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호죠? 여기 관리실인데요"
윤미는 왜 관리실에서 전화가 왔는지 감을 잡을수가 없었다. 겨울로 접어들고는 추운날은 세탁기도 돌리지 않아 아래층 역류가 일어난것도 아닐텐데...
"무슨 일이시죠?"
"저기...좀 가도 될까요? 댁에 계시죠?"
이야기는 점점 더 꼬여가는 느낌이었다. 관리실에서 직접 윤미의 집으로 오겠다는 정도면 심각한 일일텐데...
"그냥 말씀하시죠 전화로"
"민원이 들어와서요...밤새 개가 짖는다는"
개? 윤미는 픽 웃음이 나왔다. 딱히 개를 싫어하는건 아니지만 동물에 대한 본능적 거리감때문에 한번도 개나 고양이를 키워본적도 그럴 마음도 가져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저 개 안키워요. 개 오면 피해 다니는데"
"그래요? 그럼 어느집이지?"
그렇게 전화를 끊고 이 말을 하나 마나를 윤미는 한참 고민했다. 왠지 고자질 같아서.
바로 옆집인 103호에서 개를 키우고 있었다. 두달전 이사온 이후로 한번도 그 개를 본적은 없지만 윤미가 도어락을 누른다거나 기척을 내면 안에서 캉캉 짖어대는 녀석이 있다. 이걸 관리실에 얘기해야 하나 마나를 고민하다 피해를 봤다는 사람도 있고 해서 윤미는 관리실로 전화를 했다.
"이거...말씀드릴까 말까 했는데요"
상대는 급 긴장하는 듯했다
"옆집이 키워요 개를"
"아, 그렇죠? 그럼 503호요?"
"네..근데 그집 개 요란하지 않아요. 밖에서 기척이 좀 나면 잠시 짖고 그러다 마는데"
"그렇죠?"
직원은 그렇죠를 되풀이했다. 민원은 들어왔지만 '피해자가 예민한 걸'로 결론내리면 되기 때문이었다.
"밤새 짖고 그런거 없어요. 그럼 저부터 불편했을거예요"라고 윤미가 쐐기를 박아주자 직원은 마음의 짐을 다 던듯이 "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나서, 윤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옆집이 개를 키우긴 하지만 '착한개'여서 밤새 짖거나 사납지는 않다는걸 알려준것이 그나마 그녀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줬다.
그러면서 어떤 녀석인지, 몇살인지 어떻게 생겼는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일주일 뒤에 해소되었다.
윤미가 마트에 가려고 다 저녁에 나오는데 동시에 503호 문이 열리더니 목줄을 한 자그만 비숑프리제를 데리고 주인인듯한 남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남자는 자기 또래였다 깔끔하고 세련된 도시풍의.
윤미와 남자는 동시에 목례를 나눴고 "새로 이사오신..."이라고 남자가 물었다.
이사온게 언제라고 이제야...그것도 바로 옆집이. 이런게 아파트의 삶이려니 하고 윤미는 어정쩡히 "네"라고 대답하였다. 둘이 같이 승강기를 기다리는 동안 자그만 비숑은 신기한듯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신경이 쓰였는지 개를 안아들며 "조용히 해"라고 주의를 줬다 짖지도 않은 개를.
그렇게 둘은 개와 함께 나란히 승강기에 올랐다.
1층에서 헤어지면서 둘은 "그럼"하고 고개를 꾸벅였다. 그리고 돌아서는데 윤미는 풋, 하고 웃음이 새나왔다. 남자는 그 시각에 개와 함께 어딘가를 가는지 주차장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잠시후 작은 경차 한대가 뒤에 그 비숑을 태우고 자기 옆을 천천히 스쳐갔다.
"나도 경차 한대 사서 운전하고 싶어"라고 했을때 경욱은 한사코 말렸던 기억이 났다.
"넌 안돼. 운전은 빠릿빠릿한 사람들이 하는거야"
반은 농으로 반은 진담으로 들리던 그말에 윤미는 기가 죽어버렸다. 그리고는 운전을 포기했지만 자기가 사려했던 바로 그 경차를 옆집 남자가 몰고 가는 걸 보니 또다시 운전이 하고 싶어졌다. 저런거 쓸만한 중고는 얼마나 할까.하며 그녀는 도보 5분거리의 마트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윤미는 옆집남자와 또 마주쳤다. 남자는 바구니에 콩나물 두부 호박등을 주워담고 있었다.
"양파가 싼데 ..."하고 뒤에서 윤미가 말을 하자 남자가 힐끔 돌아보더니 "아...또 보네요"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윤미도 간단한 저녁거리를 사러 나왔기에 비슷한 종류로 장을 보고 둘은 나란히 마트를 나왔다. 그러자 문앞에 매여져있던 비숑이 캉캉 짖어댔다. 뚝! 하고 남자가 야단을 치자 개는 금방 깨갱하고는 꼬리를 내리며 조용해졌다.
"이놈때문에 많이 힘드시죠?"
얼결에 그남자의 차에 올라 같이 집으로 오는 동안 남자가 윤미에게 미안해하며 말을 했다.
"안그래도 궁금했어요. 어떤 녀석인지"
"아예 성대 수술을 시켜버릴까 하는,""
"안돼요 그건!"
그렇게 대꾸를 하다보니 뒷자리 비숑이 안됐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왔다.
"그럴바엔 왜 키우나요? 그건 넘 이기적인거 아닌가요? 개가 아니고 사람이어도 그런 말이 쉽게 나올까요?"그녀가 숨도 쉬지 않고 다닥다닥 내뱉는 게 남자의 눈엔 꽤나 귀엽게 보인 모양이었다.
