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둘의 죽음은 누가봐도 이른것이었다. 해영은 부고문자를 받고 올것이 왔다는 생각에 가게문을 일찍 닫고 집으로 들어와 옷장을 뒤졌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춘추 한벌씩 검은색 옷을 마련해둔게 무엇보다 다행이었다.
정희는 첫 아이를 낳고 난뒤 자궁암판정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자궁적출을 권했고 그렇게 이른 나이에 자궁을 드러낸 그녀는 항암치료를 받으며 머리가 다 빠져갔고 급기야 난소로 암이 전이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젊은 나이여서 전이는 무척 빨랐고 그렇게 1년도 안돼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부고는 남편인 형진이 보냈다.
정희와 형진은 대학 커플로 2학년 말에 만나 내내 붙어다니다 4학년때 약혼을,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하였다. 사귀는 동안 둘이 잠시 헤어진 적이 있었다. 그때 형준은 해영을 불러내 술을 먹었고 그때 해영은 어떻게든 둘을 이어주려 노력했다.그리고 그다음날 형진과 정희는 다시 만났고 이후로는 순탄한 연애을 이어갔다.
"나 임신이래"
허니문 배이비를 '가져버렸다'고 울상을 짓던 정희가 해영은 아직도 눈에 선했다.
금방이라도 관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나 나올것만 같았다.
"소윤이. 정소윤. 어때?"
배가 어지간히 불러왔을때 해영과 정희는 대학교정에서 만났다.
"이름은 이쁜데 그래도 사주랑 보고 짓는게"
"우린 그런거 안믿어. 그이랑 머리 맞대고 지은거야. 이쁘다고 해주라"
"그래 정소윤 좋다"
그날 둘은 그렇게 교정을 같이 둘러보고 학교앞 고깃집에서 푸짐하게 저녁을 먹었다.
"너도 얼른 결혼해."
"누가 있어야 하지. 소개나 시켜주구"하며 해영이 살짝 눈을 흘기자 정희가 배시시 웃었다.
"형진씨가 그렇게 좋아?"
"좋지 그럼...그러니까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을거구"라며 정희는 혼자서 한우 3인분을 먹어치웠다. 몸은 아직도 가녀린데 식욕은 대단했다. 입덧시기에 만났을땐 물도 마시지 못하더니...
그런 정희가 갔다. 나이 서른 둘에.
해영이 빈소에 들어서자 상주인 형진이 살짝 목례를 했다.
분향을 하고 절을 하고 형진과 맞절을 하고 나니 딱히 할말이 없었다. 형진의 두눈은 이미 퉁퉁 부어있었다. 딸 소윤은 누가 봐주고 있는지 보이질 않았다.
"이제 해영씨가소윤이 이모노릇 단단히 해줘야 돼요"라며 형진이 힘들게 웃어보였다.
그말에 해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상을 치르고 사십구제도 지난 어느날 형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해영의 가게 근처라며 볼수 있냐고 하였다. 죽은 아내의 친구니 뭐 그럴수도 있다싶어 해영은 그날도 일찍 가게문을 닫고 약속장소로향했다. 형진은 장례식장에서 보았을때보다는 그래도 많이 좋아보였다. 살도 좀 오른듯했다...
"소윤이 잘 커요?"
"말놓자. 친군데 뭐..."
둘의 연애를 내내 지켜보았던 해영이니 친구라면 친구였다.
"잘크지 그럼. 이젠 아빠말도 안들어"하며 그가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올리며 찡긋 웃었다.
대학때 형진이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장에서 농구하는 걸 정희와 해영은 나란히 지켜보곤 하였다.
"저 열정으로 공부를 좀 하지"하며 정희는 툴툴댔지만 대학졸업도 전에 형진은 외국계 금융회사에 취직이 떡하니 돼서 동기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였다.
둘의 커피가 바닥을 보일 즈음"너 보고 싶어서 왔어"라고 형진이 내뱉었다.
"나?"
순간 해영은 둔기로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정희 짝꿍이었잖아"
그말에 해영은 안도했다...
"다음에 정희보러 갈때 나도 가자. 가서 인사해야지"
그날은 그렇게 차만 마시고 헤어졌다.
그리고는 보름후 주말에 해영은 형진이 모는 차를 타고 정희의 납골묘를 찾았다. 유리너머 영정속 정희는 마치 살아있는듯 활짝 웃고 있었다.
"정희야 나 왔어. 잘 있지 거기서?"하는데 주르륵 눈물이 해영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해영을 형진이 살포시 안아주었다. 그의 품에 안겨 해영은 한참을 울었다.
돌아오는길에 형진이 힘들게 입을 뗐다.
"다음주에 우리집에 올래? 소윤이 생일이거든. 생파를 해줘야 하는데 내가 뭘 알아야지"
"나도 잘 몰라 어떻게 하는지....웹 보면, 요즘은 다 음식 시켜서 한다든데..."
