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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오류

by 박순영

옛남자에게 돈 애기를 꺼내기가 죽기보다 싫었지만 당장 집을 빼라는 채근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얼마나 필요한데?"

"3000"

"지금 이체해줄게"라며 영민은 그 자리에서 난주에게 돈 3000을 이체해주었다.

"고마워. 꼭 갚을게"


보증금을 1000에서 4000으로 올리는 예는 극히 드문걸로 아는데 집주인은 한사코 '급한 사정'운운하며 그게 안되면 빨리좀 나가달라고 몰아세웠다. 요즘 대출 받기가 힘든데다 직업도 일정치 않은지라 난주에게 돈 3000을 선뜻 내주는 은행은 없었다.

영민에게 연락하기 전 동창 강희에게 먼저 전화를 돌렸더니 하는 말이

"그 정도면 카드론 해"라는 말이 돌아왔다.

남의 속을 모르는 이야 그리 쉽게 말하겠지만 연체만 겨우겨우 막는 상태로 쓰는 터라 카드론이라고 해봐야 돈 1000도 되지 않아서 난주는 결국 헤어진 옛남자에게 전화를 한것이다.


"꼭 갚을게 최대한 빨리"

"그보다도 니가 걱정이다. 돈은 너무 염려 마. 형편되는대로 돌려줘. 안갚아도 되고"라며 영민은 안경을 치켜 올렸다.

조영민. 대학 내내 붙어다녀 누구도 그들이 졸업과 동시에 결혼할거라는 예상을 했던 커플이지만 내로라하는 재벌가의 자식이 편부슬하에서 힘들게 아르바이트하면서 대학을 다닌 난주와 맺어진다는건 또다른 안데르센이 나오기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아이부터 만들자"고 까지 한 영민이었지만 난주는 설령 그렇게 해서 그집안 며느리가 된다 한들 평탄치 못할게 분명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긴 연애에 이별을 고하고 돌아서 오는데 눈발이 날렸다. 올겨울 눈이 왜 이렇게자주 올까,하면서 눈물과 눈이 뒤범벅된 자기 눈을 꾹꾹 누르며 버스 다섯정거장을 내처 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영민은 곧바로 선을 봐서 결혼하였다.

"너 그렇게 보내고 나니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어"라며 그는 한밤에 자신의 결혼을 알리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걸 읽고 또 읽으면서 난주는 차라리 죽음이 낫겠다는 생각에 주방으로 가서 식칼을 집어 자기 손목까지 가져갔지만 차마 긋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흐른 세월동안 난주는 남자를 멀리했고 오로지 일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들어간 직장마다 문을 닫고 급기야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처지가 되었고 부친의 난데 없는 뇌경색진단에 그녀는 사는일이 너무도 고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하루에 아르바이트 두세개를 하고 그돈을 온통 병원비로 쓰다 보니 정작 자신은 쓸게 없어 일주일을 라면만으로 버틴적도 있다. 그러다 외곽에 싼 월세를 찾아 들어왔건만 이번엔 집주인이 기가막힌 요구를 한것이다. 보증금을 올리면 월새를 깎아주든 해야 하는데 그런 말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다른곳을 알아보았지만 이집만큼 월세가 싼곳이 없고 벌이가 시원찮은터라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재걔약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병상에서 지내던 아버지는 더이상 딸의 고생을 볼수 없었는지 어느날 병실에서 투신을 해버렸고 그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난주의 머리엔 딱 한사람 영민만이 떠올랐다. 하지만 돈까지 빌린 처지에 조문오라는 얘기는 차마 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상을 거의 혼자 치뤄내다시피 했다. 그리고는 며칠동안 비어있던 자기 방에 들어서는 순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잠에 빠졌다.

그러고있는데 띠링, 문자 알람이 들려왔다. 소리를 있는대로 키워놔서 그녀는 잠결에도 분명하게 그 소리를 들었고 긴장이 되었다. 혹시라도 영민이라면,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옆의 폰을 들어보았고 그 혹시는 역시로 바뀌었다.

"잘 지내나 해서..."

라는 짧은 문장이었지만 난주에게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문자였다. 난주는 답을 해야 하나 마나를 고민하다 용기를 내기로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

"미안 . 이런 얘길 해서"

그러자 금방 전화벨이 울렸다. 영민의 전화였다. 한참을 울리게 놔두다 난주는 마음을 수습하고 전화를 받았다.

"그 얘길 왜 이제 해"

둘은 마치 헤어진 적이 없는 연인들같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너 혼자 얼마나 힘들었냐, 나라도 불렀으면 의지가 됐을텐데,라며 영민은 한껏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가 보고 싶었다. 니가 보고 싶어,라는 말이 난주의 혀끝에 맴돌았지만 차마 내뱉을수는 없었다.



그리고는 봄이 왔다. 유난히 눈이 많았던 그 겨울도 다 가고 봄꽃이 여기저기 피기 시작했다.

난주는 작은 회사 경리로 취직이 되었고 월급에서 일부라도 떼서 영민의 돈을 매달 돌려줄수 있게 되었다.

