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이 잠시 마트에 다녀온다고 집을 나간 사이 은영은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시큼한 냄새와 함께 김치통 두어개가 보이고 생수 몇병, 그리고 내용물을 알수 없는 검은 봉지 서넛, 그게 다였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이런건가를 실감하면서 은영은 조만간 냉장고를 채워줘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는 먼지가 곳곳에 널려있는 방바닥을 빗자루로 쓸기 시작했다. 아직도 비질을 하는 집이 있다는게 은영으로선 이해도 상상도 안갔지만 여하튼쓸고 또 쓸고를 반복하였다. 그리고는 구석에 내동댕이쳐진 걸레로 보이는 시커먼 수건을 빨아서 앉은뱅이 걸레질을 하였다. 이래서 정민이 한사코 은영을 집으로 부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3년가까이 사귀면서 이제야 그의 공간에 들어선 것이다.
그렇게 한 20여분이 지나자 밖에서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도어락은 설치돼있다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마트에 다녀온 정민의 손엔 맥주캔과 안주, 그리고 빵이 담긴 하얀 비닐이 들려있었다.
"너 뭐 하냐 지금?"
"응. 청소..."
"하지 마"라며 그가 거칠게 은영의 손에서 걸레를 뺏어 던져버렸다.
"왜 그래..."
"너 이럴까봐 오지 못하게 한거야"라는 그의 말에 은영은 코끝이 찡해온다.
"우리가 남이야? 내가 좀 보면 어때서?" 하는데 말끝에 울음이 섞여 나왔다.
그런 은영이 안돼보였는지 정민은 뜯고 있던 맥주캔을 놔두고 그녀곁으로 다가와 살포시 안아주었다.
"이젠 오지 마라. "
"이젠 보지 말자는 애기로 들리네?"
"그런거 아니잖아. 그냥 밖에서 봐"
정민과 은영은 둘다의 지인인 a의 소개로 만나서 굴곡진 연애를 거쳐 오랜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는걸 은영은 늘 느껴야했다. 은영이 아는 바로는 연애란 모름지기 서로 만나서 이야기하고 같이 밥먹고 같이 자고 같이 여행도 가고 싸워도 화해하고 그렇게 끌어가는 관계임에도 둘의 만남은 건조하기 이를데 없었다. 연애 초 몇번 같이 잔걸 빼곤 섹스는 둘 사이엔 전무했고 여행은 단 한번 ,그것도 당일치기로 서해를 다녀온게 다였다. 둘다 차가 없어 렌트를 해서. 물론 그 비용은 모두 은영의 몫이었다. 대학 시간강사로 근근이 생활을 하던 정민이 어느날 모 학회지에 실은 글이 문제가 돼 일시에 대학들 모두에서 해고 통보를 받고는 수입이 없던 때여서 경비를 은영이 대는건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정민은 차를 모는 내내 우울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은영은 이왕이면 동해의 거친 파도를 보고 오자고 했지만 정민은 장거리 운전은 싫다며 한시간 반거리의 서해로 방향을 잡았다.
"강의는 또 들어올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다 귀찮다"하며 그는 오는 동안도 내내 불퉁해있었다.
은영은 그런 정민을 애써 이해하려 노력하였다. 마냥 좋은날만 있는게 인생이 아니듯이 연인 사이도 마냥 좋을수만도 없으려니 하고 스스로를 달래곤 하였다.
한밤중에 걸려온 응급실 전화에 은영의 몰려오던 잠이 한꺼번에 달아났다.
공교롭게도 일주일전 정민과 심하게 다투고 연락이 끊어진 후라 은영은 더더욱 황망하면서도 정민이 걱정돼서 새벽거리로 뛰쳐나와 할증요금을 물고 s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에 들어선 은영이 먼거리의 정민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향하자마자 간호사가 따라붙더니 "환자분 보호자시죠?"라고 물어왔다. 순간 은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 사인해주세요"라며 간호사는 종이를 내밀었고 은영은 내용을 읽지도 않고 사인을 했다.
