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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날의 삽화

by 박순영

"나 기억해요? 기훈이"

기훈....아, 정기훈. 그를 애써 기억하고 있던것도 아니지만 잊힐 이름도 아니다. 수진은 한껏 톤을 높여 대답했다.

"그럼요. 기훈씨 잘 지냈어요? 결혼은 했구?"

라는 말에 "숨 쉬어요 숨..."하며 기훈이 웃었다.



둘은 대학 동창으로 기훈은 문학클럽리더를 하면서 수진만 보면 클럽에 들라고 권유했다. 수진은 문학처럼 조금은 질척한 것보다는 조금은 냉정하고 건조한 걸 선호한 터라 영자신문반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기훈은 '아 좀 들어와서 내 참모좀 해요'라며 그녀를 꼬드겼다. 걸국 한달인가 문학동아리에 참가했다 역시 자기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수진은 탈퇴하고 영자신문애 매진, 졸업후에도 그대로 영자신문사에 취업을 했다. 기훈은 누가뭐래도 학구파라 당연히 대학원에 올라가 석사를 마쳤다는 얘기까진 전해들었다.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수 없는채 시간이 훌쩍 흘렀다.



"봐요 한번..."

기훈의 요청에 수진은 퇴근후 대학근처로 향했다. 그날따라 비가 왔고 그러자 더더욱 지난날의 향수가 피어올랐다. 기훈에게는 대학시절 미진이라는 여친이 있었고 미진은 조용한 미인 타입이었다. 그에 반해 기훈은 조금은 시골스러운, 그런 향토적 느낌이 나는 타입이었다. 약간의 언밸런스한 매력이 오히려 둘을 더 눈에 띄게 했고 아마도 둘은 졸업과 동시에 결혼으로 가지 싶었지만 전해들은 바로는 기훈이 대학원으로, 미진이 항공회사에 취업하면서 둘은 멀어졌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지하철 플랫폼에서 수진은 미진과 마주친 적이 있다.

"어, 서미진이지?"

그말에 미진은 살짝 웃음을 보이며 "가끔 얘기들어"라며 맞받았다.

그러는데 열차가 들어와 서로 반대방향이던 둘은 "나중에"라며 의례적 인사만 남기고 헤어졌다.

그땐 이미 기훈과 미진이 헤어진걸 안 다음이라 사실 시간이 더 있었어도 딱히 나눌 말도 없었다.

젊은날의 치기, 그냥 그걸로 끝나버린 둘의 연애를 새삼 들먹일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다.


작은 화분이 구석에서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수진이 입을 뗐다

"꼭 추억같아"

그말에 기훈이 술을 넘기다 흡, 하고 놀라는 시늉을 하더니 눈이 반짝거렸다.

"그러게. 그 감성으로는 문학을 했어야 한다니까"라며 그가 헤실헤실 웃었다.

그는 대학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게 없었다. 앞머리가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장난기 어린 눈과 학구파다운 돗수높은 안경, 전체적으로 시골스러운 그 느낌은 여전했다.

"그래서 너는 만나는 남자는 없구?"

둘은 대학때도 말을 놓지는 않았는데 술이 좀 오른 기훈이 불쑥 말을 내려 수진은 잠시 당황했지만 뭐 그러려니 하고는 넘어갔다. 수진의 파혼 소식을 전해 들었을테고 이후로 다른 남자는 없었냐는 말로 해석돼 수진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다 된 결혼이 상대 남자의 오랜 연인이 나타나며 깨져버리던 날, 수진은 오히려 무덤덤했다. 그닥 애정이 없어서였을까...지금 강남에서 성형외과를 하는 그는 과연 그녀와 결혼했을까,잠시 그게 궁금했다.

"다신 그런 일 겪지 마라. 그게 사는거 엄ㅊ청 힘빠지게 만든다"하면서 기훈이 그녀를 위로하였다.

밖에선 비가 계속 내렸고 그래서 그날은 정말 추억으로 남을만 했다.



그러고는 한달이 채 안돼 다시 기훈에게서 연락이 왔다. 수진이 한창 바쁠때였다. 지금좀 볼수 있냐는 그의 말에 그녀는 난감했지만 하던 일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그와 약속한 근처 까페로 향했다.

"너, 혹시 미진이 소식좀 아냐?"

