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걸 기억하진 않는다

by 박순영

우리도 <냉정과 열정사이>한번 써보자던 동수와 함께 나눠 썼던 글들이 이제 보니 가영의 문서서랍에 저장돼있다. 그는 잊지 못해 애면글면했음에도 이 글은 어떻게 그렇게 까맣게 잊고 지냈을까?


동수와 헤어진지 벌써 3년이다. 이따금 포털을 통해 그의 근황을 알고 있었지만 가영쪽에선 한번도 연락을 한적이 없었다. 대신 동수는 이따금 술에 취한다든가 하면 한밤이나 새벽에 전화를 해서는 '야, 너 잘 사냐?'라고 비아냥대거나 아니면 숨소리만 내다 끊고는 하였다.


그와의 이별이 너무 힘들어서 가영은 다시는 남자나 연애따위는 생각을 않겠다고 결심하고 파리유학에 올랐고 박사를 받고 모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파리에서는 정말 공부에만 매달렸고 한국을 떠났다는 것만으로도 동수와의 거리감은 배로 불어났다. 그러나 이따금 걸려오는 그의 전화에 그녀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이미 서로의 손을 놓아놓고도 혹시나 서로가 다른 이라도 만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시달린것도 사실이다


눈이 내리는 대학교정은 쓸쓸함 그자체다. 방학을 해서 교정은 텅빈거 같고 궂은 날씨에 도서관도 썰렁하다. 아직 자신의 연구실이 없는 가영은 예전에 자주 찾던 도서관 3층에 자리를 잡고 의뢰 들어온 모디아노의 신간 번역을 시작한다. 모디아노를 주제로 파리에서 박사를 받았기에 출판사에서 번역의뢰가 들어왔을때 그녀는 반갑기까지 하였다.



모디아노의 글은 번역도, 읽기도 만만치가 않다. 시공간을 마구잡이로 오가는 그의 '기억'모티브때문에 번역하기 이해하기 난해한 작가로도 유명하다. 가영은 한줄한줄 단어 하나하나를 세심히 분석하고 이어가며 번역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른후 굳은 몸을 풀기 위해 잠시 창밖을 보자 밖은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다..

동수와 헤어지던 그날밤같기만 하다. 눈 그친뒤의 황량한 냉기로 가득한.


며칠전 문서서랍에서 그와 공동으로 쓰던 그 작품을 본 뒤로 그녀는 뒤숭숭하고 그가 너무도 보고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녀는 폐관시간이 다 돼서 도서관을 나와 주차돼있는 자신의 차로 간다. 시동을 걸고 잠시후에 차는 따스하게 덥혀진다. 그러자 나른한 졸음이 몰려온다....

그 글을 마저 쓸까? 라는 생각이 퍼뜩 든다. 하지만 애초부터 한챕터씩 번갈아 쓰기로 했었고 그렇게 구성된 책이기에 쉽지가 않을것 같고 이미 반 이상을 공동으로 작업한걸 싹 다 날리고 다시 혼자 쓴다는것도 할짓이 못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그녀는 책을 완성하고 싶다...



동수는 자다 전화를 받았는지 목소리가 잠겨있다. 3년이란 둘의 공백기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우리, 좀 봤음 해.. 할 얘기가 있어"

밤새 눈이 내린 어느날 밤, 그녀는 거의 충동적으로 그에게 전화를 했고 그 다음날 대학로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둘은 3년만에 눈내리는 대학가에서 재회했다.

"우리, 그 책 마저 쓰면 어때?"라는 가영의 제안에 동수는 영문을 몰라하는 눈치다. 이미 잊어버린 것이다 책따위는.

"있잖아. 우리 헤어지기 전에 같이 썼던"

"아, 그거...까맣게 잊고 있었네"라며 그가 후, 하고 한숨을 내쉰다 3년전을 반추하기라도 하듯이. 그러더니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잠깐만,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까페 밖으로 나간다. 아마 담배를 피우러 나갔으리라.

담배때문에 심장이 망가져 응급실에 실려가놓고도 그는 담배를 끊지 못했다. 그렇게 한 10여분쯤 흐른뒤 그가 담배냄새를 풍기며 다시 자기 자리에 와서 앉는다.

"우리, 결혼할래?"라는 그의 말에 가영은 뭐라 답할 말이 없다. 그녀는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니, 결혼하려고 했었지만 이미 틀어지지 않았는가. 그렇게 3년을 안보고 지내다 불쑥 결혼을 하자는 그의 말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이럴땐 솔직하게 이야기하는게 좋다는 판단이 서서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다.

"일단 책 완성하고 그러고나서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에 동수는 가타부타 대답을 않고 창밖 황량한 풍경으로 눈을 돌린다.




그렇게 둘은 한달여를 온라인으로 때로는 오프라인에서 만나서 글쓰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다보니 마지막 챕터만 남았다.

"이젠 대답해줄래? 책도 거의 다 썼는데?"라면서 동수가 물어온다.

"날, 여태 사랑하긴 해?"라는 가영의 질문에 동수가 픽 웃는다.

"새 사람 만나서 밀당하고 서로 적응하고 그러는게 솔직히 귀찮다"라고 동수가 그나름 솔직하게 대답한다. 그말에 가영은 곰곰 생각에 빠진다.

"미안. 나 책 포기할래"

그말에 동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러더니 발끈해서 "너 장난해?"라며 소리를 친다.

예전의 그로 다시 돌아간 동수를 보면서 가영은 자신들은 역시 헤어져있는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더라도 함께 하기에는 서로가 너무도 버거운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 지지 않겠다고 악다구니를 쓰던 3년전 그날밤이 떠오른다. 그러다 동수는 그녀의 뺨을 후려쳤고 그녀는 그대로 오피스텔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그녀를 동수는 발로 걷어차기까지 하였다. 그리고는 그녀가 깨어났을때는 응급실이었다. 미안하다며 자신의 링거 꽂은 손을 잡아오던 동수의 손을 그녀는 매몰차게 뿌리치고 링거를 빼버리고는 병원을 뛰쳐나와 달려오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둘이 이별하던 풍경이 그랬다...그녀가 애써 파묻어둔 기억의 한조각.

그에게 맞았다는 사실을 그녀는 잊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3년간 연락한번 하지 못한걸지도 모른다.


결국 둘의 공동작업은 미완으로 끝이 났지만 책은 나왔다. 마지막 가영의 챕터를 동수가 가영이 쓴것처럼 해서 출간을 한것이다.

"인세 반반하자"라는 그의 말에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사이 봄이 가고 여름이 오도록 인세 는 한푼도 입금되지 않았다.

"일단 내가 다 받아서 나누는걸로 하자"라는 동수의 말에 그녀가 침묵으로 응대한게 이런 빌미를 준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는 다음날 있을 모디아노 강의준비를 하느라 파워포인트를 제작하던 그녀가 잠시 숨을 돌리느라 인터넷서치를 하던 도중 동수의 기사를 보게 된다.

"실은 헤어진 여친 생각하면서 '냉정과열정사이'처럼 교차쓰기로 한것처럼 써본겁니다..그녀 파트를 쓸때는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라며 잔뜩 수심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동수의 사진을 보며 그녀는 컴퓨터 액정에 퉤,하고 침을 뱉는다. 기사는 '연말에 드라마화 예정'으로 갈무리되고 있다.

바람에 창이 덜컹인다. 장마가 오려는지 공기가 텁텁하다.


pics from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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