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인정이예요"라는 전화너머 자신을 밝히는 여자의 목소리를 은원은 한참 기억해내야 했다....인정....인정...아, 그 강인정.
10년도 더 지난 시절의 그 인연이 아스라히 떠올랐다. 은원은 반가움보다는 그 시절 그닥 친분도 없던 그녀가 어떻게 자기를 기억해내고 전화까지 알아냈는지가 궁금했지만 그래도 옛동료였기에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에 반가운듯 받아주었다.
"아 인정씨...결혼은 했구?"라는 은원의 질문에 상대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저기..오랜만인데 이런말하기..돈좀 있어요?"라며 인정은 10년만에 연락이 닿은 은원에게 돈이야기를 꺼냈다
이 여자 뭔가,라는 생각에 은원은 곧바로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비록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어도 인정이 솜씨있게 타다 준 커피를 여러번 얻어 마신 기억이 스쳐 차마 그럴수가 없었다
"돈...나도 빠듯하게 살아요"
"그죠? 미안했어요" 인정이 전화를 끊을 태세다.
"밥한번 먹어요"라고 은원이 으레 하는 말을 하자 저쪽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을 하며 "제가 밥 살게요"라고 했다. 돈을 꿔달라고 하면서 밥을 산다는 건 뭔지...
그 주말, 은원은 인정을 만나러 도심으로 향했다. 혹시나 도심 집회라도 걸리면 안된다는 생각에 조마조마했지만 도심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그렇게 커다란 아트홀 옆 s까페에서 둘은 마주했고 인정은 10년전과 별로 달라진것 없어 여전히 청초하고 조금은 파리해보이기도 하였다. 저여자가 연애를 했었어...라는 생각이 은원을 스쳐갔다.
인정은 같은 편집부 기자 a와 조용한 사내 연애를 하였다. 수줍음이 많고 숫기가 없어 그런 일 따위는 못할 거 같아 보였지만 인정은 분명a 와 사귀고 있었고 둘다 나이도 있고 하니 조만간 결혼하려니 다들 그렇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은원도 출판사를 나와 알음알음 방송일을 하게 되었다.
퇴사도 제각각 시기가 달랐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말고 할것도 없이 그렇게 서로가 과거의 사람들이 돼버린게 10년이다. 그런데 그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인정이 연락을 해온것이다. 그것도 돈얘기를 꺼내면서.
괜히 이 자리에 나왔나 하는 후회가 일었지만 은원은 자리를 물릴수도 없고 솔직히 반가운 마음도 들어 인정을 따라 나란히 레몬에이드를 주문해 마시기 시작했다.
"올 여름도 한 더위 할거 같아요 그죠?"
은원이 에이드를 한모금 마시고 말을 하자
"미안해요. 오랜만인에 돈얘기를 해서"라며 인정은 본론으로 들어갈 태세다.
"결혼은, 했어요? 그분이랑?"라며 은원이 a를 언급했지만 인정은 배시시 웃고 만다. 아, 안됐나보다...하는데
"안그래도 우리 은원씨 얘기 자주 해요"라고 그녀가 말을 받았다.
그럼 a와 여태 결혼은 안하고 여전히 연애 상태라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자 은원은 더더욱 궁금해졌다.
"왜 결혼은?"
"저기...한 1000만 안될까요? 여기저기서 빌리고는 있는데"라며 인정이 목이 마른듯 자신의 잔을 비우 다급하게 물었다
돈 1000 정도의 여윳돈은 은원에게 있었지만 이런식으로 10년동안 연락 한번 없던 사이에 건너갈 액수는 아니라는 판단이 서자 은원은 괜히 이 자리에 나왔다는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할게요. 그 정도는 있긴 한데.."
"제가 좀 염치가 없죠? 사실 우리가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어디, 쓸건지 물어봐도 돼요?"
"그 사람 사업이 어려워요. 그림 수입하는 일을 하는데 그게 요즘 영..."하며 그녀가 자신의 빈 잔을 두손으로 감쌌다.
여태 결혼도 안했으면서 남자의 사업 자금을 대고 있다는게 은원은 어딘가 석연치가 않았다.
은원은 당장 그 돈이 있다 없다 말한다는게 내키지 않아 "구해볼게요"라고 하고는 인정과 헤어져 도심을 걸었다. 초여름이었지만 지열이 느껴졌고 여간 더운 날씨가 아니었다. 계속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아가며 전철역까지 갔을때, 누군가 뒤따라 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자 인정이 울상이 다돼서 여태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급하긴 급한가 보구나...
