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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May 28. 2024

슬픈 이사

남도로 출장을 간 영진에게 선희는 방해가 되지 않게 되도록이면 전화를 걸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연사흘 문자도 전화도 없는 그가 선희는 점점 걱정이 되었고 해서 출장 마지막날 밤 9시가 다 돼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한참을 울려도 연결이 되지 않고 음성 사서함으로 돌아갔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게 아닌닌가? 라는 의혹과 불안에 선희는 다시 전화를 해보았고 이번엔 통화중 안내 멘트가 나왔다. 아,하는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10여분 후 다시 전화를 하자 이번엔 전원이 꺼겨있다는 안내멘트가 나왔다. 뭐지? 하는 생각과 조금전 통화상대자가 갑자기 궁금해지며 선희는 미혹에 빠져들었다.


"야, 일 가 있을땐 전화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가 출장에서 돌아온 다음날 선희가 그의 회사 앞으로 가서 그를 만났을때 그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짜증을 냈다. 

"미안...근데, 걱정이 돼서. 며칠 계속 아무 연락도 없고"

"아무일 없었어. 봐, 잘있잖아"라며 그가 앞머릴 위로 쓸어올렸다.

남도의 따가운 볕을 쬐서 그런지 영진의 얼굴은 조금 그을려 있었다.

"근데...중간에 거니까 통화중으로 뜨던데?...그리고 다시 거니까 전원오프 멘트 나오고...해명좀 해줄래?"

"뭘...뭘 해명해. 너 의붓증 있냐? 이래서 어디 같이 살겠어..."하더니 그가 시간을 보는척 하더니 잔업이 남아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며 남은 커피를 급하게 마셔댔다.

선희는 의혹이 가시지도 않은채 그를 보내야 했고 혼자 까페에서 30여분을 멍하니 있다가 밖으로 나와 마침 오는 빈택시를 잡아 탔다.

집안은 온통 이사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있는대로 어질러지고 싸다만 짐, 버릴것, 가져갈것이 혼재해 정신이 없었다...그런데, 영진은 이사가 잡힌걸 알면서도 한번도 와보질 않는다.


임금체불로 전 직장을 그만 두기 전 거래처 직원으로 친분이 있던 영진과 본격적으로 사귄건 선희가 회사를 나와 방송일을 마악 시작하던 때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영진쪽에서 방송국앞이라며 내려오라는 전화를 해왔고 안그래도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던 상대라 선희는 녹음이 끝나자마자 영진을 만나러 나왔다.

"방송국이 이런데구나..."하며 1층 로비에서 너스레를 떨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선희의 기억속엔 생생히 살아있다. 그리고는 같이 저녁에 반주를 곁들이고  그렇게 둘은 흔한 연애 단계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 선희는 글을 쓰던 프로그램이 폐지돼서 실업자 신세가 되었고 그로 인해 영진에게 매달 송금하던 일정액을 보내지 못하게 되었다. 

"니가 앵벌이도 아니고 내가 신세지는 입장인데 너무 신경쓰지 마"라고 하였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은근 실망하는 투였다.


영진도 물론 제 밥벌이 정도는 하고 있었지만 일찍 아내를 여읜 그의 부친이 뇌출혈로 쓰러져 입원생활을 한게 거의 5년이 다 돼가고 그 병원비까지 댈 형편은 안돼서 선희가 그 부분을 떠안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마저 실업자가 되면서 그게 힘들어졌다. 처음 한두달은 영진도 별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언제부턴가 그의 연락이 뜸해졌고 만나는 횟수도 눈에 띄게 줄어갔다. 하지만 선희는 그와의 결혼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빨리 일을 잡아 부친의 병원비를 내고자 노력하였다..하지만 어쩌다 알음알음 선희의 이력서를 받아든 pd들도 선희가 마흔이 다 돼간다는 데는 난색을 표했다. 라디오 작가라는게 글만 쓰는게 아니어서 커피 심부름을 비롯해 잡일도 다하는 것이어서 pd와 별 나이차이도 없는 작가를 그렇게 부릴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굳이 영진 부친의 병원비가 아니어도 선희의 생활도 점점 막막해져가서 그녀는 일을 가리지 않고 해야 하는 형편이 되어갔다.이렇게 버티면 6개월도 못가 파산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구인지를 뒤적였고 전화도 수십통을 돌려봤지만 죄다 소용이 없었다. 이리도 일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줄은 그녀도 몰랐다.



한밤중에 들려온 전화벨소리는 왠지 불안감을 조성했고 발신자가 영진인걸 알고는 겨우 진정이 되었다.