그 제안이 다소 부담은 됐지만 해영은 그리 해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주 해영은 직접 장을 봐서 소윤의 올망졸망한 꼬맹이 친구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이모, 이거 맛있어"라며 소윤은 해영이 만든 함박스테이크를 집어 입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영낙없이 정희를 빼닮은 소윤의 모습에 해영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그러는데 형진이 다가오더니 소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원하면 엄마라고 불러"
그말에 해영은 감짝 놀라 형진을 쳐다보았다. 형진은 웃고 있었다.
"이모지 어떻게 엄마야. 엄마는 하늘나라에 있는데"라며 소윤이 침울한 눈빛을 띄며 말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파티가 끝나자 서둘러 정리를 하고 해영은 형진의 빌라를 나섰다.
"아까 내가 한 말, 미안. 그냥 아이가 안됐다는 생각에..."
"알았어. 그래도 그런 말은 이젠 안하면 좋겠어. 이모로 잘해주면 되지"하고 해영은 자기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그뒤 형진은 자주 연락을 해왔다. 굳이 만나자는 것이 아니어도, 죽은 정희를 꿈에서 봤다는 둥, 납골묘에 가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는 둥 , 온통 아내의 죽음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이런말 오해하지 마...형진씨도 아직 젊은데 언제까지 혼자 살수는 없잖아"
그말을 하면서도 해영은 정희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하지만 산사람은 살아야 하는게 인생이므로 어쩔수 없었다.
"내가 아는 선배중에 돌싱이 하나 있어. 애 하나 두고 이혼했는데 애는 남편이 키우고"
그러자 형진이 물끄러미 해영을 쳐다보았다.
"너는 안되겠니?"
그말에 해영은 지난번 형진이 소윤에게 했던 '엄마라고 불러'라는 말이 떠올랐다. 혹시 이 남자가...하는 마음에 앞으로는 그의 연락을 받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좀 매몰차더라도 그를 차단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링을 다 고른 여대생쯤 보이는 젊은 여성 둘이 게산을 하고 나간 뒤 가게 문을 닫으려는데 형진이 불쑥 가게로 들어섰다.
"아...."
그 외에 다른 말을 하지 못하는 해영에게 형진이 다가왔다.
"내가 널 피곤하게 했구나...미안 . 니 말대로 다른 사람 만나볼게. 소개시켜줘"
하지만 해영은 이미 마음에서 형진을 내보낸 뒤라 그렇게 할수가 없었다. 그렇게 또 엮이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래도 일단 내뱉었던 말이기에 하는 시늉은 해야 했다.
그리고는 그 '아는 선배'라는 돌싱과 형진의 만남을 주선했다.
"그남자, 이상한 얘기 하더라?"
그 아는 선배 은숙이 전화를 걸어왔다.
"왜? 좋은 사람인데? 모난데도 없고"
"아니...재혼해도 아이는 안낳는대"
"그런 말을 해?"
"뭐야. 지 아이만 키우라는 거잖아. 그래서 난 그렇게는 못한다고 했어"하고 은숙은 전화를 끊었다.
해영은 왜 그런 그의 속내를 읽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은숙에게 면목이 없었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자 ,라고 다짐하고 차단을 풀었던 형진의 번호를 다시 막으려는데 그순간 벨이 울렸다. 좀 보자고. 집앞이라고.
집앞? 죽은 친구의 남편이 집앞까지 올일인가 싶어 해영은 피곤해서 자야겠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자 형진의 작은 탄식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마음이 흔들려 해영은 야상점퍼를 하나 걸치고 단지 놀이터로 갔다.
형진은 아이 하나의 그네를 밀어주고 있다가 해영을 보자 씩 웃었다.
그 웃음이...저 웃음 속에 알량한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다는걸 은숙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그와 일정 거리를 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은 차갑게 말을 건넸다.
"여긴 왜 ...올일이 있나요?"
해영이 다시 말을 높이자 형진은 그 속을 간파한듯 했다.
"길게 얘기 안할게요. 나 학교때도 늘 해영씨 지켜봤어"
그말에 해영은 휘청이며 옆에 정글짐을 움켜잡았다.
"그게 무슨"
"그걸 알고 정희도 그렇게 간거 같아..."
더는 대화를 끌어갈수 없어 해영이 돌아서는데 그가 왈칵 그녀를 안았다. 그러자 그네를 타던 아이가 손으로 입을 막고 크크 웃는게 보였다.
"이러지 마. 나 사는 데야 여기"
"우리 애낳고 살자 같이. 소윤이 동생 낳고. "
그가 스스럼 없이 내뱉는 말에 해영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는 다시 그의 전화를 차단했다.
그렇게 계절이 바뀔즈음 이번엔 형진의 부고를 받았다. 그의 폰에 적힌 연락처들을 보고 여동생이 보낸 부음이었다.
"고인에게 지병이라도?"
"아뇨 오빠 스스로"
자살이라니....
그러더니 형진의 여동생이 슬그머니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그 쪽지를 손에 움켜쥐고 병원 주차장으로 향하는 해영의 기억엔 '애낳고 같이 살자'던 형진의 수척한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다 잊어버려"라고 적혀있었다. 해영이 무슨 연애편지를 기대한 것도 아니지만 저리도 냉정한 마지막 말을 남기고 정을 떼고 간 그가 그순간은 몹시도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