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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Jun 07. 2024

환한 어둠

현주는 갑자기 스케줄 변동이 생겼노라 집들이에 올수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소은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딱 하나 불렀고 그 대상이 못온다고 하니 우울해졌다.

"할수 없지 뭐. 다음에 너 편할 때 와"라고 답문을 보내고 소은은 한상 가득 차려놓은 음식을 쳐다본다. 편히 먹으라고 일부러 앉은뱅이 상차림을 했는데 이게 다 쓸모가 없어졌다... 몇가지는 냉동실에 넣어도 되지만, 나물류는 금방 먹어치워야 한다. 현주가 유난스레 나물을 좋아해서 이것저것 무쳐놓은게 한 가득이다...


소은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주방서랍을 열고 양푼을 꺼내고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로 한다. 나물 무친 걸 덜어서 양푼에 쏟아붓고 밥을 한주걱 넣고 들기름을 살짝, 그리고는 고추장을 반스푼 넣어 비벼댄다. 제법 그럴듯한 비빔밥이 되었고 그녀는 허기진 위장을 달래듯 꼭꼭 씹어 넘긴다.


이번 이사전에 그래도 찾아와서 짐싸기를 거들어준건 현주 하나였다. 정말 막역하다 여긴 친구들은 그저  인사치레를 할뿐 누구하나 찾지 않았지만 서른무렵 회사동료였던 현주가 그나마 찾아주었다. 그녀는 아예 자고 갈 양으로 잠옷까지 챙겨와서는 두팔을 걷어부치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포장이사 취소해. 내가 다 싸줄테니까"라며 그녀느 너스레를 떨기까지 하였다.

한참 둘이 짐을 싸는데 어느 뱃속에선가 허기진 소리가 들려와 둘은 까르륵 웃었고 나란히 집앞 고깃집에 나가 삼결살을 구워 소주반병을 함께 비웠다.

"다신 사내놈한테 돈 주지 마. "

현주가 살짝 눈을 흘기며 핀잔을 주었다.

동현....

그의 사업자금으로 대준 돈이 회수되지 않고 뒤늦게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까지 알고는 결별, 그 때문에 생활이 어려워져 헐값에  집을 팔아버린 내막을 현주는 잘 알고 있었다.

"알았어. 미안 "

현주에게 미안해할 일은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소은은 그리 말을 내뱉았다.

"이제 내 허락맡고 연애해!"라며 현주는 소주잔을 비웠다.

"내가 집들이 근사하게 할게"라는 소은의 말에 현주는 이미 술이 불콰하게 올라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 다음날 현주는 소은의 집에서 나가며 돈봉투를 내밀었다.

"뭐야 이게?"

"이사에 보태라고. 얼마 안돼"

"넣어둬"하면서 소은이 현주의 주머니에 봉투를 꽂으려 하자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미안해. 고마웠고"라는 소은의 말이 끝나갈 즈음 기계 문은 닫히고 빠르게 하강했다.

이사하라고 돈을 건네준 친구는 현주가 처음이었다. 나중에 열어보니 30이 들어있어 소은은 민망하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이사 전날 전화까지 걸어와서 "내가 정말 안가도 돼? 출장만 아니면 가는건데"라며 미안해 하기까지 했다.


둘은 작은 출판사에서 만났고 소은은 재직하며 쓴 글이 모 문예지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걸었고 현주는 1인 출판을 내서 제법 돈을 벌었다. 쉽게 풀어쓴 철학서가 공전의 히트를 치며 후속작도 잇따라 선방했고 그덕에 현주는 시내에 월세를 얻어 직원 둘을 거느린 어엿한 오너가 되었다.

"니 첫 소설은 무조건 내가 내는거다?"

소은이 보낸  개업축하 화분을 받아들고 현주가 전화를 걸어와 내뱉은 말이 그랬다. 하지만 그당시 소은은 정작 써야 할 소설은 쓰지 못하고 동현의 또다른 여자의 존재때문에 애면글면 속을 태우던 시기여서 "당연하지.."하고 얼버무릴수 밖에 없었고 결국 그 소설은 미완으로 끝났고 생활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결국엔 집을 ...이라는 생각에 이르고나자, 그 헛헛했던 동현과의 연애가 아득한 옛이야기처럼 반추되었다. 그리고는 잊기로 하였다.



남은 음식을 랩으로 씌우고 용기에 담아 냉동실에 쑤셔넣고 나니 벌써 바깥엔 어둠이 내리고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밤 9시나 돼야 어두워지던 하늘이 이제는 제법 일찍 검은장막을 드리웠다. 여름은 간 걸까 그렇게...

앉은뱅이 테이블을 다시 접어 주방 귀퉁이에 세우고나니 나른한 포만감과 함께 피곤함이 몰려왔다.

소은이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간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현주가 왔나?

