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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Jun 01. 2024

멀리서 돌아온 남자

정인은 호승이 과연 이삿날 올까 그게 궁금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연인이었던 둘이었지만 그에게 오랜 연인이 따로 있다는걸 알고는 헤어졌기에, 그전에 했던 약속, 즉, 이삿날 와주기로 한게 지켜질지 장담할수가 없었다.

'그래. 니 의심대로 여자가 있긴 한데 정리중이야'라던 그의 말이 너무도 모호하고 원망스러워서 그녀는 그의 뺨이라도 후려 갈기고 싶은걸 간신히 참고 까페를 뛰쳐나왔다.


케이블 tv작가와 pd로 만나 어언 3년의 연애를 거쳐 이제 남은건 결혼뿐이라는 생각에 양가 인사도 다니고 친구들에게도 다 알렸는데 딱 하나, 그가 한달에 한번씩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남도로 가는게 마음에 걸렸고 그걸 추궁한 끝에 결국 따로 여자가 있다는걸 정인은 알게 되었다.


호승과는 초등동창인 '그녀는 남도에서 허름한 구멍가게를 하며 죽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어린 딸을 홀로 키우고 있고 그걸 애틋하게 지켜본 호승이  자신의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송금하고 한달에 한번씩 모녀를 보러 간다는걸 알고 처음에 정인이 따져 물었을땐 "안돼서"라고 대답했지만 그냥 어릴적 동창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아닌걸 깩닫고 정인이 결별을 통보하자 그제야 그는 뒤늦게 커밍아웃을 했다. 자기 여자라고...



그즈음, 정인은 보증금을 올려달라는 집주인에게 이사한다고 이미 고지해서 무를수도 없었고 올려달라는 액수가 너무 커서 대출을 받기 전에는 어림도 없었다. 

그런 정인에게 호승은 자기만 믿고 이사하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며칠후 둘은 갈라진 것이다. 

정인의 상상속 세사람, 그러니까 호승과 '그녀', 그녀의 이린딸은 남도의 눈부신 햇살과 윤슬이 일렁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너무도 행복한 한폭의 그림이어서 정인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느꼈고 그것이 결국은 호승과의 줄을 놓게 만들었다.


안오면 혼자 하지 뭐, 라면서도 그녀는 혹시나 마음을 접을수 없었고 다른 누군가에게 부탁하기도 싫었다. 사실, 이삿짐이라고 해봐야 혼자 살아온 여자니 그리 많지도 않았지만 다만 책이 문제였다. 원래 소설가를 꿈꾸었던 그녀이기에 방하나를 다 채우고 거실까지 침범한 책장 가득 책이 겹겹이 채워져있어서 처음 이삿짐 견적을 내러온 업자는 "책 절반 버리지 않으면 이사 안해줘요!""라고 협박아닌 협박까지 했었다. 안그래도 이사때 한번씩 짐정리를 한다는 생각에 이번엔 상당량의 책을 처분하고 갈 생각이었던지라 정인은 묵묵히 알았다고 대답했고 일주일에 걸쳐 책을 내다 버렸다.  그중엔 고백문학의 진수를 보여준 도스또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포함해 북유럽 정취를 아스라히 그려낸 헤닝 만켈의 <이탈리아 구두>도 포함돼있어 그 두 권을 손에 들고는 이걸 어쩌다 한참 고민을 하였지만 결국, 한번 읽은건 다시 읽지 않을거라는 생각에 과감히 버렸다.


"야, 책 다 버리지 마. 그러려면 나 줘"라던 호승의 말이 떠올랐지만 안그래도 호승도 책이 많은데 더 늘어나게 되는거라 그녀는 기어코 버리는 쪽을 선택했다.

그렇게 책정리를 하고 자잘한 구식 오디오까지 중고처리를 하고나니 짐이 한결 줄어들었고 이제 이사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호승과의 결별이라는 악재가 터진것이었다. 끝까지 '그녀'와는 '친구'일뿐이라고 우겨대지, 왜 하필 마지막 순간 '내 여자'라고 했을까, 하며 호승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지만 헤어질거, 이렇게 정을 다 떼고 갈라서는게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삿짐센터는 약속한것보다 30분이나 일찍 와서 세수중이던 정인이 다급하게 문을 열어주었다.

"천천히 하세요"하며 이삿짐 센터 사장은 자기가 명?한대로 책이 버려졌는지부터 확인하더니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고생했겠어요"라며 그가 씩 웃을때 정인은 얄밉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한시간여 포장이사가 진행되고 정인도 얼추 자기가 챙겨야 하는 짐을 챙길 즈음 밖에 사다리차가 왔다는 업체 사장의 말이 들려왔다. 호승은 역시 오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에 정인은 우울감이 깊어지고 이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이미  옷장 하나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중이어서 멈추라고 할수도 없었다. 

그렇게 이삿짐의 반 가까이가 내려갈 때까지 호승은 나타나지 않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라도 해볼까 하다가도 차마 발신버튼을 누를수가 없었다.


결국, 호승없이 이삿짐이  다 부려지고 자잘한 짐만 남긴 상태에서 정인은 텅빈 집을 비질을 하며 마지막 청소를 해주었다. 그래도 4년을 살아온 집이어서 비록 남의 집이나마 있는대로 정이 들었고 호승과 함게 한 시간들이 있었기에 이집과의 이별이 만만치가 않았다.


"야, 누가 이사가면서 비질을 하냐"라는 호승의 소리에 그녀는 하던 비질을 멈추고 그자리에 얼어붙었다. 차마 옆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가 다가오자 그녀의 가슴이 쿵광거리기 시작했다. 헤어지기전 약속을 이렇게라도 지켜준 그가 고마우면서도 원망스러웠다. 이럼 정이 다 떼지지가 않잖아....