"너, 돈좀 있어?"

누구보다 선희의 처지를 잘 아는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게 그녀는 너무도 어이가 없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미안. 내가 돈이 어딨어. 백순데"라고 하자 "그렇지? 알았어"하고 그는 전화를 끊을 기세다.

거의 일주일만에 걸어온 전화내용이 '돈'이라는게  그녀에게 답답함을 안겨주었다.

"우리 보자. 안본지도"

"요즘 회사 구조조정 들어갔어. 한동안 정신없다"라며 그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우린 이미 남이 돼버린걸까, 하는 의문이 그로부터 내내 그녀를 괴롭혔고 , 남도에서 그녀의 전화를 피한 그의 모호한 행동과 상황은 더더욱 선희를  의혹의 늪으로 밀어넣었다.



"웬일로 나오라고? 구조조정중이면 책상에 붙어있어야 하는거 아냐?"

그는 회사 앞으로 나오라는 전화를 했고 서둘러 둘이 자주 만나는 그 까페에 들어선 선희의 눈엔 미리 나와 앉아있는 영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잘 지내지?"

조금은 선문답같은 대화가 몇차례 오간뒤 영진이 자기물을 반쯤 마신뒤 본론에 들어갔다.

"영은이..."

"영은? 아, 자기 동생?"

"응...그 녀석이....혼전임신을 했어"

"요즘은 그게 흠도 아닌데 뭐,."

"그러니 결혼시켜야지. 근데...너도 알다시피 내가 돈이 빠듯하잖아. 요즘 아버지 병원비도 융통해서 겨우 대고 있는데"

"그 일은 미안해. 내가 이러고 있어서"

"결혼...요즘은 여자 남자 같이 집을 하는 추세잖아. 해서,"

"어떡하지? 나도 간신히 연명중이야. 알잖아"

"너...집...."

"응?"

"집은 ...아니다"

하고 그는 다시 남은 물을 들이켰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던 영진은 둔기로 머리를 한대 세게 맞은 느낌이 됐다. 집이라도 잡혀 자기 여동생에게 주라는 건가? 그녀는 아득해졌다...

"설마...나보고 집을"

"요즘 아무리 작아도, 아파트 전세라도 살려면"

"영진씨!"

"아냐. 없던 일로 해. "하고 그가  시간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다.

"우린 지금 뭐하고 있는거야?" 그녀를 스쳐가는 그에게 선희는 미동도 않고 그렇게 내뱉았다.

그말에 영진이 뜨끔했는지 주춤했지만 더이상의 말은 않고 그대로 까페를 나가버렸다.

우린 지금 사랑하고 있는걸까? 아직도 연인 사이긴 한걸까? 그녀는 버려진 여자처럼  그렇게 남은 커피를 마셔가며 깊은 의혹과 상심에 빠졌다.

하지만 그날이후로 영진은 계속 연락을 해서 돈 이야기를 해댔고 그에 지친 선희는 결국 집을 팔기로 하였다. 집이라고 해봐야 실평 10평 정도의 소형 아파트였지만 그래도 대학졸업후 아르바이트와 회사생활, 방송작가일을 하며 근근이   마련한 집이어서 애착이 남다를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혼자가 급하다는데야....하다가도  영진과 결혼으로 간다는게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주춤하곤 했다. 하지만 일단 그녀의 입에서 집을 팔기로 했다는 말에 영진은 서둘러 수십군데 여기저기 집을 내놨고 집은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금방 나가버렸다.


"이체했다구?"

영진이 요구하는 금액을 선희가 계좌이체하자 그는 고맙다는 말한마디 없이 저렇게 불쑥 내밭았다

"보냈으니까 확인해보라고"

"알았어"하고 상대는 전화를 끊어버린다.

최소한 수고했다 고맙다 미안하다 정도의 인사는 해야 하는게 아닌가 하다가 그녀는 한달도 안돼 비워줘야하는 집 상황이 떠올라 자잘한 것들에 얽매이지 않기로 하고 이사준비에 들어갔다.


뒤늦게 둘째를 가진 영미가 와서 같이 짐을 싸면서 툴툴댔다.

"영진씨 뭐 하는거니. 자기때문에 집도 날리고 외곽으로 나가나는데 들여다보지도 않고"

"바빠 그사람. 지금 회사가 구조조정중이라 눈밖에 나면"

"팔려면 자기 집을 팔든가 하지"

"그사람, 월세야.동생들 학비대고 그러느라..."

"그래?"

"응..."