둘은, 다시 b여행사 1층의 까페로 들어가 마주 앉았다.
"1000이 어려우면 그 반이라도"라고 말하던 인정이 갑자기 두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인정을 보고 있자니 은원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줄게요 1000"이라는 말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왔고 은원은 곧이어 후회를 하였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라 주워담을 수도 없었다. 그말에 인정이 흐느낌을 멈추더니 한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 사람 결혼했어요"라는 인정의 말에 은원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둔탁하게 테이블에 놓아버렸다.
"그러더라고요..."
"무슨 말예요?"
"퇴사하고 그 사람은 대학선배가 하는 인터넷신문으로 들어갔어요. 저는 신촌에서 작게 악세사리 샵 하는 아는 언니 밑에서 일했는데... 퇴근하면 매일같이 그가 왔어요. 내가 퇴근할때까지 일을 거들고 셔터를 내려주고 같이 늦은 저녁을 먹고...."
"..."
"그러다 일주일 해외출장이 잡혔다고 했어요. 그리고는 일주일을 만나지 못했는데 그때 결혼을 했어요..."
"세상에..나쁜 자식"이라고 은원이 발끈하자 "그러지 말아요"라며 그녀가 강하게 a의 쉴드를 쳤다.
"그런 남자 돈을 왜 구하러 다녀요 인정씨가? 인정씨 바보예요?"
"집안에서 강제로 시킨 결혼이래요"
"그말을 믿어요? 인정씨한테는 출장간다고 해놓고 다른 여자랑..."
"돈은 갚을게요"라는 인정의 갈무리에 은원은 더이상 자신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걸 알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돈 1000을 인정의 계좌로 이체하고 "꼭 갚아 주세요"라는 말을 하고 먼저 까페를 나섰다. 도심거리엔 어둠이 내렸고 줄지어 서있는 가로동에도 불이 다 들어와 있었다. 인정의 사랑, 저런걸 사랑이라 불러도 되는건가, 라는 생각에 은원은 허탈해져 무작정 걷고 싶어졌다.
이후 인정에게서는 연락이 없었고 돈을 갚기로 한 시기가 돼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은원은 힘들게 돈 1000을 단념하였다. 그리고 그 돈을 계속 신경 쓸수도 없었던게 힘들게 미니 시리즈를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또 흘렀다.
다시 인정의 전화를 받은건 마지막 회차 원고를 넘기고 오랜만에 깊은잠에 빠졌을때다. 꿈결에 울린 전화벨에 은원은 원고수정을 요하는 pd의 전환거 같아 짜증이 일었지만 발신자를 보고는 헉, 하고 숨이 멎는것만 같았다. 인정의 전화였다. 1년만에 , 것도 돈을 돌려주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녀가 전화를 해왔다는게 너무나 뻔뻔스럽게 여겨져서 그녀는 전화를 무음처리하고 받지 않았다. 그리고는 종일 잠의 늪에 빠져버렸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전화를 열어보자 인정에게 걸려온 부재 전화가 여러통 있었고 그중에 음성을 남긴게 있어 그녀는 가물거리는 소리샘 비밀번호를 기억해 인정의 메시지를 들었다
"죄송해요. 약속 지키지 못해서...그때쯤 호주 거래처에서 돈이 들어오기로 돼있었는데 그게 좀 꼬여버려서...그래도 전화는 드렸어야 하는데, 그렇게 양해를 구했어야 하는데"라며 인정은 호소하듯 장문의 음성 메시질를 남겼다.
그녀의 변명같은 긴 메시지를 다 듣고 있을 필요가 없어져 은원은 중간에 끊어버렸다. 그러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의 은행앱을 열어봤다. 그 안에 돈 1100만원이 인정으로부터 입금돼있는게 눈에 띄었다. 10%씩이나 이자를 얹어준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은원은 심란해졌다...하지만 일단 돈은 되돌아왔다.. 그것도 포기한 돈이. 이걸로 됐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인정에게 "고맙습니다"라고 정중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고자나 인정의 기구한 연애가 불쌍하게 여겨졌고 도둑장가를 가버린 a가 앞에 있다면 따귀라도 한대 때리고 싶어졌다. 그래놓고도 인정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는게 여간 불쾌한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개인사'였고 자신이 참견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 일은 이걸로 종결짓기로 하고 은원은 읽다만 c의 소설을 마저 읽기로 하였다. 그렇게 파트 4에 들어갔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마도 자신의 '고맙다'는 메시지를 확인한 인정의 전화려니 하고 이번에는 흔쾌히 폰을 집어들었자만 발신자는 인정이 아닌 강인이었다... 헤어진 남자, 그 강인이었다.
