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흘 전 잠시 그와 통화를 했을때 그는 주말에 내가 갈게,라고 해놓고는 아무 연락이 없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메시지를 보내도 열지를 않는다.
진희는 불안한 마음에 아무래도 자기가 기성에게 가봐야겠다 마음을 먹는다. 그동안 몇번 가려 했지만 기성쪽에서 누추한 생활을 보여주기 싫다며 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참에 기성도 보고 그의 환경도 확인할겸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앱이 가리키는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을 이용할까 하다 급한 마음에 그냥 택시를 타기로 하고 총 3만원 돈을 내고 그의 동네에 이르렀다. 가벼운 멀미를 느끼며 택시에서 내리자 싸늘한 겨울바람이 그녀의 울렁임을 가라앉혀주는 듯하다.
그의 동홋수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녀는 한번 더 전화를 해보기로 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가 받았다
"왜?"그가 조금은 퉁명스레 말을 한다.
그제야 진희는 안도와 함께 원망이 밀려온다.
"어떻게 된거야. 온다고 해놓고"
"내가? 아...몸이 좀 안 좋았어"
그말에 그녀는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다.
"그럼 전화라도 줘야지.지금"
"나중에...나중에 얘기하자"라며 그가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몸이 안좋으면 집에 있어야지 전화기 너머 소음이 심하게 들린걸 감안하면 지금 그는 밖에 있다는 뜻이다. 바로 당신 집 앞이라고 말을 하려했는데 하지 못한게 안타깝다. 무슨 급한 일이길래...하는데 저만치 기성이 걸어오는게 보인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다. 웬 여자가 그의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걷고 있다. 그러고는 그의 집이 있는 동으로 들어간다.
그걸 먼 발치에서 본 진희는 상황파악이 되질 않는다. 내가 지금 뭘 본걸까?
한참을 기성의 아파트 단지가 내다보이는 건너편 까페에서 시간을 보내던 진희는 그만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하는데 이번에는 '그녀'와 기성이 단지를 나오는게 보인다. 여자는 손을 흔들고는 저만치 오는 버스에 오른다. 버스가 떠나자 기성이 들어가려고 돌아서는게 보인다.
진희는 벌떡 일어나 급하게 까페를 뛰쳐나간다.
뒤에서 기척을 느꼈는지 기성이 휙 돌아보더니 꽤나 놀란 눈치다. 니가 왜 여기, 라는 그의 눈빛에 진희는 싸늘한 침묵으로 응답한다.
"어디 가서 밥 먹을까?"하며 기성이 그녀의 팔을 잡아끈다.
"밥은 됐고 누구야?"라는 그녀의 말에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까 다 봤어,라는 말이 터져나오려는 걸 그녀는 간신히 참는다.
"몸이 안좋다면서 이렇게 나다니면 어떡해"라는 진희의 말에 "약국좀 갔다 오는길이야"라고 그가 거짓말을 한다.
"그래? 약은 어딨어?"
"어.."하며 그가 당황한다.
"아, 오늘 일요일이어서?"라며 그녀가 거들어주자 "그러게 . 문 연 데가 없드라구"하면서 머쓱해한다.
기성은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진희를 바래다주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계속 "내가 데려다 줘야 하는데 몸이 이래서.."를 반복한다.
"많이 안좋아? 응급실이라도 갈까?"라는 진희의 말에 "내일 갈게 병원"이라고 그가 말한다.
"알았어"하는데 저만치 진희가 탈 버스가 다가온다.
"집에 가서 연락할게"라며 그녀는 버스에 오르고 버스가 움직일때까지 기성은 버스 안 진희를 쳐다보며 가라는 손짓을 한다. 그리고는 버스가 10미터쯤 움직이자 그는 돌아서서 재빨리 터미날을 빠져나간다.
한밤에 집에 도착한 진희는 이 '특별한 상황의 연애'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아파트 현관을 들어설때 점멸하는 센서등을 보면서 이번에 기성이 오면 고쳐달라고 마음 먹었던게 생각난다.
둘다 사별한 처지로 지인의 소개로 서로 만난후 기성은 적극적으로 대쉬를 하였고 그렇게 둘의 연애는 시작되었다. 만난지 한달 뒤 둘은 동침을 하였고 그 다음주 기성은 아들이라며 어린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천이라는 그 아이는 예닐곱살 정도로 보였고 한눈에도 기성을 쏙 빼닮았다. 어린 아이를 두고 눈을 감았을 생모를 생각하니 진희는 가슴이 뭉클해져 천이를 가슴에 꼭 안아주었다.
언젠가 천이를 데리고 둘은 바다를 다녀온 적도 있다. 아이가 자는 사이 기성은 막 잠이든 진희를 안아왔다. 애가 깰까봐 조마조마해하면서 둘은 불안한 섹스를 마치고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살림을 합치기로 약속을 하고 둘은 만남을 가져왔다.
