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균은 사흘을 잠잠하더니 오늘 또 향기의 신용카드를 그었다.분명 헤어져놓고 그녀의 카드를 쓰는 의도, 의중은 뭘까 향기는 혼란에 빠진다.
작가와 담당 기자로 만나 동행 취재를 간것이 계기가 돼서 서로 연인이 되었지만 3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세균의 태도는 늘 애매했다. 그래서 향기는 참다참다 못해 '누구 딴 사람 있어?'라고 묻기도 했지만 그럴때면 그는 불쾌한 표정만 지을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의 책이 한동안 잘 나가 출판사에서도 특별관리 작가로 대우했지만 단 한권이 그랬을뿐, 이후로는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해 결국, 마지막으로 들고온 원고는 반려처리되었다.
"난 이제 끝났어. 작가도 아냐"라며 그가 낮술을 퍼마실때 향기는 아무 할말이 없었다. 출판계에서는 이미 '퇴물 작가'로 낙인 찍히다시피한 얘기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렇게 다시 무명의 늪으로 떨어진 후 세균은 아예 글쓰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지냈다. 그러다 간간이 충동적으로 지방언론에 뜬금없는 미술평론이나 시정칼럼 등을 기고해 용돈벌이 정도를 하곤 했지만 그 마저도 언제부턴가는 채택되지않아 허구한날 술담배로 지내기가 일쑤였고 그런 그가 안쓰러워 향기는 자신의 신용카드 하나를 건네며 '꼭 필요할때 써'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귀찮아...없으면 없는대로 사는거지'라면서도 슬쩍 그 카드를 자기 주머니에 넣고는 이후로 시도때도 없이 긁어대기 시작했다.
어떤날은 하루에 먹거리, 아울렛 의류 등을 사들여 수십을 쓰기도 해서 향기는 얼마 안되는 자신의 월급으로는 충당이 되지 않아 어쩔수 없이 싫은소리를 해야했다. 그러자 그는 발끈 화를 내며 '카드 돌려줘?'라며 악을 썼고 그렇게 둘은 처음 헤어졌다. 하지만 이틀째 되던날, 세균은 다시 그녀의 카드를 긁었고 향기는 그것을 '재결합'의 시그널로 받아들여 그에게 연락해 둘은 다시 이어졌다.그리고는 동해 여행까지 다녀왔다...
하지만 세균은 이후로도 이렇다할 작품을 쓰지 못했다. 아니,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흥미를 아주 잃어버린 사람처럼 지냈다. 향기가 직접 만나 건네는 현금은 그 다음날이면 뭐에 썼는지 다 써버리고는 '돈없이 사느니 죽는게 낫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한도좀 올렸어. 굶지는 말아"라며 향기가 카드 한도를 증액해서 알리자 "쓸데없이"라고 해놓고는 현금서비스로 한번에 100을 인출한 적이 있다.
향기의 대학동창 민서는 이 얘기를 듣자마자 '그거 가스라이팅이잖아. 당장 끊고 카드도 막아. 아님 경철에 신고한다고 해'라며 입에 거품을 물었지만 향기는 차마 그짓을 할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신에게 정이 있으니 자신의 재산도 나눠 쓰는게 아닐까 하는 미련이라면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다.
"자기야, 알바좀 안할래?"
"뭔데?"
"동료 하나가 나가서 1인출판 차렸는데 교정, 윤문 외주할 사람을 찾는대"
라는 향기의 제안에 세균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야, 너 나 우습게 봐? 놀고 있으니 더 이상 작가로 보이지도 않지?"라며 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외주 비용만 정기적으로 받아도 향기에게서 가져가는 돈이 주는건데 그는 한사코 싫다는 것이었다. 아니 일체 '노동의 의지 '따위는 없어보였다.
"나 월세로 돌렸다"라며 한밤중에 걸려온 세균의 전화에 향기는 무슨 말인가를 알수 없었다
"갑자기 월세는 왜?"
"세희가 시집을 간단다. 하나뿐인 오라빈데 그냥 있을수가 있어야지"
즉 그말은 지방 사는 여동생 혼수비로 자신의 전세금을 뺐다는 얘기였다.
그말에 향기는 발끈 화가 치밀었다.
"처지에 맞게 하면 되는걸"
"너 지금 나 돈없다고 무시하는 거냐?"
"...미안...그런게 아니고"
향기는 알고 있다. 그후 일체 그의 생계비가 자신의 몫으로 돌아온다는걸....
마지막 보루였던 전세금마저 빼버렸으니 그의 수중엔 정말 돈 한푼 있을리가 없었다.
"엄마 돌아가셨을때 와서 50 낸 친구야. 난 그래도 최소한 "
이라며 어느날은 경조사비로 돈 30을 요구한 적도 있다.
