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해..근데.."라며 의정은 전화너머에서 말끝을 흐린다.
20대 중반에 일찍 이혼을 하고 20년을 혼자 살아온 친구가 재혼한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하고 축하해줄줄 알았던 의정의 반응에 경미는 풀이 죽는다. 그렇게 데면데면하게 전화를 끊고 그녀는 현상에게 전화를 한다. 지금좀 보자고.
"니 사정 모르는거 아닌데 뭐..."라며 현상은 커피를 홀짝인다.
"고마워 이해해줘서. "라며 의정이 그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낸다.
둘은 거래처 지인으로 알아오다 1년전부터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현상도 신혼때 아이없이 이혼한 처지라 서로가 상황도 같았고 해서 현상의 집에서는 딱히 경미를 트집잡는다거나 하지 않았다. 문제는 경미의 본가, 즉 하나뿐인 혈육 오빠의 반응이다.얼마전 오빠의 생일에 "나 사귀는 사람 있어"라고 하자 오빠는 "잘 알아보고 사겨"라고 한마디 하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나이 마흔에 하는 재혼이니 딱히 타인의 허락을 구하고 말것도 없지만 그래도 세상 유일한 피붙이인 오빠에게만은 인정받고 축복받고싶은게 사실이었다.
현상은 한눈에도 신경 써 차려입고 온걸 알수 있을 정도였다. 매형자리인 경석에게 잘 보이려고 나름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너무 긴장은 하지 말고"라며 경미가 그의 손을 잡자 그의 손이 차다. 긴장해있다는 증거였다.
"촌스럽게"라며 경미가 핀잔을 주자 현상이 깊이 심호흡을 한다.
오빠 경석은 현상과 악수를 나눈 뒤에도 별말이 없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경미, 딸같이 키워주셨다고요"라고 현상이 말하자
"딸은 무슨....지가 알아서 큰거지"라며 경석은 예의 무뚝뚝함을 드러냈다.
"잘 살겠습니다. 형님"이라고 하자 경석은 경미와 현상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그들의 결혼을 허락하는 눈치였다. 그런 오빠의 반응에 경미는 고마움까지 느꼈다.
"형님 사람 좋아보이던데?"
경석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며 현상이 차에 오르며 꺼낸 첫마디였다.
이제 결혼만 예정대로 치러지면 된다 생각하니 경미는 모든게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거 같아 마음이 놓인다.
"자기 집에도 인사 가야지"라고 하자
"내가 다 말씀드렸어. 결혼한다고"라고 한다.
"그래도.."라면서도 경미는 이미 현상과 결혼한 기분이 들어 운전석 그를 뚫어지게 본다.
반듯한 이목구비, 조금은 칼카로운 턱선, 그리고 도시적 세련됨. 게다가 둘은 동갑이었다.
"요즘은 웨딩 컨설턴트도 있대"라는 경미의 말에 현상은 "재혼인데 무슨"이라며 살짝 타박을 주지만 경미가 우기면 따르겠다는 눈치다.
"경석오빠가 좋아하디?"
청첩장을 직접 주기 위해 만난 의정은 사뭇 걱정스레 물어온다. 지난번 전화통화때도 그러더니...
경미는 마음이 상한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해? 당연히 오빠야 좋아하지. 하나뿐인 여동생이 짝 찾아간다는데"
"니가...그집 밥줄이잖아"라며 의정이 냉정하게 말한다.
밥줄..
'무슨 밥줄..."이라면서도 완전히 부정을 하지 못하는 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경석은 10년전 교통사고로 몸을 크게 다쳐 이후로는 이렇다 할 일자릴 얻지 못해 경미의 수입을 쪼개 살다시피 하였다. 그런 상황이 되면 보통 아내가 발 벗고 생활전선에 뛰어들만도 한데 올케 희정은 그러질 못했다.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럴 용기가 없어보였다. 해서 경미는 아무말도 없이 자신의 수입에서 반을 떼서 경석네 생활비를 대주고 있었다.
"내가 무슨 억을 버니...오빠도 다 생각이 있겠지"라는 경미의 말에 의정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남은 음식을 마저 먹는 시늉을 한다.
"어머 언니!"하고 경미는 자신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올케 희정을 보고는 반가워서 소리친다.
"이제 퇴근해요? 바쁘죠 요즘"이라며 희정이 경미의 팔짱을 낀다.
둘은 누가봐도 친 자매같았다. 이상하리만치 외모도 닮았고 희정은 친 동생을 대하듯 늘 살갑게 경미를 대했다. 그런 행동의 밑바닥에는 물론 자신들의 생활비를 대주는 존재라는게 깔려있겠지만...
"집을요?"라며 경미는 먹던 사과를 하마트면 떨어뜨릴뻔 한다.
경미가 비록 외곽에나마 20평대 아파트를 갖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고 그만큼의 노동의 고단함이 묻어있었다. 그런데 지난번 현상을 맞이하던 때와는 달리 희정은 냉정하고 차갑게 이집의 반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경미가 결혼하고 나면 더이상 재정적 지원이 어려울테니 집이라도 나누자는 식이었다.
그말에 경미는 왜 친구 의정이 그리도 경석의 반응을 걱정하였는지 이제 이해가 간다.
"집은 좀...내가 가끔 신경 써드릴게요 언니"라고 하자 희정은 "이미 오빠랑 얘기 다 끝냈어요"라고 한다.
