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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Apr 06. 2024

두번째 약속

"이제 널 위해 살게"

"치 거짓말..."

이라고 하면서 서로를 안았던 신혼여행이 끝나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 민석은  손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배고프니 밥차려라"부터 시작해서 "침대는 왜 큰걸 사서.. 혼자 잔 지 한참 됐으니 작은걸로 두개 놔라"등 그의 위압적인 잔소리며 요구는  끊이질 않았다.

이러려고 내가 재혼이란걸 했나, 은혜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자기가 좋아 한 결혼이라  딱히 다른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할수도 불평을 늘어놓을수도 없었다.



민석은 초혼에 실패하고 10년 넘게 회사 근처 오피스텔에서 혼자 지내왔다. 그의 말에 의하면 두어번 선도 보고 연애도 해봤지만 결국 여자들이 원하는건 경제적 의지처를 구한다는 것이어서 매번 결혼에 이르지 못하고 심지어는 악다구니를 써가며 헤어졌다고 했다.

그러다 은혜를 만난 것이다. 은혜는 전남편이 남긴 유산으로 풍족하게 살고 있어 굳이 돈을 목적으로 재혼할 이유도 없었고 딱히 남자가 그립지도 않았다. 해서 처음 민석이 접근해올때도 시큰둥하게 반응했고 그것이 민석을 더더욱  몸달게 하였다. 민석은 매사에 그녀를 챙겼고 심지어 그녀가 맹장으로 일주일간 입원했을때 휴가를 내고 내내 그녀 곁을 지키기까지 하였다.


둘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말린건 친구 미여이었다.

"그냥 연애만 해. 뭐할러 결혼을...그사람, 딴데 마음있는지 누가 알어?"라며 미영은 자신의 전남편을 떠올리며 또다시 이를 갈았다. 결혼하자마자 회사를 그만두고는 미영을 외벌이시킨 것도 모자라 '일좀 하라'고 하면 '다 귀찮아'하면서 손사래를 쳤던 그 남편때문에 미영은 안해본 일 없이 다 해야 했다. 다니던 회사에서는 나이가  들자 퇴사 압력을 넣었고 그렇게 회사를 나온 미영은 학원 강사, 까페 아르바이트, 식당 서빙등 할수 있는건 죄다 했다. 그렇게 돈을 벌어다주면  전남편은 외도를 하고 친구와 동업하다 망하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10년 결혼생활에 지친 미영이 먼저 이혼얘기를 꺼냈고 남자는  완강히  버텼지만 결국 미영이 손목을 긋자 백기를 들었다.

이렇게 남자에게 크게 당한 미영으로서는 '돈많은 과부'로 살면서 간간이 데이트 정도나 하면서 사는게 훨씬 낫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돈은 남자도 있어"라고 은혜가 말하자 미영은 "그건 모른다. 너만큼 있는건 아니잖아"라며 미영은 한사코 말렸지만 결국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오던날  민석이 내민 청혼 반지를 약지에 끼고 말았다. 이어진 혼인신고,


신혼여행이 끝나자마자 돌변한 민석의 가부장적 이기적 행태에 은혜는 아차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지만 그 정도로 이혼을 할 만큼 강단이 있는건 아니어서 어떻게든 민석의 요구며 비위를 맞춰야겠다 생각하고 그만큼 노력을 하였다. 그러면 민석은 금방 또 풀어져 은혜를 포근히 안아주었다. 처음엔 그런 그의 품이 아늑했지만 언제부턴가 은혜는 자신이 마치 '애완견'이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어렵게 결심한 재혼인데 남보란듯이 잘 살고 싶은게 은혜의 속내였다.


"애를 데려와야겠어"

어느날 저녁을 먹던 민석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이말에 은혜는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물을 건네주며 "이젠 당신 애기도 하잖아"라는 말이 여간 어거지로 들리지 않았지만 자초지종은 들어야 할거 같아서 " 왜...애 엄마한테 무슨 일 있어?"라고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물었다.

