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이 자주 올거라는 기상청의 올 겨울 예보는 보기좋게 어긋났다. 딱 한번 연말에 영하 10도를 찍긴 했지만 이틀뒤에는 훌쩍 기온이 올라 영상권에 진입하면서 그 상태로 겨울은 끝이 나고 있다.
그날도 이렇게 따스한 봄같은 겨울이었다. 미경이 방금 먹은 점심을 설거지 통에 넣고 돌아서는데 전화컬러링이 울렸다. 딱 한사람을 위해 설정한 벨이기에 그녀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혁기였다.
지난 봄 헤어졌으니 거의 1년만이다. 둘다 그리 강한 성격이 아니어서 그런 부분에서는 부딪칠일이 없었고 설혹 갈등이 생기면 누구랄 것없이 한쪽이 양보하면서 절충과 타협을 이끌어내며 무탈하게 지내왔다. 하지만 지난봄 그일은 지우지못할 상처를 남기고 결국 둘을 갈라세웠다.
지리산 취재를 의뢰받은 혁기가 프리랜서 사진작가 s와 같이 가게 된게 사달이 난 것이다. 안그래도 k의 이야기는 출판계에 널리 퍼져있어 미경은 그 동행을 취소하든가 다른 사진작가를 데리고 가라고 하였지만 그러면서도 이미 윗선에서 다 컨택해서 짝지어준것이어서 프리랜서 기고가인 혁기가 이래라 저래라 할수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기에 혁기에게 다짐을 받는 선에서 그쳐야했다. 혁기는 '너 두고 딴짓 안한다'라고 다짐을 하였지만. 그역시 k와 동반취재를 갔던 무수한 남자들처이 당한것처럼 결국에는 s의 유혹에 굴복해 몸을 섞고 말았다. 불안에 떨던 미경은 s가 올린 혁기와의 침상사진을 그녀의 sns에서 보고 만 것이다.
혁기는 술이 취해 자기도 모르게 한 짓이라고 싹싹 빌었지만 미경은 둘이 함께 해온 3년의 시간이 물거품이 되는걸 느껴야했고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아 결국 헤어지자고 하였다. 그렇게 갈라서고 1년여가 흐른것이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한번은 혁기의 블로그와 sns에 들어가 보려 하였지만 이미 비공개처리 돼서 아무것도 볼수가 없었다.
시간 앞에 장사가 없다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작아지고 요동치던 실연의 고통도 많이 사그라들어 영영 이렇게 평행으로 가나보다,하고 있을때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온것이다.
혁기는 미경의 퇴근시간에 맞춰 출판사 근처로 오겠다고 하였다. 그와 헤어진 뒤 미경은 곧바로 퇴사를 하고 프리랜서 편집일을 하고 있다는걸 알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만나서 얘기해"라고 미경은 일단 그를 보기로 마음 먹고 약속을 잡는다.
헤어질 당시보다 조금 야윈거 같지만 그래도 어디가 아프다거나 아주 안좋아보이지는 않는 혁기를 보면서 미경은 조금 화도 나고 그래서 분풀이를 하고싶다. 자기는 몸무게가 10kg나 줄었고 우울증이 와서 정신과도 다녀야 했는데... 하지만 아직 그런말을 할 정도로 둘 사이가 편해진것도 아니어서 그녀는 말을 아끼기로 한다.
"sns랑 다 못보게 했대?"
"아예 폐쇄할까하다가 그냥..그일, 정말 후회한다"
"다 지난 일이야."
"무슨 뜻으로 받아들임 되니?"
"나오기 전에 곰곰 생각해봤는데 너무 심하게 금이 간거 같아. 차라리 돈문제같은 거면 모르겠는데 여자문제는..."하면서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한번만 봐주면 안되겠니?"
그가 애원하듯 물어오지만 미경은 뭐라고 대답을 주지 않은채 그대로 까페를 나선다.
입춘이 지나선지 이미 오가는 행인들의 옷차림에서 봄이 물씬 묻어난다. 올여름 또 대단하겠구나 기온이...하면서 그녀는 인사동을 빠져나와 종로쯤에서 택시를 탄다.
