 선자리에 내보냈다.

하지만 이번엔 강권에 의한것만은 아닌것이 해은도 이제 지칠대로 지쳐서 진수를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이 쉽게 굳혀지는건 아니어서 동욱과의 약속도 몇번씩 연기하다 겨우 잡힌 자리였다.

"이런질문 좀 그렇지만, 누구 없으시죠? 워낙 미인이시라.."하며 동욱이 슬쩍 해은의 남자 문제를 물어본다.

"있더라도 정리하면 되는거 아닌가요?"

해은의 대답에 그는 조금은 석연치 않아 하면서도 마음을 굳히는 모양새다.

"결혼합시다. 해 넘기지 말고. 마포에 세 준 아파트 내보낼게요"

동욱의 난데없고 성급한 청혼에 해은은 어이가 없지만, 어쩌면 이런게 인연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해은은 연락하마 하고 동욱과 헤어져 집에 오다 아무래도 진수를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야, 너 반칙하는거야!"

해은이 방금 선을 보고 왔고 결혼할거 같다고 말을 하자 진수가 내뱉은 첫마디가 이랬다.

"자긴 여태 반칙 안했어?"

"그거야..다, 그때그때 사정이.."

하지만 진수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주억거린다.

"니가 지칠만도 하다. 그래도..."라며 그가 애원의 눈빛을 보낸다.

해은의 마음이 흔들린다.

"나좀 피곤해. 담에 얘기해"하고 그녀는 까페를 먼저 나온다. 겨울이 오려는지 으스스한 냉기가 그녀의 몸을 파고든다. 꼭 눈이 올 날씨다..



동욱은 뽑은지 얼마 안된다며 자신의 suv를 애마 다루듯이 한다.

그런 그의 모습이 천진하고 귀엽기도 해서 해은이 빙긋이 웃자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는 얼른 타라고 한다.


그 길이다. 예전 진수와 달렸던 그 바닷길...

저멀리 겨울바람에 너울이 일렁이는게 보인다.

"좋죠 바다 오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동욱이 힐끔 옆의 해은을 보며 물어본다.

해은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바깥만 쳐다본다. 그러자 동욱이 그녀의 한손을 잡아온다. 그의 손이 차다...진수의 따뜻한 손이 그립다. 그녀가 손을 빼려하자 동욱은 더 힘주어 잡는다. 동욱은 눈치채지 못하는거 같지만 그녀의 왼손 약지에는 진수와 나눠 끼었던 커플링의 흔적이 역력하다..

"하루 자고 갑시다"

그가 너무도 천진하게 이야기해 그녀는 오히려 거절할수가 없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은뒤 동욱은 어서 룸으로 갔으면 하는 눈치다.

해은도 아예 오늘 이남자와 자버리고 진수를 싹 다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결혼해버리면 더이상 골머릴 앓을 필요도 없는것이다...

그렇게 둘은 룸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기계는 빠른 속도로 하강하고 있다. 3,2, 그리고 1층에 이르러 문이 활짝 열린다. 아마도 장소의 특성상 엘리베이터 문의 작동 속도도 조절해 놓은 것 같다.

"타죠"라며 동욱이 먼저 올라탄다. 그 뒤를 따라 한발을 넣던 해은이 멈칫한다.

그런 그녀의 주저하는 모습에 동욱이 상처받는게 금세 느껴진다.

"미안해요...안되겠어요"라며 그녀가 몸을 돌려 로비를 뛰어나가고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그는 무기력하게 쳐다본다.


"자 이거 다시 껴"라며 그날밤 해은을 만난 진수가, 지난번 해은이 돌려준 커플링을 다시 끼워주려 한다.

그러나 해은은 손을 내밀지 않고 물끄러미 반지를 쳐다보기만 한다.

"사랑해. 알잖아"라며 진수의 눈빛이 간절해진다.

그러자 해은은 곰곰이 생각에 빠지더니 그 반지를 건네 받는다.

"어서 껴"라고 재촉하는 진수의 눈을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그 반지를 옷 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그런 그녀의 행동이 낯설게 느껴지는 진수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겨울 다 왔어. 그지?"라며 해은이 밖을 보자 첫눈이 휘날린다. 가늘지만 분명 눈발이 흩날리고 있다.

"눈 오네"라는 그녀의 말에 진수도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우리 좀 나가서 걸을까?"하며 다시 맞은편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는 텅빈, 해은이 앉았던 라탄의자만 들어온다. 해은아...그때 폰 메시지가 온다.

"우리, 겨울은 각자 보내고 봄에 봐"라며 해은이 보내온 문자 끝에는 하트 이모티콘이 떠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뭐라고 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진수는 당장은 그 어떤 대답도 할수없음을 깨닫고 폰에서 눈을 거두어 다시 밖을 본다. 그 사이 눈은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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