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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도시

by 박순영

그때는 그게 왜 오해라는 말을 못했을까, 은영은 규현과 헤어지고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은영이 광화문 약속장소에 나가지 않은게 아니라 갑자기 열이 펄펄 끓어 나갈수가 없었다는 말을 해도 왠지 믿지 않을거 같아 침묵했던게 화근이었다.

"길거리에서 한시간 이상 기다렸다"라고만 쓰여있는 규현의 마지막 문자를 보며 은영은 끅끅 울어댔다. 헤어지고 반년만에 재회였는데 이렇게 틀어질수는 없다는 안타까움이 그녀를 지배했지만, 그게 '오해'라고 덧붙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다시 보기로 하고는 또 헤어지고 말았다.



그뒤 은영은 아무도 만날수가 없었다. 규현과의 기억과 추억이 너무나 깊고 아련했다. 어쩌다 친구들이 혼기를 한참 넘긴 은영에게 소개팅을 주선해도 은영은 한사코 싫다고 했다. 그만큼 그녀안엔 규현이 넘기고 간 블랙홀이 크고 깊게 나있었다.


왜 그날 그렇게 열이 났는지 그녀는 알수가 없었다. 평소엔 미열조차 나지 않는 은영이 하필 약속시간이 다 돼서 구역감에 고열에 시달린 이유를 알수가 없었다. 의사도 고개를 갸웃하며 '요즘 스트레스 많으신가봐요'라며 링거처방을 한게 다였다. 혈관을 찾지못한 간호사가 여기저기 쑤시는 아픔도 광화문 네거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규현의 헛헛함과는 비교가 안될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링거를 맞는 두시간 내내 눈물을 흘렸다.


의원을 나와 혹시나 모른다는 생각에 택시를 잡아타고 광화문으로 향했지만 둘의 약속지점엔 낯선이들뿐이었다. 그날밤 집에 돌아와서 그녀는 자신의 폰을 물끄러미 보면서 지금이라도 그게 '오해'였다는 말을 해야 할텐데 하였지만 이미 자신을 차단했을지 모른다는 생각, 한다 해도, 믿지 않을거라는 생각에 하지를 못했다. 그러고나자 다시 열이 나기 시작해서 사다놓은 해열제를 먹고 깊은 잠에 빠졌다. 죽은듯이 그렇게 잤다. 아니, 규현과 헤어진 뒤의 2년 자체가 깊고 어둔 잠이었다 .


그리고는 거짓말처럼 규현에게서 2년만에 연락이 왔다. 그것도 메시지로.

"니 생일 돼 가는거 같아서"라고.

은영은 반사적으로 메시지창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두세번의 연결음에 이어 그리운 규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맞게 기억하는건가?"

너를 잊지 못해 지옥같은 삶을 살았다고, 그날, 광화문에 일부러 안나간게 아니라고 , 연달아 이야기를 쏟아낼것만 같은걸 은영은 간신히 참았다.

"결혼은?"

일단은 알아야 할거같았다.

"아니 아직...넌? 했어? "하고 규현이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의 쿵쾅거리는 가슴의 울림이 전해져왔다.

"결혼은 무슨..."

너를 못잊어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할수가 없었다. 이렇게 또 끊어지고 나면 가슴을 치며 후회할것을 알면서도.

"만날까?"

규현이 힘들게 제안을 했다.

당장이라도 그를 만나러 가고 싶었지만 그런 대답도 나오질 않았다. 마치 자신의 언어기관이 타인에 의해 조작되는 느낌이었다.

"그럼 다음주 수요일, 어때? 광화문 거기"

그녀가 일부러 사나흘의 텀을 툰 것을 규현이 머쓱해하는 거 같아 어쩌면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은영은 또다시 조마조마했다.

"좋아. 다음주 수요일 거기. 광화문 거기"라고 그가 반복했다.

