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한 사랑
우리는 기계문명, 첨단산업이 절정에 이른 초연결망시대에 살고 있다. 무엇이든 원하고 노력하면 다 이룰거 같은 그런 세상에....그러나, 인류는 그 어느때보다 분자화되고 외롭게 산다. 이런 아이러니에 대한 질문을 이 영화는 던지고 있다.
어느날 아내 살해 혐의를 받는 프랭크가 탈옥에 성공해 10대 아들 헨리와 사는 이혼녀 아델앞에 나타난다. 이혼 이후 오랫동안 남자 없이 살아온 그녀는 처음엔 그를 경계하지만 이내 그와 가까와지고 이른바 야반도주까지 꿈꾼다. 영화는 아들인 헨리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영화는 두가지를 말한다. 고독과 이웃의 의미.
여기서 고독이란 심플한 의미로 '남자없는 성인 여자의 삶'으로 대변될 수 있다. 즉, 섹스없는 sexless life가 그것인데 아이러니 하게도 아델은 '조화로운 삶'이라는 책을 탐독한다. 즉, 그녀의 삶이 '조화롭지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배경이 된 1987년이나 21세기인 지금이나 남자의 성性과 여자의 성은 확연히 구분된다. 즉, 남자의 성이 예나 지금이나 지극히 오픈되고 자연스럽게 언급된다면 여자의 성은 내색하지 않아야 하고 심하면 그 욕구를 숨기기까지 해야 하는, 다시말해 , 이토록 첨단 문명의 시대에도 여전히 금기시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두번째 '이웃'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는 개개인의 고독을 이웃을 통해, 친구와 지인을 통해 해소하는듯 보인다. 그러나 가까운 이웃일수록, 나만의 삶, 즉, 프라이빗 한 나만의 삶을 많이 알수록 그들은 한순간에 감시자로 돌변할수 있다. 더 나아가 '고발자'가 되기까지 한다 . 음식을 나눠먹고 아이를 대신 돌봐주는 그 근저에는 상대를 마구 휘두르겠다는 폭력성과 속물근성이 존재한다. 그리고는 상대가 오랜 외로움에서 벗어나 겨우 '조화로운 삶'을 찾으려는 순간 마구 뭉개버리는 악역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인간은 무리에서 오히려 더더욱 외로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혼녀와 탈옥수의 사랑이라는 설정 자체가 평탄치 못한 여정을 내포하는 건 맞지만, 외롭게 살아온 두남녀의 사랑이 비로소 안착하게 되는 그 순간을 허물어뜨리는건 바로 아들 헨리라는 건 더더욱 아이러니하다. 누구보다 엄마의 행복과 엄마가 추구하는 남자가 있는 '조화로운 생'을 부정하는 그 심리는 그리 간단히 풀이되지 않는데 , 엄마의 새로운 사랑행각을 느긋이 바라봐주고 돕기까지 했던 헨리의 마음 깊숙이 외디푸스 컴플렉스(굳이 명명한다면)가 똬리를 틀고 있던건 아닐까?
이 영화는 이렇게 인간과 고독, 타인과의 부조화, 그리고 천륜간의 갈등이라는 꽤 심오하고 복잡한 문제를 제시한다. 타인이 있어 덜 외로운것도 , 홀로 있음으로 충족되는 것도 아닌, 불치의 '고독'이란 병과 가까운 아들이나 이웃이 언제든 적이 돼서 나를 공격할수 있다는'타자성'이 쓸쓸하고 애틋한 러브라인을 타고 스릴있게 111분동안 진행된다.
웰메이드면서도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연출의 내공이 돋보이고, 그저 <타이타닉>의 앳된 여배우로만 기억되던 케이트 윈슬렛의 후반부 농익은 연기를 감상할수 있는 < the reader>와 함께 최적의 영화라 할수있다.
타이틀 <labor day> 미국, 2014
감독 제이슨 라이트만
주연 케이트 윈슬렛, 조슈 브롤린
러닝타임 111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