그말에 영미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지만 내내 마뜩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만 하고 가. 넌 몸도 그런데"

선희의 그말에 박스에 테잎을 붙이던 영미가 잠시 멈추더니 "니들 확실햬? 결혼은 하구?"라고  의혹에 가득 차서 물었다. 

"하겠지 결혼"

"야, 그런말이 어딨어. 집까지 팔면서 그것도 확인 안했어?"

안그래도 집 매도 계약을 하기 전 영진에게 선희가 전화를 걸어 그 얘기를 하려고 하자 먼저 눈치챈 그가 짜증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바쁘다면서.

하지만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집을 팔았는데 , 이사가 결정된 뒤 한번도 들르지 않는 영진의 태도를 보며 안그래도 선희도 그 부분이 미덥지 않았다. 그와의 결혼은 이루어질까? 내가 괜한 짓을 한건 아닐까? 하는...



영미가 손사래를 쳐도 선희는 그녀의 손에 사례봉투를 쥐어주었다.

"기집애 하여튼..."하며 영미는 마지못해 그 돈을 받고 자기 차에 올라 단지를 빠져나갔다..

그래. 한번 오라고 해보자. 그러면 확실해질거야. 라는 생각에 선희는 어수선한 집에 들어서자 마자 영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올수 있어? 남자 힘이 좀 필요해서"

"야, 넌 무슨 수선이야. 포장이사라매"

영진의 볼멘 소리에 그녀는 괜히 전화를 했다는 생각과 동시에 그에게 건너간 그 돈이 아까웠다. 무를수만 있다면....

"우리, 결혼 해?"

"..."

"왜 대답을 못해?"

"야, 나 지금 바빠"

"바빠도 대답해야해. 남도에서 그 묘한 상황은 뭐였어? 통화중이었다가 내 전화는 안받고 전원 꺼놓고. 누구랑 통화한거야?"

그녀의 추궁에 영진은 "에이씨..."하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 선희는 싸놓은 박스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궁상맞게 눈물이 주르륵 훌러내렸다. 이런게 로맨스피싱인가 보다 하고는 엉엉 소리내서 울었다...


그렇게 박스 사이에서 어찌어찌 잠이 든 그녀는 새벽에 걸려온 영진의 전화에 잠이 깼다.

"야근하고 이제 퇴근한다"

"왜....전화했어?"

"이삿날 갈게. 그럼 되지?미안해 중간에 들여다보지 못해서""

"그거보다, 분명하게 대답해줘. 남도에서 왜 내 전화 피한거야?"

"그냥 동료 전화였어. 일전화...미안. 넘 피곤해서 니 전화는 못받은거고"

"..."

"암튼 이삿날 갈게" 하고 그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혼자 이사하세요?"

이삿짐 인부 하나가 사다리차에  짐을 실으며 옆의 선희에게 물었다.

그 전날, 영미가 와준다고 전화했지만 산달이 다 돼 가는 친구를 차마 오라고 할수는 없렀고 어쨌든 영진이 온다고 했으니 믿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삿짐이 반 이상이 내려가도 영진은 나타나지 않아 그에게 전화를 걸자 전원이 꺼져있다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이런거였어....다 계획적인 거였어...라는 생각에 선히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출발합니다"

라며 인부가 마지막 짐을 트럭에 실으며 영진에게 말했다.

"혼자 가시는 거면 같이 타시든가요"라는 말에 선희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순간, 저만치 단지를 진입하는 눈에 익은 하얀 경차가 눈에 띄었다. 영진이었다.

"아뇨. 남친 왔어요"라고,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 자랑을 하듯 소리치자 인부가 대강의 상황파악을 했는지 빙긋이 웃어주고 트럭에 올랐다...


"나 바빠서 오래 못있고 그래도 들여다는 봐야 할거 같아서..."

이삿짐 트럭이 이미 단지를 빠져나갈즈음 영진이 차에서 내리며 던진 이말에 선희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다.

"난 저쪽 데려다만 주고 회사로 돌아가야 해."

"그럴거면 그냥 택시 타는거랑 뭐가 달라?"

"얼른 타"하며 영진이 조수석 문을 열어준다.

마지못해 차에 타려던 선희는 그 의뭉스런 부분을 명료하게 하고 싶었다.

"남도에서...왜 내 전화 그렇게"

"또 그 얘기야? 피곤해서 그랬다고 했잖아. 안 탈거면 나 가고"

"당신, 여자 있어"

"너 그 의붓증 고치지 않음 평생 간다"하더니 그가 화가 난듯 차에 올라 시동을 건다.

"안 탈거야?"

영진이 차안에서 소리치지만 선희는 얼어붙은듯 그자리에서 꼼짝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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