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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집

by 박순영

유리가 창훈에게 바다에 한번 가자고 말한게 여러번이지만 창훈은 그때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거절을 하였다.

"우리가 어린애냐? 겨울 바다는 무슨"이라는 그의 마지막 거절을 당하고 유리는 진섭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진섭과는 대학동창으로 그가 결혼한 후 두어번 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같이 할만큼 막역한 사이여서 둘이 당일로 동해 정도를 갔다온다 한들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할리 없음에도 왠지 그 와이프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남녀 사이라는게 또 환경이 달라지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유리는 결국 혼자 여행을 다녀오기로 결심하였다.


지금 사는 집에서 택시로 20분 가면 커다란 버스 종합 터미널이 있는걸 알고 그녀는 수업이 없는 날을 택해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나니 창훈에 대한 집착도 많이 사그러들고 오히려 마음의 짐을 던것 같았다. 물론 나이 타령을 하면서 바다로의 동행을 무시해버린 그의 행동과 심사에 마음이 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리 깊게 상처 받지도 않았다. 사실 오래 사귀었다고 다 결혼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다만 긴 연애를 한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속에서 올라오기도 하였다.


운전을 하는 동료강사 s에게 말을 건네 볼까 하기도 하였지만 유리는 그것마저 포기하고 혼자가는 바다여행을 택했다. 아쉬운건 이럴때 운전을 했더라면 ,하는 정도였다.

"정쌤 뭐 좋은 일 있나봐요?"

수업을 끝내고 나오는데 s가 생긋 웃으며 유리의 안색을 살폈다.

"내일 당일치기로 겨울바다 가거든요"

"어머, 남친이랑 가시나봐요. 부럽다"

"그냥 뭐..."

s는 유리에게 남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터라 다르게 얘기를 둘러대는게 더 어색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였다.

"좋은시간!"하고 s는 또한번 웃어보이곤 총총이 학원복도를 걸어갔다.


한밤중에 걸려온 창훈의 전화는 막 잠에 빠지던 유리의 몽롱함을 일시에 날려버렸다.

"너 왜 나한테 바다 가자는 얘기 왜 안해?"

마치 지금이라도 이야기하면 갈거처럼, 아니 '데려다줄 거처럼' 창훈은 운을 뗐다.

"그냥...나중에...."라며 그녀가 대화를 이어나갈 뜻이 별로 없어하자 창훈은 "자라"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예전 같으면 찜찜할 만도 한데 유리는 아무 미련없이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는 폰 알람 소리에 잠을 깼을때는 새벽 6시가 좀 안된 시각이었다. 택시 콜을 하고 가면 딱 맞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전날 미리 싸놓은 짐을 간단히 살펴보고 샤워를 하고 옅은 화장을 한뒤 집을 나서며 택시 콜을 하고 대로변까지 빠르게 걸어갔다.


평일이라 버스안은 한산했고 그런 채로 버스는 아직 동트기 전 새벽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기사가 틀어준 히터가 유리를 노곤하게 해서 그녀는 몽롱한 잠에 빠졌다. 그리고 눈을 떴을땐 쾌청한 겨울 하늘이 눈에 들어왔고 버스는 새로 개통한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아침을 거르고 나오면서 싸온 빵과 우유를 소리나지 않게 조용조용 우물거리고 마시며 그녀는 허기를 달랬다. 그리고는 3시간만에 도착한 목적지에 내려 거기서 다시 택시로 갈아타고 10여분을 달리자 꿈에도 그리던 겨울바다가 영화처럼 그녀 앞에서 너울거렸다....

창훈이바보, 하는 생각이 그녀를 스쳐갔다. 이리 좋은걸 같이 봤더라면,하는 약간의 아쉬움도 일어났다.

그녀는 바다와 해안을 배경으로 여러장의 사진을 찍었고 그중 한두개를 창훈에게 전송하려다 머뭇거렸다. 왠지 그러기가 싫었다. 이유는 딱히 알수 없었다. 동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도 아쉬움도 거의 없는데도 .