"현주니"하며 그녀는 맨발로 현관으로 달려갔지만 문밖에는 초로의 경비원이 서있었다.

"오늘 이사오셨죠?"

"네.."

"혹시 버리실거 있으면 금요일 오전 6시부터 10시 사이에 버리심 돼요"

"아...알겠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소은의 눈에 경비원의 한손에 들린 해머가 들어와 그녀는 섬찟했다. 그걸 눈치챈 경비원은 "혹시 못박아 드릴거 있나 해서..."라며 씩 웃었다.

여자 혼자 이사온게 안돼 보였는지 그는 그렇게 호의를 나타냈지만 웬만하면 집에 못을 박지 않는 소은은 '고맙지만 됐다'고 사양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이 정도면, 비록  외곽이어도 이사는 잘 왔다 싶다. 어차피 지난번 집은 동현과의 기억이 너무 많아 더 살라고 해도 살지 못했을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허탈해하며 이제는 정말 샤워를 해야겠다 마음먹고 다시 욕실로 향하는데, 이번엔 인터폰이 울렸다.

"누구라구요?"

"나야 동현이"

인터폰 너머에서 자신을 동현이라 밝히는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는 너무도 낯설었다. 물론 동현의 목소리였지만 한번도 들어본적 없는 그런 낯섦이 묻어났다

"아가씨 아는 분 맞아요?"

 조금전 그 경비원의 말이 이어졌고 소은은 대답을 할수가 없어 잠자코 있다가 "아뇨, 모르는 사람이예요"하고는 인터폰을 끊었다. 그렇게 한참을 우두커니 있다 그녀는 후다닥 거실 발코니로 달려갔다. 그녀가 바깥으로 시선을 던지자 눈에 익은 흰색 suv가 서서히 단지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이곳으로 이사온걸...

그의 여자와는 헤어진걸까? 왜 온걸까? 무슨 얘기를 하려고 온걸까? ...


그녀는 마음이 복잡해져 간단히 세수만 하고 침대에 들었다. 그러자 주책맞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동현과의 연애 내내 그녀는 늘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그가 볼멘 소리를 하면 자신이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거 같아 숨을 죽여야 했고 몇날 며칠 그가 연락을 끊었을땐 죽을것만 같은 고통에 시달렸다. 그러다 한밤중 짤막한 그의 메시지 한줄에 그녀는 기사회생해서 장문의 답문을 보내곤 하였다. 그러면 그는 다시 뒤로 한걸음 물러나 기세를 잡았다.

"그남자 고수다. 조심해라"하고 현주가 여러번 경고를 주었건만, 동현이 부르면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달려나가곤 하던 그녀였다. 그래서일까. 그런 그녀에게서 더이상 그 어떤 끌림도 느끼지 못한걸까, 어느날 그에게서 '그녀'의 냄새가 났다. 여자의 향수.

향수를 전혀 쓰지 않는 소은이었지만 직감으로 그에게서 묻어나는 내음이 여자의 것이라는걸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둘의 갈등, 그리고는 그와 동침중에 걸려온 그녀의 전화, 붙드는 소은을 팽개치고 달려나간 동현...

이 모든것들이 주마등처럼 소은의 머릴 스치고 갔다. 이럴때 뇌를 열어 기억 주머니를 도려낼수만 있다면...


그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동현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의 심장은 심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액정에 뜬건 현주의 이름이었다.

"응..."

"지금 가도 돼? 나, 먹을거 있어?"

그말에 소은은 허탈함과 동시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리고는 알아차린다. 동현에게 자신의 새 주소를 알려준사람이 현주임을. 시간을 벌기 위해 일부러 못온다고 했던거까지.

현주는 생각보다 일정이 빨리 끝났다며 30분이면 올수 있다고 한다.

소은은 전화를 끊고 한참을 어둔 방에 갇혀 골똘히 생각헤 잠긴다...어둠속 미로를 더듬듯이 그녀는 불도 켜지 않고 벽을 더듬어 거실로 나온다. 물론 눈에 익지 않은 낯선 어둠이었다...

현주는 그나름으로 소은을 챙기려고 한 짓일게다. 확실히 동현을 끊어냈는지, 이집만은 지키고 살수 있는지, 평생 가는 우정을 기대해도 되는지, 남자 따위에 휘둘리지 않게   소은이  확실히  새롭게   태어났는지, 그 모든걸 확인하고 싶었으리라...

소은이 주방  led 를 켜자 눈이 부셨다. 이 밝음.

이 환한 어둠을 가르고 지상에 하나뿐인  친구, 정현주가 달려오고 있다...

그녀는 냉동된 음식들을 빠르게 해동하기 위해 전자레인지에 넣고 냉장실을 열어 남은 나물을 모두 꺼내 빠르게 무친다...현주에게 더할나위없는 집들이 음식을 맛보게 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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