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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Feb 20. 2024

맨홀

혜수는 조금전 카트를 밀면서 자신을 지나쳐 간 여자가 진경임을 단번에 알아본다. 진경은 오른쪽 유제품 코너에 눈을 주며 천천히 걸어갔다. 아마도 혜수를 못본거 같다. 아니면 봤다해도  기억을 못하는 건지 모른다.. 혜수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왔다.  이 마트에 온다면 여기 어디 산다는 얘길수도 있다. 그녀는 호흡이 가빠왔다.



밥을 먹는둥마는둥 하는 혜수를 남편 우성이 걱정스레 쳐다본다.

"당신 어디 아파?"

"아냐.."하는데 한숨이 묻어나온다.

"왜, 뭐 기분 나쁜 일 있나?""

"우리, 딴데로 이사가자"라는 그녀의 말에 우성은 뭐? 하는 표정이 된다. 이제 이사 온 지 겨우 석달인데 다른곳으로 또 옮기자는 아내 혜수의 말이 납득이 가질 않는다.

"당신이 좋아서 온거잖아 여기로. 서울 같지 않고 전원적이라고.."

"아니, 싫어졌어"라며 그녀는 고개를 떨군다.



왜 하필 진경은 이 동네에 살까? 혹시나 같은 아파트 단지기라도 하면 이 일을 어쩌나?

혜수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남편 우성의 옛여자. 아니, 어쩌면 현재까지 자기 모르게 이어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여자..

남편의 외도로 자신이 겪어야했던 고통을 떠올리자 먹은게 다 올라오려 한다. 그녀는 수저를 놓고 재빨리 욕실로 달려가서 변기를  붙들고 한참을 토해낸다.

"당신 병원 한번 가봐. 위염 재발한 거 같은데"라며 혜수의 등을 두드려 주는 우성을 그녀가 매섭게 노려본다.

"여보..."라며 그가 말끝을 흐린다.


분명 진경은 자신의 옆동에서 나왔다. 분리배출을 하고 들어서는데 그녀가 앞서  혜수의 옆동으로 들어가는게 보였다. 혹시 같은 단지에라도 살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은 마트에서 처음 진경을 보았을때부터 스멀스멀 그녀를 덮쳐왔고 그것은 기어코 현실이 돼버렸다.

'같은 단지였어 역시..'라며 그녀는 맥없이 슬리퍼를 질질 끌며  자기 동으로 들어간다.

그러다 힐끔 곁눈질을 하자 마침 진경도 자신을 보고 있다. 그녀가 기억을 해낸걸까?



우성과 진경의 애정행각을 수도 없이 말려봤지만 우성은 아예 혜수에게 이혼까지 요구하였다. 결국 혜수는 정신과 약을 다량 털어넣었고 응급실에서 눈을 떴다. 그렇게 일단락 되었다고 여긴 그 일이 어쩌면 다시 또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혜수는 진저리가 난다.



"이사가 장난이야?"

며칠 계속 다시 이사를 가자는 혜수의 채근에 우성은 결국 버럭 화를 냈다.

"만났구나 벌써..."라는 혜수의 말에 우성은 어리둥절하다.

"당신들 만나구 있지? 그래서 여기로 온거지?"라고 혜수가 우성을 몰아세운다.


인근 대형마트에서 진경을 보았다는 얘기를 하자 우성은 어느새  두눈을 껌벅이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설마..."하고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러니까 가자 이사. 나 두번은 그 꼴 못본다"라며 혜수는 인근 부동산에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그녀가 서너군데 중개업소에 집을 내놓은 다음에야 우성은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챈다.

"미쳤어? 설령 그렇다 쳐. 어쩌다 가까이 살게 됐다해도  그렇다고 집을 옮겨? 당신 제정신이야?"라고 그가 악다구니를 써댄다.



진경은 아이 등원을 시키고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아파트 후문 근처의 까페로  향다. 오랜만에 브런치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까페 앞에 이르러 유리문을 미는데 문이 열리질 않았다. 안에서는  연인같은 남녀가 브런치를 먹고 있다. 그런데 문은 열리질 않았다. 자주 오는 까페여서 더더욱 이상하였다. 그래서 진경은 주먹으로 쾅쾅 유리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안의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왜 이러지?


