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같은 눈이 퍼붓는날이 하필 분리수거로 잡혀 일주일 전 이사온 연희는 양손 가득 이삿짐 잔해들을 들고 승강기에 올랐다. 저층 아파트라 기계는 빠르게 1층에 도달했고 그녀가 내리는 순간 유리현관 너머로 온통 하얀 바깥 세상이 펼쳐졌다. 와....그녀는 감탄하면서 유리문을 밀고 나서는데 환희는 짜증으로 바뀌었다. 지면까지 나있는 계단 다섯개가 온통 눈으로 뒤덮여있있기 때문이다. 뭐지? 여기 경비원은 눈이 이렇게 와도 쓸지 않는거야? 하고는 투덜투덜 계단을 내려오다 마침내 왼발이 미끄러지면서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그바람에 양손에 들린 분리쓰레기가 사방으로 널브러졌고 뒤이어 나오던 남자 하나가 붙들어줘서 간신히 일어날수 있었다.
"조심하셔야죠"하고 그가 말하는데 연희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긴 경비들이 눈도 안 쓰나봐요"라고 하자 "아니 쓰는데, 워낙 눈이 많이와서..."라며 마치 그들을 대변하듯 하고 남자는 자기 차를 향해 갔다. 아무래도 내일은 병원에 가봐야겠다 생각하고 연희는 나머지를 처리하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자신이 이사온 4층으로 올라왔다.
"큰 이상은 없고, 잠깐 근육이 놀란거 같네요. 며칠 물리치료는 하셔야 해요"라는 의사의 말에 연희는 부아가 치밀었다. 그리고는 오는길에 관리사무소 앞에 차를 대고 조심조심 걸어들어갔다. 하루 지났다고 아예 결빙이 돼버린 연결통로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뇨 . 우리 경비아저씨들 일 열심히 하시는데"라며 관리사무소 여직원이 시큰둥하게 말을 내뱉었다.
"지금 병원 다녀오는 길이라고요. 어제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알았어요 제가 아저씨한테 다시 쓸라고 할게요"하고 여직원은 시선을 컴퓨터 화면으로 옮겨버렸다. 더는 너와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다는 투였다.
그렇게 관리사무소에서 쫓겨 나오다시피 하다보니 아무래도 이사를 잘못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직하면서 받은 퇴직금을 야금야금 까먹다 건너 건너 아는 지인의 꾐에 넘어가 비트코인에 수천을 넣었다 다 날리는 바람에 급히 집을 팔고 이곳 수도권으로 밀려온 자신이 한심했다. 전 아파트는 눈이 오면 실시간으로 치웠는데...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살 차를 몰아 자기 동 앞에 파킹 시키고 차에서 내리는데 누군가 자기를 쏘아보는 느낌이 들었다.
현이었다. 비록 헤어진지는 한참 됐어도 결혼까지 생각하며 만났던 남자를 어떻게 잊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현이 입고 있는것이 경비복이라는 것이었다. 설마....
현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더니 시선을 아래로 내려 눈쓸기를 계속 했다. 그 모습에 연희는 할말을 잃고 한참을우두커니 그가 눈 쓰는 모습을 쳐다만 보다 그가 자리를 옮기자 그제서야 연희도 어제 넘어진 , 이제는 눈이 쓸리고 약간의 결빙된 상태인 그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병원에서 받은 약부터 입에 털어넣는 순간 현의 얼굴이 다시 아른거렸다. 그가 왜 경비원 일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다 된 결혼이 깨진것도 현의 부모때문이었다. 어릴적 부모를 모두 사고로 잃고 친척집을 떠돌며 컸다는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녀의 부모가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근본없는 '이라는 말로 그녀를 내쳤고 그렇게 현도 부모의 완강함에 밀려 결혼을 포기한 것이다. 현의 집안은 큰 부자는 아니어도 상당한 재력을 가진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의 자식이, 그것도 외동인 아들이 왜 그 나이에 아파트 경비원을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엉덩이 찜질을 하는 동안도 그 생각은 내내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현과 다시 마주친건 며칠후 그녀가 뒤늦게 두부가 떨어진걸 알고 저녁무렵 집을 나섰을때였다. 단지 앞 편의점에서 사올 요량으로 차 대신 걷기로 한 그녀가 203동을 끼고 도는데 아래서 올라오는 현과 딱 마주쳤다. 연희는 이번엔 기어코 물어보리라 생각하고 그에게로 다가갔지만 현은 그녀를 피해 몸을 틀었다.