"그쪽도 재혼하나봐. 근데 남자가....애는 두고 오라고 한대나봐. 주제에  총각한테 간다고 하드라구"하면서 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얼굴이 된다는 자체가 아직도 전처에게 미련이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돼 은혜는 기분이 상했지만 그또한 내색하지 않고 "애가 불편해하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레 말햇다.

"그래봐야 아직 사춘기야. 부모 손길이 필요하지 "하고 그는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전처와 살던  아들 혁을 무작정 데리고 들어섰다. 은혜가 동의한것도 아닌데 그는 그렇게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했다.

그때부터 은혜는 집에  왕 둘을 모시고 사는 꼴이 되었다. 혁은 외양부터 민석을 꼭 빼닮았고 식성, 말하는 투, 어림에도 징글징글할 만큼 가부장적이고 이기적이었다.

"아줌마, 이거 설겆이 한거 맞아요?"라며 아침 밥상에서 자신의 밥공기를 들어보일때 은혜는 이 결혼이 더이상 불가능하다는걸 인정해야했다.

그리고는 민석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민석은 두번 이혼은 절대 안한다며 그녀의 말을 묵살하였다.


"거봐. 하지 말라고 했잖아"라며 전화너머 미영은 이 사태를 예견했다는듯이 끌끌 혀를 찼다

"나, 니집에 며칠 가있어도 돼?"라고 은혜가 말하자 "너무 오래는 안되고"라며 딱 선을 그었다.


그렇게 미영의 아파트에서 지낸지 일주일이 되자 밤늦게 민석이 아파트 앞이라며 전화를 걸어왔다. 초봄이라 밤엔 아직 쌀쌀해서 그녀는 카디간을 걸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어떻게든 오늘은 이혼이야기를 마무리짓겠다 마음 먹고.

그렇게 마주한 민석은 "잘 있었어?"라며 예전 연애시절의 다정함을 보였다. 순간 은혜의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와 계속 갈수는 없다고 애써 다짐을 하였다.

"헤어져 우리. 나도 언제까지 미영이한테 신세질수도 없는거고. 집으로 가고 싶어"

"들어와. 당신집이잖아. 우리 집"

"아니. 나 혼자 살고싶어"

그말에 민석은 만만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담배를 한대 피우기 시작햇다. 그렇게 담배 피우는 그의 모습에 은혜는 잠깐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자신의 완전한 동의도 없이 아들 혁을 데리고 온것만은 양보할수가 없었다. 거기에 두 부자에게 당해야 했던 하대와 무시를 떠올리면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그러면 당신 좋을대로 해"라며 담배를 발로 눌러끄며 민석이 입을 열었다. 그말에 은혜는 잠시 아득해졌지만 애써 정신을 부여잡고 "해 이혼"이라며 갈무리 하였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에 민석은 법원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렇게 둘의 이혼은 유야무야가 됐고 어느날부턴가 은혜는 다시 두 부자의 시중을 드느라 여념이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더이상 절친인 미영에게 하소연하기도 부끄럽고 자존심 상해 그녀는 모든 모욕감과 억울함을 속으로 삭혔다.


"이거 아줌마 꺼"라며 혁이 어느날 학원에서 돌아오며 샀다는 노점 머리핀을 받아들던 순간 은혜는 살짝 그린라이트를 예감하기도 하였지만 이어서 " 내 그릇은 두번씩 씻어요"라고 이어진 말엔 화가 차밀었다. 그리고 그날밤 유난스레 자신의 몸을 탐하는 민석이 마치 섹스만을 목적으로 자신을 유혹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는 한달후 그녀는 여의사로부터 임신이 맞다는 얘길 들었다. .아이까지 생겼으니 민석과 헤어지는건 더더욱 힘들게 생겼다는 절망과 이렇게나마 갈등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은혜를 위감았다.