"평소에도 호흡곤란이 자주 있었나요?"라는 응급의의 질문에 은영은 뭐라 답을 못하고 쩔쩔맸다. 그러자 응급의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하면서 "두분 부부 맞아요?"라고 물어왔다. 그러자 이번엔 누워있던 정민이 대답을 하였다. 사실혼이라고....그외 친족은 전혀 없다고 덧붙이자 응급의는 더는 묻지 않았다.
"일단 필요한 응급처치는 했구요. 보호자 오셨으니 이제 정밀 검사 몇가지 더 할게요"하고 응급의는 간호사 두엇에게 작게 지시를 내렸다. 그들이 검사 준비를 하느라 분주히 오가는 동안 은영이 낮게 물었다.
"어떻게 된거야" 은영의 질문에 정민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어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미안하다 너한테 연락가게 해서"라는 말에 은영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숨쉬기가 힘들었어?"
"가끔 그래..."
"미안했어 내가"
은영이 그의 옆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1주일전 서로 모진말을 퍼붓고 돌아선게 은영으로선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부른다고 오냐? 너도 참...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
이어서 검사가 시작됐고 보호자는 따라오지 말라는 말에 은영은 비어버린 정민의 침대를 정리하여 기다렸다. 그러면서 둘은 헤어질 인연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걱정한 호흡기 계통의 질병은 아닌 '공황장애'판정을 받은 정민은 하루하루 쇠약해져갔다. 조금만 둘 사이에 대립각이 생기면 "병원비는 내가 갚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가 정민의 단골 멘트가 되었고, 그런 뜻이 아님에도 그런 대꾸를 하는 정민이 은영은 야속하기만 하였다. 그렇게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둘은 또다시 이별했고 다시 또 만나고를 반복했다.
"우리 같이 살자"
어느날 은영이 버스에 오르려는데 배웅하던 정민이 내뱉듯 이 말을 던졌다. 은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왜 둘은 한번도 같이 살거나 결혼이나 동거 따위를 생각하지 못했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갔다. 그 원인은 아마도 그런것들 따위와는 거리를 두고 사는듯이 보이는 정민의 평소 건조한 모습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런 그가 같이 살자는 제안을 한것이다.
당황한 은영이 답을 찾는 동안 기사의 빨리 타라는 채근이 들려왔고 은영은 어어....하면서 버스에 올랐다. 이후로 정민은 급속도로 은영에게서 멀어져갔다. 정민을 보지 못하고 사는 시간과 그의 목소리, 그의 메시지를 받지 못하는 것은 거의 죽음이나 다름없던 은영은 몇번이나 용기를 내서 먼저 연락을 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그러질 못했다. 너무나 보고 싶은데, 죽도록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도 은영은 용기를 내지 못했다..
"잘 살아라. 나 멀리 간다"라는 그의 메시지를 받은건 그를 보지 못한 채 가을이 다 가고 초겨울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은영은 이 두 문장을 수십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무슨 뜻일까? 어디로 간다는 걸까? 그녀는 당장이라도 정민에게로 달려가고픈 걸 억지로 참았다. 아니, 두다리가 후들거려 일어날수조차 없었다는게 더 맞는 말일것이다.
그리고는 며칠후 은영은 회사에 휴가를 내고 정민을 찾아나섰다. 그가 갈만한 곳이라고 해봐야 고향인 남도와 둘이 함께 갔던 서해바다가 전부였다. '멀리'라는 표현으로 봐서는 지근거리인 서해는 아닌듯해서 그녀는 거의 확신에 차서 남도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는 가는 내내 기도를 올렸다. 그를 보게 해달라고...
그렇게 그녀는 남도에서 정민을 찾아냈다 . 정민은 평소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물수선공이 돼서 까맣게 그을린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양손은 상처로 뒤덮여있었다.
"당신이랑 살고 싶었는데 그날 말이..말이 안나욌어"라며 은영이 상처 투성이인 그의 두손을 움켜쥐자 정민은 믿지 못하겠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내일 올라가라. 오늘은 배 다 끊겼다"며 그는 냉랭하게 고개를 돌려 하던일을 마저 했다.