"이러지 않아도 돼"라며 영민이 전화너머에서 만류했지만 이제 더는 연인도 아닌 남자의 돈을 그냥 먹어버릴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난주는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한번 밥 먹자. 니 회사 주소 알려줘"라는 점심 무렵 영민의 문자를 받은 난주는 잠시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언젠가 둘이 연애할때도 충동적으로 당일여행을 다녀온 기억이 스쳤다. 그와 함께 바라보았던 늦가을의 스산한 바다가 떠올랐다. 그와함께 한참을 걷던 철지난 해안가의 쓸쓸했던 풍광이 아직도 생생하게 그녀의 안에 남아있었다.

"나중에 보면 안될까?"

"내가 부담되니?"

안본다고 하면 그 말을 인정하는 거 같아 난주는 회사 주소를 찍어보냈다. 그리고는 그날 저녁 퇴근한 그녀앞으로 커다란 suv가 한대 미끄러져왔다. 영민의 차였다.



"실은 나 이혼했다. 첨부터 정없는 결혼이라"

"왜 그랬어. 잘살아야지..부모님 걱정 많으시겠다."

"니가 아니면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했던 결혼이야. 그래서 애도 안 낳았어"

"..."

"나랑 살래? 이젠 부모님도 내가 흠있는 자식이 돼서 그렇게 뭐라 못하실거야"

그말에 난주는 울컥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때, 자신이 그에게 이별을 고하던 그때 어떻게든 말렸어야지,라고 쏘아붙이고 싶은걸 간신히 참았다. 자신이 그럴 권한도 이유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영민의 결혼이 틀어졌다는 말에 난주는 괜히 화가 났다. 그럴거면 끝까지 자기를 잡았어야지 하는 일종의 회한.

"여기 파스타 맛있다"

"니가 좋아해서 이집으로 예약했어"

둘이 헤어진게 언젠데 아직도 난주의 입맛을 기억하는 영민이 고마웠다.

"우리 그럼 친구는 할수 있겠네"

"난 너랑 살고싶어"

그말에 난주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난주는 뉴스에 뜬 s그룹, 즉 영민의 집안 기사에서 눈을 뗄수가 없었다.

재계에서도 건실하기로 유명한 그곳이 부도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이었다. 경영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그녀로서는 그저 '부도'니 '합병'이니 하는 단어만 깊게 각인되었다.

"괜찮아?"

s기업 기획팀장으로 근무중인 영민에게 전화를 했을때 영민은 급한듯 "나중에"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가 그럴 정도면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이야기였다.

연일 s그룹의 횡령과 비리, 이중장부등의 기사가 터지자 격한 비난의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고 총수를 빨리 사법 처리하라는 항의의 글도 쏟아져나왔다...

이렇게 영민과는 또 틀어지는구나,하면서 난주는 마음을 다 잡기로 결심하였다.

"나야, 집앞이야"라며 그가 전화를 걸어온건 한참 그의 회사가 지면에 오르내릴 때였다.

"바쁠텐데..."

아닌게 아니라 영민은 있는대로 수척해있었다.

"자금이 안돌아"

"어떡해..."

"그 돈이라도..."

"응?"

그러다 난주는 그가 돈 3000을 말한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떻게든 구해볼게. 당연히 돌려줘야 하는 돈이니까"

그렇게 그날 영민의 차가 떠나는 걸 보고 난주는 간신히 계단을 올라와 5층 자기 방에 들어왔다.

조금씩 갚아온 돈이 있다 해도 아직도 2500정도가 비어서 이걸 어떻게 하나 한참 고민을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영민 같았고 영민의 전화였다.

"내가 괜한 소리했다. 잊어버려. 니가 무슨 돈이 있다고"

"아냐 구해볼게"


그러나 다음날, s그룹의 총수는 수사를 받게 되었고 후계자로 지목된 기획팀장 영민이 회사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기사가 떴다. 어디로 간걸까....혹시 나쁜 생각이라도 한걸까....

그러고는 일주일뒤 한밤에 그로부터 문자가 날아왔다. 니가 보고 싶다고. 곧바로 문자창 위의 전화아이콘을 눌렀지만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안내멘트가 나왔다. 문자만 보내고 급히 전화를 껐다는게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s그룹은 m그룹에 합병절차를 밟게 되었고 당연히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그동안 영민으로부터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가끔 전화를 걸어도 늘 같은 멘트가 흘러나왔다. '고객님의 전과기가 꺼져있어...'



그가 어쩌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건 유난히 길었던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 생각에 난주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그리고는 잠옷위에 카디건만 걸치고 지갑을챙겨 집을 나섰다. 그리고는 택시를 부르려다 폰조작을 멈췄다. .그가 어딨는줄 알고 간단 말인가...어쩐지 예전 둘이 갔던 스산한 바다엔 가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대해 아는게 너무도 없다는게 마음에 걸렸다. 그러자 두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녀는 털퍼덕 땅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때 갑자기 눈이 부셔 고개를 드니 눈에 익은 suv가 자기를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기억하는 바로는 분명 영민의 차였고 차를 세운 영민이 거짓말처럼 자신에게 와서 땅에 얼어붙은 자신의 몸을 일으켜주었다.

"미안해서 연락할수가 없었어"

"뭐가..."

"너한테 그돈 돌려달라고 한게. 아무리 급해도 그러면 안되는거였는데"

하는데 난주는 격앙돼서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난주를 그가 살포시 안아주는데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난 여름과는 다른 냉기를 먹은 비였다.

"들어가자. 커피 타줄게. "

"그래도 될까?"

"너 이제 커피 먹을 돈도 없잖아"라며 그녀가 농을 하자 그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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