"언제 저희집에서 차라도 한잔 해요"라며 서로의 도어락을 누르면서 남자가 살짝 제안을 했다. 물론 의례적 인사일수도 있지만 윤미는 비숑과 가까이서 놀고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후로는 개를 대동한 남자를 단지 여기저기서 자주 목격하게 되었다.
"저 윤성민입니다"
마치 선이라도 보듯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하는 그에게 윤미도 뭐라 답을 해야 했다.
"저는 강윤미"
"이름이 이쁘네요.."
그리고나자 할말이 없어졌다. 윤미가 "그럼"하고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데 남자옆에서 줄에 매여 빤히 윤미를 보던 비숑이 캉캉 짖어댔다.
"안돼 하연아"라고 남자가 소리쳤다.
개 이름이 하연이? 그럼 사연있는 개라는 생각이 윤미를 스쳤다. 그러자 남자는 아차 싶은 얼굴로 바꾸더니 "전 여친이 키우던 개"라고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하였다.
"아 네..."
그러고는 둘의 대화는 다시 어색해졌다. 윤미는 하연이라는 그 개가 왠지 안쓰러워 살짝이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개는 꼬리르 살랑살랑 흔들었다.
"좀 만져봐도 돼요?"
그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숑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그 '하연이'라는 여자가 윤미는 더더욱 궁금해졌다.
"하연이가 결혼전에 키우던 강아지였어요"
며칠후 남자가 윤미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는 집에 와서 차라도 마시라는 말에 윤미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갈게요"라며 초대에 응했다. 그러자 그는 직접 내린 원두커피 두잔을 거실 테이블에 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옛여자가 키우던 개라고...
"결혼전이라면..."
"그게...실은 와이프였어요 하연인. 비록 식은 올리지 못했지만....웨딩샵에서 호텔 예식장으로 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그자리에서"
"아..."
결혼당일 신부를 잃어버렸으니 그 속이 오죽하랴 싶었다. 그리고는 그녀이 유품이 된 개를 키우는 남자,라는 생각에 윤미는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윤미씬 왜 여태 혼자...?"
윤미입으로 한번도 혼자라는 얘길 해본적이 없는데 그런 질문을 받으니 난감했다. 그렇다고 곧이 곧대로 얘기할수도 없었다. 결혼하려던 남자가 알고보니 양성애자였다는 사실을...
"어쩌다보니 그렇게..."
"죄송해요 괜한걸 물었네요 주제넘게. 우리가 얼마나 친하다고"라는 말에 이 남자, 냉정하구나 싶었다. '얼마나 친하다고'에 분명히 방점을 찍어 말했기 때문이다.
"다음엔 저희집에 오셔서 저녁이라도 해요"
"아 네..."
건성으로 들릴법한 대답을 하는 남자 옆에서 비숑이 조용히 둘을 올려다보았다.
이후로 그 집에선 개 짖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일부러 기척을 크게 내도 안에서 하연이, 그러니까 비숑이 캉캉 짖어대는 일은 없었다. 정말 성대수술이라도 시킨걸까, 그럼 안되는데....
이후 한달이 넘도록 남자와 비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트를 다녀오다 마주친 경비원이 아는척을 했다.
"이젠 시끄럽지 않죠? 이사갔으니"라고 말을 하였다.
그게 무슨 얘긴가 싶어, "503호가 이사 갔나요?"라고 윤미가 되물었다.
"몰랐어요? 바로 옆집인데?"
언제 그가 갔을까? 왜 떠났을까? 그녀는 그의 이사가 마치 자신의 잘못인양 느껴졌다. 그리고는 "어디로 갔는지는?"하고 자기가 생각해도 멍청한 질문을 하였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저기 1단지로 간다던데"
1단지라면 작은 길을 사이에 둔 곳을 말했다. 멀리 가는 것도 아니면서 왜 집을 옮겼을까,라는 생각에 그녀는 찜찜한 마음으로 승강기에 올랐다. 그리고는 자기 집에 들어서는 순간 해답을 찾았다.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았다는 데서 남자는, 성민은 부담을 느낀것이다. 흠이 되는 얘기가 아니었어도 , 윤미라도 그렇게 하고나면 뻘쭘해지고 어색했으리라...그걸 못참고 남자는 집까지 옮긴 것이다.
윤미는 마감시간이 임박했음에도 쓰던 칼럼을 마무리하지 않고 커저가 깜박거리는 모니터를 쳐다만 보았다.
서로가 아는척만 해도 그게 불편이 되고 폭력이 되는 시대라는게 그녀는 안타깝고 미안했다. 죽은 여자를 잊지 못해 그의 개까지 키우는 남자에게 언제 자기 집에 와서 저녁이라도 먹자고 한게 지나친 오지랖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한참 시간이 흐른후, 잇몸이 욱신거려 동네 치과를 찾았을때 윤미는 성민과 마주쳤다.윤미가 아는척을 하려는데 성민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쩌면 그와 잘될수도 있다는 막연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갖고 있던 터라 윤미는 적잖이 마음을 다쳤고 그의 이름이 호명돼서 그가 처치실로 들어갔을때 치과를 나와버렸다. "손님!"하고 부르는 접수계 간호사의 부름을 뒤로 한채.
그리고는 한블럭 떨어진 다른 치과에 들어서서야 그녀는 마음을 놓을수 있었다. 조금전 자신을 싸늘히 외면한 성민을 이제는 용서할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