무슨 얘기를 어떻게 끝냈다는것인가. 이집을 갖는데 경석이 기여한 지분은 1도 없는데....
"니가 이해해라. 형님 입장에서는 당신이 일할수도 없고 하니 그럴만도 하지..신혼은 일단 내 오피스텔에서 시작하고 그 집은 팔아"라고 현상이 너그럽게 말을 해준다. 그말에 희정은 고맙고 서럽다.
"고마워"라고 말하자 "얼른 집이나 팔아"라고 현상이 말한다.
그날 현상과 헤어져 들어오는길에 경미는 동네 부동산업체 몇군데에 집을 내놓았다. 요즘 집이 잘 안나간다는 걸 알기에 일단 시늉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덜컥 일주일후 집이 빠졌다. 집이야말로 제 주인을 찾으면 나간다더니...
계약을 하고 중개업소를 나오는 경미의 마음이 착잡하기만 하다.
"정말? 대박이다.."라며 전화너머 현상이 반기는 눈치다. 어떻게 팔았냐, 대견하다,까지 덧붙이며 이게 다 우리들이 인연이어서 그렇다고 좋아라 한다.
집에 들어와 그 소식을 올케 희정에게 전하자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고는 남편에게 "아가씨 집 팔렸대"라며 알려주는 목소리까지 들려온다. 이렇게들 좋을까....
경미는 이후 현상과 거의 매일 만나 예식일정을 소화했다. 아무리 생략을 하라 해도 전혀 안해갈수가 없는것이 예단이어서 그준비도 하랴, 집 이사 준비도 하랴 그녀는 정신이 없었다. 현상의 오피스텔이라봐야 복층구조의 실평 10평 남짓한 공간이어서 경미는 자기 짐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생각에 최대한 버리고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는 이사가 코앞으로 닥쳐오자 현상은 퇴근하면 경미의 집으로 와서 짐싸기를 거들었다. 아무리 포장이사를 한다 해도 주인이 챙겨야 하는 짐이 만만치 않았다.
"무슨 말인데 그래?"
그날도 현상은 짐을 싸다 붏쑥 할 얘기가 있다며 얼굴이 어두워진다. 이제 모든 문제가 다 풀린 마당에 무슨 속사정이 있다는 걸까? 라며 경미가 의아해하자 현상이 어렵게 말을 꺼낸다.
"우리집도 너네랑 크게 다르지 않잖아"라는 말에 경미는 그 뒷말을 알거 같다.
현상의 부모는 모두 연로했고 한마디로 양친이 다 경제력이 없었다. 현상의 형이 하나 있지만 결혼하고부터는 본가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여서 노인들은 몇푼 안되는 연금으로 살아야했다. 대신 현상이 이따금 용돈이며 생활비를 대준것으로 경미는 알고있다. 그래서 결혼후에도 가끔은 보조를 해야 한다는걸 경미는 인지하고 있었다.
"내 월급의 반은 드리기로 약속드렸어"라는 현상의 말에 경미는 어이가 없다.
동생이 뒤늦게 결혼을 하게 되었으면 형이라도 그동안 동생이 져온 짐을 나눠야 할텐데 나몰라라 한다는 것이다.
"반이나? 언제까지 우리가 대드려야 돼?"
"두분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니.."
즉, 양친 모두 세상을 뜨실때까지 생계를 현상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둘의 월급을 합쳐봐야 얼마 안되는데 거기서 또 반을 떼라니...
언제 집장만 하고 아이낳고 키우고 자신들의 노후 준비를 한단말인가.
"거봐. 그래서 내가 걱정한거야"
의정은 전화너머에서 후, 하고 한숨을 내쉰다.
"이 결혼 하지 말까?"라는 경미의 말에 의정은 침묵한다.
하지만 이제 집도 비워줘야하고 예식을 파기할 경우 위약금도 상당하다. 아니, 무엇보다 양가의 반응에 경미는 크나큰 실망과 배반감을 느꼈다.
"우리, 이 결혼 다시 생각해"라는 경미의 말에 현상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우린 뭐 먹고 살아. "
"우리 둘다 벌잖아...그리고 내 사업 시작하면"
"당신 사업하려면 이미 늦었어. 나이 마흔에 무슨"이라고 경미가 싸늘하게 반응한다.
"너 안 굶겨. 하자 결혼 예정대로"라며 현상이 그녀의 손을 잡아온다.
"일단 집은 비워줘야 하니까..."라며 그녀는 그 다음 결정을 해야 한다는걸 알게 된다.
의정이 아는 업자를 소개해줘 며칠후 경미는 중고차를 한대 샀다. 그리고는 일주일간 연수를 받고나자 어느정도 운전에 자신이 붙었다.
이른 새벽, 그녀는 동해로 향한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공기가 맑고 차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바다가 보이자 드디어 '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면허 딴지 10년만에 운전을 해낸 자신이 대견스러웠고 부조리한 결혼을 파기한것도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이제 곧 해가 뜨려니 하자 아닌게 아니라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해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원룸이면 어떻고 8평이면 어떠랴...모든것에서 해방돼서 살게 되었는데,라고 생각하자 내일로 다가온 이사가 이제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현상의 전화였다...
벨은 계속 울려대지만 그녀는 받을 이유도, 여력도 없이 그저 솟아오르는 해와 달려드는 파도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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