"그러지 말고 얘기좀 해"
"무슨 얘길"
"당신이 왜 여기서"
"나 바빠"하고 그가 빠르게 연희를 지나치려 하는데 속도를 줄이지 않은 승용차 한대가 203동을 끼고 나오다 하마터면 연희를 칠번 했다. 그런 연희를 자기쪽으로 끌어당겨 사고를 막아준게 현이었고 차주는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이 쌩하니 가버렸다.
"누가 단지 안에서 저렇게 다녀. 나 이사 잘못 온거 같아"라는 연희의 말에 현은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어디 가서 차라도 할래?"라며 조금은 누그러진 모습을 보였다.
연희와 헤어진 뒤 집안에서 정해준 여자와 결혼까지 갈뻔 했는데 그때마침 부친이 운영하던 회사가 기울며 결혼은 파투가 났다고 한다. 순전히 돈만 보고 결혼하려던 여자였기에 미련따위는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얼마 안남은 재산으로 부친과 함께 완구회사를 차렸지만 그게 생각처럼 되질 않아서 그것마저 접고 급기야 이 길로 접어든것이라 했다.
"세상 참 웃기지?"하고 그가 그때까지도 벗지 않은 경비원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그래서 여태 결혼은 안했구?"연희의 물음에
"그렇지 뭐. 돈이 있어야 결혼도 되는거구...그땐 너한테 미안했다"
그 '미안'이란 말을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는가를 떠올리자 연희의 눈엔 눈물이 그렁했다. 그가 헤어지자는 마지막 말을 하고 등을 보이고 멀어져갈때 점멸하는 가로등 밑으로 흩날리던 눈발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왜 이런데까지 왔어. 그냥 서울 살지"
"서울이 좋지. 근데...말하자면 복잡해. 돈 다 날리고"
그러자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는 들어가봐야 한다며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연희는 그에게 할말이 많았음에도 더는 못하고 그를 가게 했다.
일주일후 또 폭설이 내렸다. 연희는 아예 외출을 포기하고 그날은 종일 집안정리를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조금 남은 돈으로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웹을 여기저기 검색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 그녀가 현관문을 열자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현이 서 있었다.
"저기 이번에 동별 대표 뽑는데 다들 투표를 안해서 이렇게 집집마다"
그말에 연희는 "알았어"하고는 그의 손에 들린 투표지에 자기 이름과 사인을 했다.
"고생하네"
"고맙다"하고 돌아서는데 "저기"하고 연희가 불렀지만 그는 잠시 멈칫할뿐 그대로 가버렸다. 한번 돌아보기나 하지...하는 아쉬운 마음에 그를 따라갔다. 그는 승강기 대신 계단을 내려갔고 아래층 집 초인종을 눌렀다. 또 사인을 받아야 하리라....
그를 아예 밑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그녀가 승강기로 1층에 내려왔을때 바깥 계단은 말끔히 쓸려있었다. 쓸어도 또 쌓일텐데 계단은 깔끔하게 비질이 돼있었다.
"너 또 넘어질까봐"라는 말이 들려 돌아보자 현이 오랜만에, 정말 오랜 시간이 흐른후에 예의 그 다정하고 조용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자신이 계단에서 미끄러진걸 안다는 자체가 연희는 창피했고 그걸 또 관리사무소에 가서 '꼰질렀다'는 것에 회한이 들었다.
