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호로부터 점심을 같이 하자는 문자를 받고 윤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보니 그를 본 지도 한달이 다 돼 간다. 그때도 별 다툼없이 헤어졌건만 윤정의 마음에서 은호는 어느새 먼 타인이 돼있었다. 길다면 긴 5년을 함께 한 연인인데 둘중 누구도 결혼 얘기를 꺼내지 않는것도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 볼때가 됐지,라는 마음으로 윤정은 그에게 답문을 보낸다.
"이따 한시반 거기"라고 보내자 이내 "알았어 이따 봐"라는 답이 온다.
한시반은 둘 사이의 암묵적 약속 시간이다. 한참 붐비는 점심시간을 피하자는. 둘이 만나 하는 일이라고는 대형마트 식당가에서 밥을 한끼 먹고 그 주위 공원을 한두 바퀴 도는게 전부였다. 가끔 인근 서점에 들어가 책을 구경할때도있지만 언제부턴가 둘의 만남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왠지 오늘은 은호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에 윤정은 오랜만에 스모키 메이컵을 하고 옷도 신중하게 골랐다.
"넌 너무 어려 보여. 나랑 다니면 이상하게 본단 말야"라며 은호는 가끔 투덜대곤 하였다. 은호는 이제 30초반인데도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다며 조만간 가발을 써야겠다는 조금은 과장된 농담을 하곤 하였다.
"니 머리좀 빌려줘. 나 이식하게"라며 그가 씩 웃을때면 윤정은 툭 때리곤 하였다.
왠지 오늘은 미장원에 들르고 싶다는 마음에 윤정은 빠르게 머리를 샴푸하고 버스 정류장 인근 단골 미장원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드라이좀 해주세요"라며 그녀는 미용의자에 앉았다.
버스는 여느때처럼 자유로를 신나게 달렸다. 생각한 것과 달리 차는 막히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질주했다. 아직은 구정을 '설'로 인식하는 풍토때문인지 신정은 그저 '공휴일'정도로만 인지되는 것도 이유중 하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윤정은 가방속에 살그머니 자기 손을 넣어봤다. 은호에게 줄 '에프터 쉐이빙 폼 '두개가 손에 잡혔다.
"남자들은 이것도 일이야. 매일 아침 면도를 해야 하는거"라며 툴툴대곤 하는 은호에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얼마전 온라인으로 두개를 주문하였다. 그때는 만날 약속이 정해진 것도 아니었는데 '언젠가는 주려니'하는 마음에...
그렇게 버스는 한달음에 은호와의 약속장소로 윤정을 데려다주었다. 언제나처럼 윤정은 은호보다 일찍 도착했고 그걸 아는 은호이기에 '도착했다'는 문자나 연락따위는 필요없었다. 예상대로 은호는 약속시간을 1,2분 남기고 모습을 나타냈다. 아마도 자다 나온 듯한 조금은 추레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운동화를 꺾어신고.
'뭐야, 잘좀 입고 다녀'라고 윤정은 곧잘 타박을 하였지만 그런 은호의 편한하고 나이브한 모습을 윤정은 실은 좋아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그렇게 타박을 하면 은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적게 웃곤 하였다.
"좀 천천히 와. 너 만나기로 하면 마음이 급해져"라며 은호는 한팔을 윤정의 어깨에 살포시 둘렀다.
그 안에 들어가 본것도 한 2,3년은 된듯했다. 처음엔 서로의 집을 자주 오가던 둘이었지만 , 그렇게 몸을 섞곤 했지만 언제부턴가 만나면 밥먹고 같이 걷고 저가 커피점의 커피를 사서 걸으며 마시는게 전부가 된 둘의 데이트. 이걸 데이트라 부를수 있다면 ....
"오랜만에 그래볼까?"윤정이 눈을 크게 뜨며 조금은 과장되게 반색을 하자 은호가 씩 웃었다.
둘은 그렇게 정류장으로 향하던 발길을 은호의 자취방으로 되돌렸고 그렇게 오랜만에 윤정은 3평이 채 안되는 은호의 방에 들어섰다.
"여전하네"
"그렇지 뭐. 차 마실래?"
"아까 커피 마셨는데 뭐..."
"그럼 물이라도?"
은호가 무척이나 애를 쓴다는 느낌에 윤정은 코끝이 찡해왔다. 그러다 잊고 있던 쉐이빙폼이 생각나서 그녀는 가방 지퍼를 열었다. 그동안 은호는 허브티를 두잔 만들어 다가왔다.
"이거.."라며 윤정이 쉐이빙폼 두병을 내밀자 은호가 "마침 딱 떨어졌는데...고마워"라며 받아서 침대옆 협탁에 놓았다.둘은 그렇게 허브티를 나눠마시며 뭔가를 얘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미적거리기만 하였다.
"주인한테, 다시 얘기할까? 그냥 산다고?"
허브티가 바닥을 보일때쯤 은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뭐 그래. 이사 갈 때도 됐구만"하고 윤정은 낡은 벽지를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겨울나무가 풍경화처럼 내다보이는 창가로 시선을 던졌다....오늘 눈 온다고 했는데....그래? ...은호와 윤정은 그렇게 아직은 멀쩡한,하지만 낮게 드리운 겨울 하늘을 응시하였다...
"너 결심한거지?"
"..."
"늦었다. 정류장까지 바래다줄게"라며 은호가 먼저 일어섰다.
윤정도 마지못해 일어나는데 갑자기 무릎이 딱 꺾였다.
그렇게 휘청이는 윤정을 은호가 붙잡아주었다.
은호의 방을 나오기 전 윤정은 고개를 돌려 그 작고 친숙하고 조금은 추레한 공간을 마음 속에 모두 담았다.
"선물 고마워"라며 은호가 정류장에 거의 왔을때 입을 뗐다.
"그냥 싼거야. 담엔 좋은 걸로 해줄게"
"그래 다음에...꼭 비싼걸로 해줘"라며 은호가 생긋 웃었다.
이 남자의 미소를 영원히 잊을수 없을거라는 예감이 윤정의 온몸을 휘감았다. 이렇게 시간이 멈춰버리길 그녀는 바랐는지도 모른다.
"니 버스 온다"라는 은호의 말이 조금은 냉링하게, 그리고 시니컬하게 들린건 아마도 그녀의 마음을 은호가 읽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락할게"
"그래. 도착하면 전화하고"
윤정은 버스에 오르면서 한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은호는 가지 않고 우두커니 그 자리를 지키면서 얼른 타라는 손짓을 하였다. 윤정은 그렇게 버스에 올랐다. 그 순간 무릎이 또다시 꺾였다. 그러느라 그녀의 승차가 길어지자 기사가 짜증을 냈다. 얼른 타라고...
은호는 버스가 움직일때까지 미동도 않고 서서 창가의 윤정을 바라보았다.
은호는 '전화하라'는 손모양을 만들어보였고 윤정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헤어지지 않기로 했는데, 그저 밥한끼 먹으며 가는 해를 함께 보내러 온건데도 그녀와 은호의 마음속엔 깊고 커다란 싱크홀이 생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