그렇게 반나절 바다를 마주하고 파도와 장난도 치며 시간을 보내다보니 다시 상경할 시간이 다 되어갔다. 아쉬웠다. 동행은 없어도, 겨울마다를 배경으로 마주앉아 맥주 한잔 같이 마실 사람은 없어도 이걸로 충분했다는 생각에, 여행은 조금은 아쉽게 마무리지어야 기억에 남는다는 생각에 그녀는 홀연히 돌아서서 오던길을 되돌아 밤 10시쯤 집에 들어섰다. 그러자 온몸에 나른한 피곤함이 몰려와 씻지도 않은채 잠에 빠져들었다....그러느라 창훈이 걸어온 몇통의 전화가 온것도 모른채...

아침 해가 시야를 방해할때 그녀는 눈을 떴고 오늘은 다행히 오후강의가 있어 천천히 아침을 차리다 문득 창훈이 떠올라 침대위의 폰을 가져다 확인을 하였다. 세통의 잇따른 전화와 두통의 문자가 와있었다. 전같으면 확인한 즉시 답을 하거나 콜백을 할텐데 유리는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바다를 보고 와서일까, 그런 형식적인 룰 따위가 하찮게 여겨졌다. 밥먹고 하자,하고는 레인지에서 계란찜을 꺼내 후후 불며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어머 선생님, 그래서 바다는 다녀왔구?"

유리가 수업을 마치고 나오다 마주친 s가 예의 다정한 미소를 보이며 물어왔다.

유리는 아무말 없이 폰에 담긴 겨울 바다 사진 한장을 내밀었다.

"부럽다. 좋았겠어요. 회도 먹구"

언제 회를 먹었다고 얘기를 했던가? 그럼에도 s는 약간 격앙된 어조로 말을 잇더니 더는 묻지 않고 복도를 걸어나갔다.

언제봐도 도시의 세련됨과 나른함이 묻어나고 그럼에도 지킬 선은 확실히 지키는 s가 유리는 좋았다. 그렇게 멀어져가는 s를 보면서 언제 창훈과 커플 데이트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s도 목하 연애중이라는걸 알고있기에...



웬일로 유리의 퇴근시간에 맞춰 창훈이 학원 앞으로 온 밤이었다.

"웬일이야? 여길 다 오구?"

"너 요즘 이상해서 . 문자도 씹고 전화해도 안받고 콜백도 안하고."

"내가 그랬어?"라고 말하는데 유리는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나 운전할까봐"라며 창훈의 차에 올라타며 유리가 내뱉었다.

"너같은 둔탱이가 뭔 운전. 그냥 버스타고 택시타고 다녀"라며 그가 능숙하게 차를 모는 걸 보면서, 그의 변하지 않은 옆모습을 보면서, 유리는 왠지 그가 낯설게 여겨졌다. 분명 눈에 익은 눈코입, 그녀를 애무하던 그 손이 맞는데도 예전의 창훈같지가 않았다.

"너 바람 피냐?"

농담하듯 그러나 분명 뼈가 있는 말을 그가 내뱉었다

"실은 바다에 갔었어..좋드라..."

"바다? 니가 노래 부르던 겨울 바다?"

"응....가서 회도 먹고 맥주도 먹고 잠도 자고 그러고 왔어"

"누구랑?"하고 단번에 동행을 묻는 창훈이 유리는 조금은 귀여운 아이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친구랑"

"친구 누구? 그 s라는 학원 친구?"

"아니..남자"

그말에 창훈은 급브레이크를 걸었고 그때문에 유리의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무슨 운전을 그렇게 하니?"

"너 똑똑히 말해. 정말 사내놈이랑 바다에 가서 회먹고 술먹고 잠 자구 왔단 얘기야?"

"..."

"왜 말을 못해?"

"왜, 난 그러면 안되니? 너하고만 다니고 너만 바라봐야 하니? 우리가 결혼을 했니, 얘를 낳았니?"하고 대드는 유리의 모습에 창훈의 입가에 살짝 경련이 일었다.

"너, 나랑 끝내기로 작정을 했구나"

"맘대로 생각해"

유리가 차에서 내리자 창훈은 그녀를 부르지도 않고 횡하니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렇게 멀어져가는 창훈을 보면서 유리는 왠지 후련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리고는 마침 오는 빈 택시를 세워 집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너 정말 남자랑 갔던거 맞아?"

유리가 막 잠에 빠지려는데 창훈의 전화가 걸려왔다.

"...."