호승은 다가와서 그녀의 손에서 빗자루를 빼내고 "짐 다 나간거지?"라고 했다.

정인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왔어.."

"오기로 했잖아"

"안와도 되는데"

하는  그녀를 호승이 포근히 품에 안아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호승은 정인의 새 집, 그러니까 경기도와 인접한 외곽을 향해 빠르게 차를 몰았다.

"잘 지내지 그쪽하고?"

"..."

"거기...남도"

"난 또..."

라며 그가 말끝을 흐리자 정인은 괜히 '그녀'를 언급했다는 후회가 치밀어올랐다. 왜 그랬을까...자신이 한심하기만 했다.

"고마워 오늘 와줘서"

"약속이잖아...내가 일자리 알아볼까?"

방송국에서 작가라는 프리랜서는 언제든 잘릴수 있는 존재고 프로그램이 폐지되면 동시에 놀게 되는 '대책없는'직업인지라 지금 정인은 놀고 있었다. 한동안 잘 나가던 예능 프로의 메인작가였지만 언제부턴가 시청률이 하강곡선을 그리자 슬슬 폐지론이 돌기 시작했고 드디어 개편때도 아닌데 폐지통보를 받고 실업자가 돼버렸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하기사..너 글 잘 쓰고 사람들하고도 잘 어울리니까 어디 가서든"

그리고는 다시 서로 침묵이 이어졌다.

무슨 할말이 있을까...이미 헤어진 사람들이.



그러고 있는데 저만치 먼저 와있는 정인의 이삿짐 트럭이 눈에 보이고 낯선 단지가 그 뒤로 펼쳐졌다.

"너 차 한대 사야겠다. 여긴 도심에서 멀어서"

"괜찮아. 버스로 좀 나가면 지하철 있어"

"너 지하로 다니는거 싫어하잖아"

그렇게 자신에 대해 세세히 알고 기억하면서 결국 선택은 '그녀'를 했다는게 정인은 믿기지도 이해가 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또 그 애기를 끄집어낼수도 없었다.

"짐 다 올라오면 가"

"..."

"와준건 고맙고"하고는 그녀는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뒤따라 호승도 차에서 내렸다.

그때 그쪽 부동산에서 전화가 와서 정인은 현장을 호승에게 맡기고 자긴 부동산으로 향했다. 

부동산에서 잔금을 치르고 이것저것 정리차원의 돈이 오간 뒤 도어락 비밀번호를 받고 나오는데 하나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삿날 비오면 잘 산대요!"라면서 부동산 사장이 뒤에서 너스레를 떨었다.


어쩌면 그동안 호승이 가버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정인은 불안한 마음이 돼서 비를 맞으며 허겁지겁 단지로 돌아왔다.

예감대로 호승은 자리에 없었다. 인부들만이 부지런히 사다리에 짐을 실어 올리고 있었다. 호승이 집안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정인은 헐떡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1층에서 문이 열리는데 활짝 열린 자기집 현관이 눈에 들어오며 그 안에서 열심히 비질을 하고 있는 호승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비질하면 복 달아난다며"하고 그녀가 다가가서 툴툴대자

"야 , 쓰레기 위에 그냥 짐 놓을거야?"라며 되레 그가 타박을 하였다.

인부들이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잔금을 다 받고나자 호승이 호기롭에 5만원권 두장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다 드렸어"하고 정인이 속삭였지만 호승의 돈은 기어코 인부들에게 건너갔다.

그들이 다 나가자 호승이 현관문을 닫으며 "야박하게...이삿짐부리는게  쉽겠어 너라면?"하고는 그녀를 나무랐다. 

그리고는 대강이나마 놓여진 가구며 집기들을 일별하더니

"내방은 어디야?"하고 난데 없이 물어왔다.

"자기방? 우리 이미"

하는데 그가 정인에게 바싹 다가왔다.

"어젯밤에 내려가서 정리하고 왔어. 홀가분하게 너한테 오려고. 그래서 오늘 좀 늦은거고"

호승의 이 말이 정인은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한 여잔데...그게 되든?"

"힘들었어. 하지만....너를 놓을수도 없었어. 두 여자랑  살수는 없잖아. 다시 나 받아줄래? 아니, 결혼할래 우리?"

"...진심이야?"

"그동안 속 타게 해서 미안. 이젠 안그래. 정말 잘할게"라며 그가 살며시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때 요란하게 초인종이 울려 둘은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정인이 현관문을 열자 조금전 나간 인부중 하나가

"저기, 혹시 공구가방 놓고 갔나 해서요"하며 머리를 쓱쓱 문질렀다.

"잠시만요"하고 정인이 여기저기 돌아보는데

"여깄네요"하는 호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건 인부들의 공구가방을 발견한 그걸 인부에게 되돌려주는 그의 모습이  의젓하고 당당해보였다. 이제 이 남자에게 의지해 살면 된다는 생각에 정인은 낯선 새집이  조금은 정겹게 와 닿았다.

"야, 이삿날인데 자장면 시켜먹자"는 호승의 말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배달앱을 뒤적였다.

그리고는 15분후 자장면 2인분이 배달됐다.

"촌이라도 배달이 되네"하며 호승은 신기해하며 입가에 온통 소스를 묻혀가며 자장면을 열심히 먹어댔다. 그런 호승의 입가를 냅킨으로 닦아주며 정인은 앞으로도 자주 자장면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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