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파고를 넘어...
대학시절, 교정이 작아선지 우리 학교엔 유난히cc가 많았던걸로 기억된다. 어느날 나도 수업 끝나고 단짝 친구와 도서실로 오는데 누군가, "만원있어요?"하는게 아닌가. 돌아보니 멀끔하게 생긴 귀공자 타입의 남학생이었다. 해서 난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일주일있다 갚을게요"라고 그가 말했다.
그렇게 난 그와 만났고 그는 우리 과 3년 선배였다. 난 막 본고사가 없어진 해에 들어갔고 그는 본고사 세대였다. 이른바 's대 떨어진 수재들이 모인다는' 학과 선배여서 괜히 선배들과 모임이라도 갖는자리면 우리 학번은 주눅이 들곤 했다.
난 결국 그에게 만원을 빌려주었고 정확히 1주일후 그는 도서관으로 와서 내게 그 돈을 갚았다. 그리고는 "이걸로 밥좀 사요"했다.
그렇게 우리는 채권채무자로 만나 선후배사이, 섬도 좀 탔고 연애 비슷모드에도 빠졌지만 결혼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졸업과 거의 동시에 우린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난 2년조금 넘어 돌싱이 됐고 그는 아들을 둘 낳고 여태 잘 살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늘 한결같았다는 것은아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저런 세월의 파고, 원망, 갈등 이런것들이 섞여 있어 몇해 동안 연락을 안하다 그 네거티브한 것들이 사라질 즈음이면 우연히 책상을 열었다 서로의 전번메모지를 발견한다든가 해서 다시 연락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또다시 학창시절 그 개구짐과 풋풋함으로 돌아가 '착하게' 어울리곤 했다.
이젠 둘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그런 텀에 접어들어 비슷한 고민에 빠져있다. 어떻게 하면 여생을 평온하게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보내고 마칠수 있을까, 하는...
그는 모 대기업에 다니다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지금은 조금 곤란한 상황이다. 이럴때 나라도 돈이 좀 있으면 도우련만...그래서 명퇴를 한 그는 지금은 조그만 사기업에 다니면서 부업으로 자그마한 온라인 스토어를 운영중이고 나는 가격비교에서 뒤져도 웬만하면 그의 샵을 이용해준다.
일요일임에도 출근할 일이 있었다며 귀갓길에 잠깐 들러도 되겠냐 좀전에 연락이 와서 나는 그러라고 했고 그동안 이렇게 브런치를 쓰고 있다.
혹자는, 아니 많은 이들이 말한다. 남녀는 친구가 될수 없다고. 그러나 내 경험을 통해 나는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서로가 휴미니즘이라는 공통분모와 깨끗한 모랄의식을 갖춘다면.
솔직히 그는 아직 나를 자기 와이프에게 오픈하지 않았다. 이렇게 평생 가는 인연이면 오픈하는게 맞지 않는가 싶을때도 있었지만 이젠 그런 찜찜함이 없다. 우리가 만나서 이상한 짓을 하는것도 아니고 아이들 이야기, 서로 사는 이야기, 기껏해야 천변이나 뒷산을 함께 오르는 정돈데...
그가 사는곳이어서는 아니지만 난 다음 이사지로 일산을 생각중이다. 그는 중심가 대형 오피스텔에 살지만 내 꼬라지로는 가당치 않아서 일산 외곽 어디쯤으로 일단 잡고 있다.
운전연수좀 부탁했더니 기꺼이 응한 고마운 친구.
이성끼리는 동성사이에 할수 없는 이야기도 한다. 이성이어서 말 못하는 경우보다는 할수 있는 경우가 더 많다는게 내 생각이다.
괜찮은 남사친, 여사친 하나쯤은 결코 나쁘지 않다..
삶의 평생 반려, 동행은 물론 배우자와 하는거지만 pacemaker 로서의 이성 절친 하나쯤은 괜찮다. 그 정도의 관용은 우리 삶에 요구할수 있는것이다.
있는대로 꼬여버린 지난 연애를 그와 상의하지 않았더라면 여태 질질 끌려다녔을지도 모른다. 그 역시 내가 한 조언이 조금은 효과를 본듯하고.
이렇게 서로 주고받는 마음의 질량이 비슷하다면 남녀간이라고 친구가 불가한건 절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