"말 못하는거 보니 맞는구나. 그럼 우리 이제 다시 보는거 없기다"

"좋을대로 해"하고 유리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녀는 미련없이 잠을 청했다. 깊고 달콤한 잠, 죽음이 이런 잠같은 거라면 100번도 죽고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는 꿈에서 그녀는 창훈과 겨울바다에 가 있었다. 동 터오는 새벽 바다를 향해 꺆 소리를 지르며 좋아하는 그녀를 창훈이 살포시 안아주기까지 하였다


잠결에 들린 도어락 소리에 잠을 깬건 이른 아침이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문이 열리더니 창훈이 씩씩대며 들어왔다. 유리의 잠이 덜깬 얼굴을 본 그는 마치 제집인양 냉장고로 가서 생수 한병을 꺼내 신경질적으로 뚜경을 열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왜, 끝내려고 왔니?"

"가자고 바다에"

"뭐?"

"옷입어 빨리. 오늘 월차 냈어"

"나, 갔다 왔다니까..."

"그러니까 빨리 옷입으라니까"하며 그가 옷장에서 아무옷이나 집어 유리에게 던졌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고 집을 나서 창훈의 차에 타기까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가 요란하게 시동을 거는 순간 유리는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너 다시 또 다른놈이랑 그짓거리 하고 다녀봐라. 죽인다"하며 그가 불퉁하게 내뱉고는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향한 곳은 먼 남해였다. 하루에 다녀오기는 벅찬 ...

"내일 새벽에는 올라와야 돼. 출근해야 돼서"라며 그가 있는대로 엑셀을 밟아댔다.

동해가 깊고 조금은 광포한 느낌을준다면 남해는 확실히 평화롭게 윤슬을 뽐내고 있었다.

달려드는 파도를 피하면서 조금은 힘들게 유리가 입을 뗐다.

"할말이 있어"

"너 다신 그래 봐"

"할말 있다니까..."

"뭐"

"실은...혼자 갔었어. 왠지 그러구 싶더라구"

그말에 창훈이 안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노려보듯 유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

"정말? 정말 혼자 갔었어? 근데 왜"

"이젠 헤어지고 싶었어 당신이랑. 아무 진전도 없는 이 연애가 권태로웠어"

"..."

"미안, 이렇게 말해서"

"그럼 헤어지자. 대신 서울 가서"

"그래...우리 헤어져 이제. 대신, 난 당신 배반한건 아니다?"

"알았어"

그렇게 둘은 다시 남해를 출발해 딱한번 화장실을 들르느라 휴게소에 들른거 빼곤 쉬지 않고 차를 몰았다. 그리고는 유리의 집앞에 차를 대는 순간 창훈이 , 오는 동안 한마디도 안했던 그가 드디어 입을 뗐다.

"헤어지는 거야. 대신, 우리 죽으면"

"..."

"꼭 입으로 말해야 돼? 사랑이니 좋아한다느니, 이런거 입으로 말해야 돼? 지금 보면 몰라? 니 그 거짓말에 질투 나서 미친놈 다 된거, 그거 보면 몰라?"

그말에 유리는 한동안 잊고 있던 그에 대한 그리움이 왈칵 밀려들어 그의 목을 두팔로 감싸 안았다.

"헤어지자니까"

"그래, 우리 죽으면 헤어지는거야. 그때 또 나 따라오면 너 죽인다"

그렇게 둘이 실랑이를 하는 동안 창훈의 출근시간은 이미 넘어버렸다.

"어서 가. 이러다 회사 짤리면 우리 뭐 먹고 사니"

하고 유리가 그를 놓아주며 말했다.

"니가 내려야 가지"

"아참..." 하고 그녀가 서둘러 내리는데 불쑥 그가 유리의 한손을 잡았다. 왜? 하는 표정으로 돌아보자 언제 샀는지 남해기념품 팔찌 하나를 꺼내더니 그녀의 가녀린 손목에 끼워주었다. 순간 유리의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내릴래?"

"...그래, 하루 더 제끼지 뭐."

하고 창훈이 차에서 내렸고 둘은 허겁지겁 유리의 집으로 들어갔다.

"팔찌 맘에 들지? 너 화장실 갔을때 내가 샀지"하며 창훈이 계단을 오르며 무용담을 얘기하듯 지껄였다. 그러든....유리가 비번을 다 누르자 문은 열렸고 창훈은 냅다 유리를 안아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부드럽게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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