그날밤 미경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혁기의 sns에 들어가 보았다. 예상대로 그는 다시 공개로 돌려놓았고 둘이 낮에 만난 인사동거리 사진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그 어떤 코멘트도 달지 않은것에서 그의 착잡하고 복잡한 심기가 묻어났다. 물끄러미 그의 계정을 보던 미경이 용기를 내서 그 사진밑에 댓글을 달았다.
"다음엔 대학로면 좋을거 같아"라고.
혁기는 뛰어왔는지 콧등에 땀이 배어있었다.
"천천히 오지 뭘..." 살짝 웃어보이는 미경을 보자 그가 조금 안도하는 눈치다.
"가자. 내가 밥 사줄게"
"그냥 분식 먹자. 우리 둘다 백수잖아"라며 그녀는 둘이 자주 가던 소극장 뒤의 분식집으로 먼저 길을 잡는다.
그렇게 나란히 걷던 혁기가 슬쩍 그녀의 한손을 쥐어온다.
미경이 별다른 거부감이나 저항을 하지 않자 혁기는 잡은손에 힘을 더 준다.
"나 차 한대 뽑았다. 300짜리.그걸로 너 좋아하는 동해 가자"
그가 잔뜩 흥분이 돼서 떠들기 시작한다.
"나 다 풀린거 아냐"라며 미경이 다시 뵤루퉁해지자 이번엔 혁기가 한팔로 그녀의 어깨를 안는다.
그렇게 둘의 갈등이 봉합된거 같았지만 이후 사흘동안 혁기로부터는 어떤 연락도 없어 미경은 다시 초조해진다. 혁기 자체가 하루에도 몇번씩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내오고 하는 타입이 아닌건 알지만 그래도 지난번 대학로에서 점심을 같이 하고 영화까지 같이 보았으면 그걸로 지난일은 일단락된거라고 생각했기에 그의 무소식이 신경이 쓰일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보통 남자가 적극적으로 분위기를 이끌어나가는게 맞는거라고 여겼기에 그녀는 뭔가 또 틀어지는 느낌까지 받는다.
그렇게 그녀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데 새벽이 다 돼서 그로부터 문자가 날아온다. 지금 병원이라고.
병원 응급실이란 말에 미경은 잠옷위에 그대로 패딩을 걸치고 뛰쳐나와 택시를 불러탔다. 그렇게 도착한 병원응급실에 그녀가 들어서는데 마침 저만치서 이쪽을 보고 있는 혁기와 눈이 마주쳤다. 혁기는 링거꽂은 손을 가만 흔들어보였다.
"어떻게 된거야?"라는 그녀의 말에 "내가 병이 생겼잖아. 공황장애..너랑 헤어지고 어느날 갑자기 숨이 멎는거 같고 호흡이 제대로 안되드라구. 손발도 저릿하고"라는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미경은 그의 가슴에 자기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한다.
혁기의 퇴원 이후 미경은 당분간 현기의 방에서 함께 지내기로 한다. 현기는 자다가도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거나 괴로워하였고 과호흡에 시달렸다. 그럴때면 미경은 마치 아이를 달래듯 그를 다독였고 그러면 그는 잠잠해졌다..
"이젠 나 가도 되지?"
혁기의 상태가 나아졌다 판단한 그녀가 이리 말하자 혁기가 아쉬워한다.
그제서야 미경은 가슴에 담아온 그말을 하기로 한다. "매일매일 자기 연락 기다렸어. 헤어지던 그날부터"라는 그말을.
이제는 혁기의 잘자라는 메시지나 전화가 없이는 잠을 잘수 없게 된 미경은 오늘밤도 자정이 다 돼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고 있자 은근 부아가 치밀기도 하지만 5분만, 10분만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그렇게 그녀가 작정한 시간이 끝나갈 무렵 그로부터 문자가 온다.
"갈까? 지금" 혁기는 그 밤에 미경에게 오고 싶어한다.
잠시 생각을 추스린 그녀가 답문을 찍기 시작한다.
" 내가 갈게. 우리 밤바다 오고 가자. 저번에 자기가 얘기했잖아"라고.
"올가을엔 나랑 결혼해줄래?"라는 혁기의 말에 미경은 흡, 하고 숨이 멎는것만 같다.
그러는 사이 해는 바다를 빨갛게 물들이며 완전히 솟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