그녀는 온갖 불안한 생각이 몰려들었지만 간신히 정신을 추스리고 다시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자기 동으로 향하는데 저만치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누군가 있었다.

"우리 알죠?"

다가온 여자, 그녀 혜수였다. 진경이 그토록 사랑했던 우성의 아내 혜수...

자기에게 매달려 제발 헤어져달라고 애원하며 눈물을 흘리던 그여자 강혜수였다.

진경은 잔뜩 겁먹은 얼굴이 돼서 어찌할 바를 몰라한다..

"이럴때 반갑다는 말은 좀 그렇죠?"라는 혜수의 입가에는 조롱의 미소가 번져갔다.

진경은 어떻게든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황급히 몸을 돌려 자기 동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땅에서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두발은 콘크리트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있다. 살려줘.....살려주세요! 하고 두손을 허우적대다 그녀는 눈을 떴다.



꿈...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아무리  밀고 두드려도 열리지 않던 브런치 까페가 떠올랐다. 그래, 꿈이었어...그럴리가 없지...하고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오려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을 일으키려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라도 돌려보려고 하였지만 그 자세 그대로 고정된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르자 밖에서 도어락 비번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보니 아이 하원 마중을 나가지 않은게 떠올라 그녀는 다시 한번 몸을 움직이려 하였지만 역시 되질 않았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쪼르륵 아이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집 사람 아닙니다. 그럴리가 없어요"라는 우성의 외침도 아랑곳 않고 형사들은 혜수의 두손에 수갑을 채웠다.

"여보 아니지? 아니라고 말을 해!"

결박된 혜수를 뒤흔들며 우성이 소리쳤다. 그러나 혜수는 흐릿한 눈을 껌벅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형사님들 , 이거 오햅니다. 우리 집사람은 누굴 죽일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라며 그가 눈물이 그렁해서 형사들에게 애원을 하지만 그들은 무정하게 그를 뿌리치고 혜수를  데리고 나갔다.

마트에서 장을 봐서 들어오던 진경을 혜수의 차가 정면으로 달려가 치었다는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 바람에 진경은 꼬박 이틀을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다 숨을 거두었다.


형사들이 혜수를 경찰차에 태우고 단지를 빠져나가는 걸 우두커니 지켜보던  우성은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태연하게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그리고는 불을 붙이려는데 불이 자꾸만 꺼진다. 마치 바람이라도  부는것처럼. 하지만 대기는 온통 비를 머금어 고요하고 둔탁하기만 하였다. 라이터 가스가 바닥났다고 생각한 그가 터덜 터덜 새 라이터를 사러  근처 편의점으로 향할 때였다.

"당신이 그랬잖아"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죽은 진경의 목소리였다.

화들짝 놀란 우성이 주위를 둘러보지만 그 어디에도 진경의 모습은 없었다.

이어서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가까이 오라고 해놓고.."라는 진경의 소리는 에코가 돼서 그의 고막을 강타한다.


우성은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봐 초조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지만 무연의 행인들 뿐이었다.

 혜수가 즐겨먹는 생수에 다량의 환각제를 몰래 넣어 마시게 한 뒤 차를 몰아 진경을 치게 한 장본인이 바로 자신임을 혜수는 절대 경찰에 불 수 없으리라. 그녀는 그 정도로 우성을 사랑했다. 그녀는 결국 정신병동에서 생을 마감할것이고 그리 되면  이 집을  포함한 혜수의 모든 재산은 다 남편인 자기 차지가 된다. 그리고 술김에 가까이 와서 살라고 한번 내뱉은 말에 진짜 덜커덕 이사와버린  진경도 지겹기만 하였다. 자기 삶에 걸리적거리는 두여자가 감쪽같이 사라져준것이 꿈만 같아 신을 믿는다면 감사의 기도라도 올리고 싶다.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곳에 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그 순간, 악! 하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우성의 온이 언제 생겨났는지 모를 깊은 맨홀속으로 빠져버렸다.



길은 매끄럽게 포장돼 있었고 맨홀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행인들은 한 남자가 땅바닥에 거품을 물고 눈을 뜬채 죽어있는걸 보면서 저마다 이런저런 추측을 해댔다...대부분이 어깨너머로 힐끔거리곤 그냥들 갔지만 아파트 단지에서 한두번이라도 그를 마주친 사람들은 그래도 안됐다는 듯이 끌끌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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