받은게 있으니 그만큼 돌려주는건 맞지만 향기도 엄두가 안나는 경조사비 30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정말 과연 그의 모친이 돌아가셨을때 그 친구라는 사람이 50을 했을까,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우리 이렇겐 안되겠어"
"끝내자구?꼴랑 몇푼 대주면서 유세하드니..이럴줄 알았다"라며 그가 남은 의식않고 까페에서 담뱃불을 당겼다. 그걸 본 직원이 놀라서 달려왔고 불붙인 담배를 발로 눌러 끈 그는 가타부타 말없이 까페를 나가버렸다. 지금 따라나가지 않으면 이대로 끝나는 거겠지,하자 향기의 마음 한쪽이 헛헛해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를 먹여살릴수도 없고 이미 그로 인해 받은 대출금도 만만찮아서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날 밤새 울었다. 지난 3년간 세균과 함께 했던 날들이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아름다웠던 기억뿐 아니라 그녀를 아프게 했던 일들까지 그녀의 가슴을 강타했다...하지만 독하게 마음을 먹기로 한 그녀는 일절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작가 s의 원고를 읽던 그녀의 귀에 문자 알림이 들러왔다. 설마, 하고 폰을 본 그녀는 카드사용문자임을 알게 된다. 세균이 며칠간의 침묵을 깨고 그녀의 카드를 또 그은 것이다. 우린 이렇게 또 이어지는구나...
그날저녁, 그녀는 세균의 아파트로 차를 몰았고 둘은 같이 밤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씀씀이는 나날이 더 커져만 갔고 우연찮게 본 그의 문자창에서 묘령의 여자와 나눈 달콤한 대화들에 향기는 다시한번 그와의 이별을 생각하고 일주일을 끙끙거린 후에 말을 했다.
"야, 걘 내 초등동창이야. 너, 나 돈주기 싫으니까 별짓을 다 하는구나"
"그렇게 말하면 안되는거잖아"
"그래 끝내. 어차피 나 미래도 없는 놈이고 가진것도 없고....이젠 가공의 여자까지 만들어내서 니 돈을 안쓰겠다는건데 , 카드 돌려주랴?"
그말에 향기는 자신도 모르게 한손이 그에게로 향했다
"정말 달라고 ? 카드 줘?" 그도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돌려줘 이젠. 우리 이렇게 끝났잖아 다시"
그런 그녀를 한참 쏘아보던 세균은 까페를 나가버렸다.
손까지 내밀었으니 이젠 완전히 끝났다는 생각에 그녀는 간신히 운전해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날밤 열이 올라 해열제를 먹고는 간신히 잠이 들었다....
세균만의 컬러링이 울린건 날이 밝아올때쯤이었다.
"너 진심이야? 이제 카드 돌려줘?"
"...응"
"아주 작정을 했구나. 그럼 막아버려. 재발급 받음 어차피 이건 폐기되는데..몰랐냐?"
모르고 있었던건 아니었지만 향기는 그짓을 차마 할수가 없었던거뿐이다.
"내 카드 계속 가지고 있을거라는건, 우리가 다시 이어진다는거지?"
"나 피곤해...지금 아무 말도 하기 싫어. 막든 말든 맘대로 해!"라며 그는 거칠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사흘후 다시 그 카드사용 문자가 날아온것이다.
그가 이 줄을 여전히 잡고 있어,라는 생각과, 그저 카드가 필요할 뿐이라는 생각 사이에서 갈팡거리던 그녀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고 세균을 불러냈다.
"얼굴이 왜 그래? "
"나야 뭐, 없이 사니 이런게 당연하지.."
"우리, 어떻게 되는거야?"
그말에 그는 짜증어린 표정을 지었다.
"니가 뭐든 맘대로 하잖아. 언제는 내 의사 물었어? 지가 좋으면 달려오고 싫고 돈 아까우면 헤어지고, 니가 다 했잖아"
"진심이야. 우리, 다시 잘 해보자"
"니 맘대로 하세요" 하고는 커피잔을 비우고 그가 일어섰다.
"나오기 전에 카드는 막았어"라는 향기의 말에 그가 멈칫했다. 향기는 이어서 되돌아올 그의 타박과 원망을 감수하리라 마음먹었지만 그는 아무 말없이이 까페 유리문을 밀고 거리로 나가버렸다....
그는 일주일째 향기의 카드를 쓰지 않고 있다.
정말 카드가 막혔다고 믿는걸까....
하지만 이 관계를 계속 끌고 갈수도 없는 처지여서 향기는 독하게 그 일주일을 버텼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점심 무렵, 카드 사용문자가 날아왔다.
'c 순댓국 12000'
그가 아직도 자신을 놓지 않았다는 생각과, 자신을 조롱한다는 생각사이에서 그녀는 방금 먹은 국밥이 얹혀버려 약국에 들러 소화제를 사먹고야 진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회사로 들어가는데,
"전향기!"라고 부르는 세균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땐 횡단보도 저 너머에서 세균이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고 서있엇다.
신호는 이내 보행신호로 바뀌고 세균은 그녀가 건너오길 기다리는 듯했다.
하지만 보도에 첫발을 내딛던 향기의 머리를 무언가 강타하는게 있었다...
사랑일까? 폭력일까? 그녀는 도저히 알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녀가 뜸을 들이는 동안 신호는 다시 바뀌고 커다란 트럭 한대가 둘을 가로막은 채 서서히 지나가자 건너편에 세균은 없었다... 이번엔 확실히 행동으로 보여줬다는 생각에 향기는 안도감과 좌절을 동시에 느꼈다...
띵동!
그 순간이었다. 회사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카드사용문자가 또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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