이번에 또 일을 그르치면 영영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거라는 생각에 은영은 사나흘 동안 어떻게든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리고는 한참 나가지 않던 새벽반 수영을 나갔고 퇴근후엔 헬스까지 다녔다. 어떻게든 최상의 상태로 규현과 재회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반드리 말하리라. 2년전 그건 순전히 '오해'에서 비롯된것임을.



마치 어린 어린아이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대하며 날짜를 카운트하는 것처럼 은영은 그렇게 그와의 만남을 말그대로 손꼽아 기다렸다.

아무래도 머리가 좀 어수선한거 같아 미용실에서 돈 30을 내고 다듬고 염색하고 백화점에서 옷도 새로 사입었다. 규현이 좋아하는 조금은 엔틱한 풍의 투피스로 골랐다. 그리고 구두는 단아한 , 너무 높지 않은 힐로 골랐다. 가방은 예전 규현이 파리 출장을 다녀오며 사온 그것으로 정했다.

이제 그와의 재회를 막는 그 어떤 걸림돌도 있을수 없었고 있어도 안되는 듯 싶었다.


자신에게 내려온 2박 3일의 도쿄 출장도 동료에게 떠넘겼다. 혹시라도 밖에 나갔다 비행기라도 연착하는 날엔 또 규현과 어긋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로 퇴사를 당한다 해도 할수 없었다.

그리고 매사를 조심했다. 가스불, 뜨거운 라면물, 미끄러운 빗길, 죄다 조심했다.

이번에 또 규현과 어긋난다면, 재이별한다면, 그것은 은영에게는 죽음과 같은 것이었다.


"의자좀 가져가도 될까요?"

라며 커피점에서 은영테이블의 의자 하나를 가져가며 구한 규현의 양해 ,그의 음성, 그 첫순간을 잊을수가 없었다.

다시 또 그의 품에 안기지 못한다면 세상은 멸망을 향해 치달으리라, 은영은 확신했다.



이제 내일이면 2년만에 규현과의 재회가 이루어진다. 은영은 잠을 청할수가 없다. 이미 그녀의 혼은 광화문 그 지점에 가 있다. 그의 훤칠한 키, 낭랑한 목소리, 그리고 그녀를 안으며 내뱉는 아주 작은 신음소리, 그 모든것이 '이규현'을 정의하고 그립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녀는 혹시 올지 모르는 약속취소나 딜레이 문자가 와있나 보기조차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날밤 약속 파기는 없었다. 최소한 밤 10시 23분까지는. 그리고는 10분쯤 지나 띠링, 문자 알람이 왔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기 폰을 집어 들었다.

"내일은 안되겠어. 미루자."

은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뉴스 봐"

그녀가 tv를 틀자 늘 보는 '그'의 대국민 담화가 나오고 있었다.

'시국의 엄중함을 감안하고 종북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계엄을 선포합니다'...

은영은 커다란 자막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면서도 믿을수가 없었다. 계엄이라니....은영은 말만 들어온 일이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인정도 믿기지도 않았다. 이따금 부모세대의 입에서나 나오던 그 단어를 자기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게 될줄은 몰랐다...

다음날 새벽, 계엄은 해제되었지만 규현으로부터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애가 탄 은영이 꼭 보자는 문자를 여러번 날려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곡을 하듯 울어댔다. 이렇게 틀어지면 안되는데. 그날의 '오해'를 안고 이렇게 어긋나면 안되는데...

그녀는 천천히 침대옆 협탁에서 지난 2년동안 모아온 수면제를 꺼냈다. 그리고는 입에 모조리 털어넣는 순간, 컬러링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그대로 약을 모두 뱉어낸 은영의 귀에 "밖에서 약속하기가 불안해서 니집 앞이야. 지금 문 열어줄래?"라며 규현이 숨도 쉬지 않고 한꺼번에 말을 토해냈다.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올때 이미 두다리의 힘은 다 풀려있었다. 그녀는 무릎으로 기어 현관으로 가서 손잡이를 돌렸다. 딸깍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그리운 그가 들어섰다.

" 은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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