은혜의 임신소식을 들은 민석은 못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 나이가 있는데"라며 그가 의뭉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내가 바람이라도 폈다는거야?"라고 은혜가 발끈하자 "그게 아니고...암튼, 잘 됐네"라며 민석은 마지못해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그날저녁 퇴근길에 잔뜩 꽃을 사들고 들어오기도 하였다. 그래, 세상에 별남자 있겠냐 싶어 은혜는 불러오는 배를 매만지며 생애 첫 임신의 설렘을 누리고자 하였다.


"나 동생 싫어. 것도 이복은 더더욱"이라는 혁의 말을 들은건 은혜가 혁에게 줄 야식을 들고 그의 방으로 향할때였다. 이미 가진 애를, 이렇게 불러온 배를 어쩌라고 저럴까,하며 은혜는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는 방문을 열어젖히자 "당신 노크 할줄 몰라?"라며 민석이 타박을 하였다.

"니가 싫음...니가 싫음 이 애 낳지 마?"라며 은혜가 혁을 나무라자 혁은 빤히 보더니 점퍼를 집어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말이 아니잖아. 혁이도 아직 애야. 어린애라고 "하며 민석이 되도않는 말로 아들 혁을 방어하는 데는 은혜도 더 이상 참을수가 없어 "이혼해!"라고 내뱉았다. 그말에 민석의 두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너 진심이야? 애 혼자 키울수 있어?"라며 으름짱을 놓았다. 순간 그녀는 움찔했다. 초혼도 아닌 재혼에서 낳은 아이를 아빠 없이 키운다는게 어딘가 심하게  '망가진' 느낌을 주었다.

은혜는 더이상 말을 않고 그날밤 손님방에서 홀로 잠을 잤다.


그리고는 다음날 일어나서 그녀가 발견한건 민석이 혁과 자신의 옷가지며 소지품을 캐리어 서너개에 쓸어담고 있는 것이었다.

"뭐하는 거야"

"우리 시간을 갖자"라며 그가 볼멘 소리를 하였다. 밤새 떨어져 자는 동안 은혜가 한 생각은 그래도 어떻게든 이 갈등을 봉합하고 애낳고 남들처럼 잘 사는 것이었는데 민석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럴수 있는거야 나한테?"라며 은혜가 그를 저지하자 "그럼 나랑 잘 하든가! 토달지 말고!"라며 그가 소리쳤다.

이래서 재혼이 초혼보다 더 어렵다고 하는거구나....그녀는 그제야  실감했다.

순간, 뱃속에서 아이의 태동이 느껴졌다.

"여보..애가...애가..."라고 하자 짐을 꾸리던 민석의 손이 멈췄다.

"왜...안좋아?"

"애가 발로 ..."하며 은혜가 민석의 손을 자기 배에 갖다댔다.

그렇게 둘이 나란히 아이의 태동을 느끼는 동안 서로의 눈도 맞추고 희미하나마 미소도 교환한거 같다.

"혁이는 내가 설득시켜볼게"라며 민석이 싸던 짐을 다시 풀기 시작했다.

"나도 혁이한테 잘할게..."라는 은혜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그렁했다.



"딸이라면서요"하며 혁이  사왔다는 이쁜 아기 신발을 받아들자 은혜는 가슴벅찬 무언가가 자신의 온몸을 휘감는게 느껴졌다.

"이제부터 니  밥그릇은 꼭 두번씩 씻을게"라고 하자 "아줌마가 식모예요? 그냥 해본 말이지"하고 혁은 구시렁대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문은 닫지 않았다.

"샤워해야지"

"알아서 해요"라며 혁이 불퉁하게 받아치고 욕실로 들어간 뒤 은혜는 욕실문을 살그머니 닫아주면서 오늘 저녁은 두 부자가 좋아하는  샤브샤브를 해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는 지난번 먹다 남은 고기를 꺼내기 위해 낭장고문을 여는데 살짝 정전기가 일었다. 그 따갑고 매서운 느낌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잡이에서 손을 뗐지만 잠시후 다시 조심스레 손잡이를 잡았다. 이번엔 정전기가 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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