"여태 여기 사냐? 니 집 앞이야"라며 강인은 저돌적으로 나왔다.
헤어진 지 한참된 옛남자와 마주 앉는다는게 이런거구나 하는 느낌을 받으며 은원은 조금은 설레는 심정이 되었다.
"결혼 했지?"라는 은원의 말에 그가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안했어 결혼?"
"너 여기 여태 사는거 보니, 결혼 안했구나"라며 그가 냅킨으로 이마의 땀을 닥으며 말을 했다.
헤어진게 언젠데 여태 둘다 싱글이라는 생각에 은원의 가슴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둘이 헤어진것도 다 따지고 보면, 서로 오가는 마음의 질량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여러번의 동침과 여행을 다녀온 사인데도 늘 무덤덤한 강인의 태도에 안달하다 지쳐버린 은원이 고한 이별이었다. "당신 날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을 내뱉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와 헤어진 뒤 은원은 한참을 힘들어했고 일마저 하기가 힘들어 당시 쓰고 있던 라디오일도 그만두었다. 그렇게 실연은 생활고로 이어졌고 뒤늦게 다시 일을 잡아보려 하였지만 그게 쉽지가 않아 오랫동안 힘겹게 살아야 했다.
" 우리, 어디 가서 근사하게 저녁 먹을까?"
라는 강인의 말에 그녀는 마치 청혼이라도 예정된 양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의 차는 지프형의 suv였고 도시적이고 세련된 주인의 취향을 잘 대변해주고 있었다.
"너 이거 좋아했잖아"라며 그가 그녀 대신 라쟈니아를 대신 주문해줄때 그녀는 먹먹한 느낌까지 들었다.
"왜 여태 혼자야? "
"넌 왜 혼자야? 좋다는 놈이 없었어?"라며 강인이 씩 웃었다. 아무리 헤어졌어도,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의 얼굴이며 미소까지 지워지진 않는다는걸 은원은 그와 헤어진 뒤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그런 그가 이제 몇년만에 다시 돌아와 마주앉아 있다는 것이 그녀로선 비현실적이기까지 하였다.
둘이 그릇을 다 비울때쯤 "우리 다시 만나자"라며 강인이 그녀의 한손을 살며시 잡았다. 연애기간에도 그렇게 다정한 제스처를 취하지 않던 그였기에 은원은 잠깐 당황했지만 잡힌 손을 빼진 않았다.
그리고는 그날밤 그녀의 집에서 강인은 전처럼 조금은 과격하게 그러면서도 능숙하게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는 다음날 새벽, 날이 밝기전에 , 가겠다며 서두를때 은원은 알아차릴수밖에 없었다. 그가 결혼했다는 사실을...그녀가 울먹이며 그의 등뒤에서 그를 허그하자 "우리 계속 보는 거지?라며 그가 다짐이라도 받으려는 눈치였다. 그녀는 대답없이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후 강인은 이삼일에 한번씩 그녀를 찾아 그녀를 안았고 또 서둘러 그녀를 떠나갔다...
그가 떠난 뒤 한참을 우두커니 있다가 은원은 불쑥 인정이 떠올랐다.그녀에게 오랜만에 전화라도 걸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의 번호를 검색하는데 액정이 잠시 어두워지더니 이내 강인의 이름이 떴다.
"왜?"
"미안해서 얘기못했는데....너 돈좀 있냐? 한 1억, 안될까? 이사를 해야 하는데 딱 1억이 비네"라는 그의 말에 은원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만 같다. 하지만 이어서 나온말은 자신이 전혀 예상못한 것이었다.
"집 잡히면 1억은 될거야"라는 말에 강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어떻게든 갚아. 나 믿지?"라고 한다.
그가 먼저 전화를 끊고난뒤 은원은 ' 그 한마디'를 듣지 못했다는게 떠올랐다. 해서 다시 강인에게 전화해서 물었다.
"나, 사랑하지?"
"..."
"아냐? 그런거 아냐?"
"뭘 물어. 일일이 대답을 해야 해?"라며 그가 칭얼대는 아이 나무라듯 한다.
그렇게 통화를 끝내고 그녀는 샤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자기 집을 잡히고 받는 돈이라 해도 후줄근해서 좋을건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조금전 강인의 손이 스쳐간 몸 구석구석을 꼼꼼히 닦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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