"이제 눈 와도 안심해도 돼"라며 현이 가려 하자 이번을 놓치면 계속 이상태로 갈거 같다는 생각에 연희가 그를 불러세웠다.
이젠 안된다는 생각과 지금이라도 노력하면 다시 이을수 있다는 두 마음의 거리 사이에서 그녀는 조금은 혼란스레 차를 몰았고 그렇게 폭포에 도착해 함께 걷고 간단한 요기를 한뒤 언 강변으로 나와 오들오들 함께 섰다.
"그렇게 난 벌받은 거 같아. 너 버린뒤에"
"그게 언젯적인데..난 다 잊었어"하는데 주책맞게 그녀의 양볼로 눈물이 흘러내뎠다. 그 눈물을 현이 보지 못하게 살짝 고개를 트는데 그가 거칠게 그녀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눈부신 겨울햇살이 그 둘을 녹이기라도 할듯이 강하게 내리쬐었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라는 연희의 말에 그는 아무말도 없이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올라오는 길 운전은 내내 현이 했다.
"집에 들어갈래?"
단지 주차장에 차를 파킹시키는 현에게 연희가 물었다
"다음에...가면 커피 주는거지?"
"그럼...밥도 주지"하고 둘은 다시 짧은 키스를 나누고 헤어졌다.
현이 있었더라면...하는 아쉬움에 그녀는 눈이 잔뜩 쌓인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왔다.
지난번 다친곳이 아직도 욱신거리는데 또 넘어지면 그야마로 황천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이 있었다면 자기를 위해 말끔히 눈을 쓸어놨을텐데 하는 아쉬움과 자신이 그에게 가한 무언의 폭력들이 미안하고 죄스럽기만 했다. 주민, 그것도 권력이라고 항의하고 민원을 넣고 했던 자신이...
차라리 서로 모르고 지냈더라면 더 오래 갈수도 , 다시 시작할지도 모를 것을 괜히 눈따위 쓸어놓지 않았다고 갑질을 해서 일이 틀어져버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그건 좀 곤란해요. 아무리 퇴직하셨어도"
며칠을 고민끝에 관리사무소로 가서 현의 주소를 물었지만 여직원은 절대 알려주지 않을 태세였다.
'해꼬지하려는 거 아니고요...우리 예전에 사귀던, 아니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이예요"라고 하자 여직원의 눈이 잠시 빛나는거 같았으나 "그래도 안됩니다"라는 거절의 말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나오는데 눈은 아직도 펑펑 쏟아져내렸다. 강이 가까워선지 눈이 잦은곳이라는 생각을 하다 며칠 계속 꺼져있던 그의 전화가 어쩜 지금쯤 켜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연희는 서둘러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끊지 마"
어렵게 이어진 통화였다. 어떻게든 현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인 연희가 다급하게 애원했다.
"나 잘 살고 있어. 이제 됐지?"
"번호는안 바꿀거지?"
"니가 원하면..."
언제 또 보자는 말을 하고 싷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전화는 끊어졌다. 그렇게 아쉽게 현과의 통화를 마치고 양손을 외투주머니에 찌르고 집으로 오는데 눈이 사선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밤 대단하겠구나...
"지금 거신 전화는 결번이니..."
분명 자신에게 번호는 바꾸지 않겠노라 약속해놓고 현은 번호를 바꿔버렸다.
이제 그와는 영이별이구나 하는데 자신의 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하자 관리사무실이이었다.
"정말, 사귀던 분 맞으세요?"
여직원이 최대한 신중하려는 눈치를 보였다. 맞다고 하자 여직원이 현의 주소를 불러주었다. 연희가 받아 적을 새도 없이 빠르게 불러 네네,하고 전화를 끊고는 녹음된 통화를 다시 돌리며 주소를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