그동안 기성의 사업은 펜데믹으로 적자가 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문을 닫았다. 그와 함께 그는 큰 빚을 지게 되었고 두 부자는 서울살이를 감당하지 못해 인근 지방으로 이사를 갔다.
그때부터 진희와 기성의 만남은 부쩍 줄어들었고 그와 동시에 기성은 거의 노골적으로 생활비를 진희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인건비를 아끼려고 따로 보조를 두지 않고 미장원을 끌어가던 진희는 그가 요구할때마다 돈을 건넸고 가끔은 '용돈'명목으로 알아서 일정액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자 어느날부턴가 그는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하였고 큰돈을 가져가고 얼마 지나지않아 다시 손을 벌리기도 하였다. 그는 날 진정 사랑하는가...
"아이엄마야"라는 전화너머 그의 말을 들으면서 진희는 까무러칠뻔한다. 죽었다는 천의 생모가 살아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을뿐더러 여태 그걸 숨겨왔다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거의 반년만에 기성이 찾아와 일찍 미장원 문을 닫고 둘은 근처 호프집으로 향했다.
"근데 왜 만나? 내가 있는데 왜?"
"넌 모른다. 애낳고 산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끊어지질 않아. 넌 애가 없잖아"라고 한다.
"다정해 보이던데? 꼭 연애하는 사람들처럼?"
그말에 기성이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더니 "헤어지자" 한다. 진희가 예상한건 변명이었다. 구차스러워도 어떻게든 팔짱을 끼고 가던 그녀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식의...그런데 헤어지자고 그가 말하고 있다. 진희는 당황스럽고 갈피를 잡지 못한다.
"니가 그렇게 나를 못믿으면 헤어져야지"라며 그가 마른 안주를 집어먹는다.
그의 오물거리는 입을 가만 쳐다보던 진희는 "둘이 왜 이혼한거야? 이렇게 계속 만날거면서?"라고 묻자 "이혼한거 아냐. 결혼한 적이 없으니까.."라며 그가 맥주를 들이킨다.
둘의 만남을 주선했던 지인이 그러면 거짓말을 한 건지 아니면 지인도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건지 진희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나 사랑해?"
"천이가 널 좋아해 지 엄마만큼이나 "라며 그가 엉뚱한 대답을 한다.
"아니, 당신이 날 사랑하냐고"
"사랑?"하더니 기성이 픽 웃는다. "우리가 열살 어린애냐? 사랑타령은...그여잔 그냥 애엄마야. 잠시 같이 살았던.."
"그래서 그쪽으로 이사한거야? 그여자 가까이 살려고? "
"그때 내 상황 알잖아. 그냥 떠밀려 간거지...그럴바엔 천이 생각해서라도"
"그여자랑 가까이 살자? 그래서 나도 못오게 한거야? 혹시 내가 보낸 돈으로"
"애엄마도 힘들거든"
그말에 진희는 어이가 없다. 그동안 자기가 보낸 돈의 일부가 천이 엄마라는 그녀에게 건너갔다.
"어떻게!"라는데 그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호프집 음악 소리를 뚫고 들릴 정도로...액정을 본 그가 조금 당황하는 눈치다.
"받아 여기서"라고 진희가 담담하게 말을 하자 기성은 자연스레 그 전화를 받는다. "응...친구좀 만났어..."
그가 전화를 하는 는동안 진희는 호프집을 나와 차디찬 겨울거리를 걷기 시작한다. 지금 이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리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도무지 답이 나오질 않는다. 아무리 자기가 받으라고 한 전화지만 그걸 또 받는 그는 뭔가. 버젓이 자기가 보는 앞에서.
그러고 있는데 뒤에서 뛰어오는 기척이 느껴져 그녀는 걸음을 멈춘다.
"춥지?"라며 기성이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저만치 뿌연 달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어디 가서 우동이라도 먹을까?" 기성이 입을 다시며 말을 한다.
"배고파?"라고 묻고나서도 진희는 그런 자신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속을 알수 없는 남자, 그의 여자, 그리고 자기..
그날밤, 기성은 한사코 자고 가겠다고 하였지만 진희는 애엄마한테 맡겨놓고 왔다는 천이를 봐서라도 얼른 가라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애엄마가 봐주고 있다는데...
그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올라 가만 손을 흔드는 걸보면서 진희도 손을 흔들어준다. 그렇게 기계 문이 닫히고 그녀는 현관을 들어선다. 그러는데 센서등이 또 점멸을 한다. 저걸 고쳐달라고 했어야 하는데...하며 그녀는 어질러진 신발들을 가지런히 하다 문득 도어락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재 설정한다.
침실에 들어서는 순간 침대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부터는 혼자 잘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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