"같이 가. 나 혼자는 안가. 우리 살자 같이"
"어디서 살아. 집이 있어야 살지"
"내 집에서 살자. 그래도 방 두칸인데 같이 못살겠어? 아님 당신 집에서"
"내집은 안돼...내 집도 아니지만"
그러는동안 정민의 마음도 조금씩 풀리는듯했다. 해서 둘은 그 섬에 단 하나뿐인 식당에 들어가 나란히 국밥을 시켜 늦은 점심을 같이 했다.
"너 진짜야? 나랑 살거야? 그러구 싶어?"
정민은 못믿겠는지 또다시 되물었다.
"당신이랑 살면서 애도 낳고 돈도 벌고 같이 여행도 다니고 그렇게 살고 싶어"라고 은영이 속을 털어놓자 그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같이 올라가. 응?"
그때도 정민은 뜻모를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힘들게 다시 정민을 만난 은영은 이제 결혼이든 동거든 무슨 일이 있어도 한공간에 같이 살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정민에게 자신의 전셋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지만 정민은 싫다는 대답 대신 '나중에'라고 말해 은영을 또다시 혼란에 빠트렸다. 나중에,가 의미하는 바를 은영은 헤아릴수가 없었다.
"난 언제 정민씨 집에 가?"
은영의 생일날 그녀의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고 커피를 내리며 은영은 조심스레 물었다.
"왜, 나 사는거 구경하고 싶니?"
"구경이 뭐야...가보고 싶어서 그렇지"
"봐서.."하며 정민은 또다시 말끝을 흐렸다.
이남자의 속을 알수가 없다. 언제는 같이 살자고 하더니, 이제 같이 살자고 하니, 애매하게 나온다...은영은 이 관계의 '진실성'까지 의심하게 되었고 그것은 욕구불만으로 곧잘 표출돼 둘은 다시 또 싸우고 헤어졌다 다시 만나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다시 만났을때 은영은 기선제압의 필요성을 느꼈다.
"나, 자기 집에 초대해줘"라는 그녀의 말을 정민은 꽤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내가 못오게 했어? 오고 싶으면 오든가"라며 그가 의외로 전향적인 대답을 내놓자 은영은 일시에 긴장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온몸에 미열까지 올라왔다.
그리고는 그 주말, 그의 집을 찾은 것이다. 거의 텅비다시피 한 냉장고와 먼지가 뽀얗게 앉은 그의 작은 방, 오래된 책상과 책들을 마주하게 된것이다.
"이젠 오지 마라. "
"이젠 보지 말자는 애기로 들리네?"
"그런거 아니잖아. 그냥 밖에서 봐"
그날 둘은 오랜만에 동침을 했고 새벽 첫차 운행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나 또 올거야"
"오지 마. "
"같이 살자며?"
"나중에..."
"나중 언제?"
그러는데 버스가 쌩하니 달려왔다.
"가라"하고 돌아서는 정민을 거칠게 은영이 거칠게 돌려세웠다. 결정적 순간엔 늘 뭉그적 거리는 그가 야속했다.
그 순간 눈발이 하나 둘 날리기 시작했다.
"첫눈이야..."
홀린듯 은영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눈이잖아. 눈 오잖아"
"어쩌라구.."
그러는 사이, 버스는 떠나버렸다.
"우리 언젠가 살기는 같이 사는거지?"
"내가 같이 살자고 했잖아...이번 차 오면 타라"
"..."
하는데 야속하게도 두번째 버스가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사랑해 자기야"
"낯간지럽게"라며 툴툴대는 정민을 두고 은영은 빠르게 빈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창가 자리에 앉아 가방을 고쳐메고는 재빨리 창밖을 내다보았을때 정민은 그자리에 없었고 새벽 어둠속에 눈발만 날렸다...그녀는 순간 서러워져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때가 잔뜩 묻은 손수건 하나가 건네졌다. 은영이 옆을 보자 정민이 씩 웃으며 입모양으로 '바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늘 니 옆에 있어 . 애먼데서 찾지좀 말라고"하는데 은영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가슴을 파고들며 곡을 하듯 울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