아...드디어 그의 입에서 미진이라는 이름이 나오는구나 싶어 수진은 조금은 마음이 아렸다.

"나 예전에 전철역에서 한번 마주친거 외엔"

니 둘이 헤어진거 알고 있다는 말까지는 차마 할수 없던 수진은 허브티만 연신 마셔댔다.

"걔가 결혼한대"

그말에 수진은 '뭐 그럴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말 역시 입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기훈의 마음을 알기에...

"올 가을에 한댄다. 같은 회사 놈이랑"

놈,이라는 말에 수진은 기훈이 아직도 미진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아니 그냥....넌 더 좋은 사람 만나면 되잖아"

"난 결혼같은거 안한다"하고 기훈은 그 뜨거운 커피를 마치 냉수 마시듯 들이켰다.

"내가 술 사줄게 오늘"

수진의 제안에 기훈이 논문 쓸게 밀렸다며 손사래를 쳤다.



한밤에 걸려온 전화가 기훈인걸 알고 수진은 미진을 떠올렸다. 미진의 결혼소식이 어지간히도 충격이 됐나보다 싶어 벨이 서너번 울렸을때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기훈은 대뜸,

"넌 더 이상 그런 일 당하지 마라"라고 내뱉었다.

수진은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은 자신의 '파혼'을 기훈은 고집스레 기억하고 언급하고 또 그걸 자신의 처지에 빗대서 그렇게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마음이 상하고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 수진은 할 일이 있다며 서둘러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는 며칠후 수진에게 등기로 책 한권이 날아왔다. 기훈이 처음 번역한 핏제럴드의 미공개 단편집이었다. 그의 감성이 여전하다는 생각에 전화를 할까 하다, 또 '그런 일 당하지 마라'는 말이라도 들을까,간단히 잘 받았다는 문자를 보내는 걸로 갈음하였다.



그리고는 간간이 그 책을 읽던 그녀에게 어느날 기훈이 문자를 보내왔다.

"대학원 후배중에 만나는 여자가 생겼다'고.

그말에 수진은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다 끊어내기야 했겠는가만은 그래도 미진을 어느정도 정리한거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어서 기훈의 문자가 또 날아왔다,

"내가 소개시켜줄까?"라는.

굳이 기훈의 새 여자를 만날 필요가 없었지만 거절하면 혹시라도 기훈이 상처받을까 싶어 둘은 약속을 잡았다.


기훈의 새여자는 기훈보다 두살 어린 불문학도였다.

미진과는 반대로 화려한 미인에 가까운, 불문학도다운 세련된 외모를 지닌 여자였다. 향,이라고 했다. 은향인데, 그냥 친구들은 향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렇게 셋은 인사동 선술집에서 만났고 오후부터 흩뿌리던 비가 저녁이 되자 꽤 굵게 변해 내리고 있었다.

"나, 박사과정 마치는대로 약혼하려고"라며 기훈이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하였다.

"어....축하해...축하해요 은향씨"

"언니 그냥 편하게 말 놓으세요"라며 향은 술 대신 연신 주스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수진이 기훈에게 가볍게 눈을 흘겼다. 임신이지?

그말에 기훈이 머릴 벅벅 긁었다.

"뭐 어때. 곧 약혼한다며. 생략하고 결혼해라 정기훈!"

그말에 기훈이 "초대하면 올래?"라며 빙긋이 웃었다. 그러는데 향이 돌아와 대화는 끊어졌다.


향을 먼저 택시 태워 보내고 기훈과 수진은 인사동 거릴 함께 걸었다. 빗발은 좀 가늘어졌지만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우산 하나를 나눠쓴 둘은 서로의 어깨가 밀착한채 걸어야 했다.

"니 그말이 잊히질 않아. 우리 하교 근처에서 봤을때 니가 했던"

"응?"

"'추억같아'라던 그 말이"

"..."

하며 기훈이 슬쩍 수진의 어깨에 한팔을 둘렀다. 이게 뭘까, 수진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방금전 그의 아기를 가진 향을 차에 태워보내고 기훈이 하는 이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그러더니 그는 또 같은말을 되풀이했다.

"또 그런일 겪지 마"라고...

수진은 순간 자기 어깨에 엊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나쁜자식....



이후 기훈이 향과도 헤어졌다는 소식을 수진은 전해들었다. 추억처럼 첫눈이 내리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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