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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번의 헤어질 결심

by 박순영

폰은 계속 울려댔고 강희는 아무래도 기범의 전환거 같아 불길했다. 그러다 전화는 끊어졌고 그녀가 겨우 한숨돌리는데 이번엔 띠링, 문자 알람이 들려왔다. 폰을 확인한 강희는 불길한 예감이 맞아 떨어진걸 확인했다. 기범이 보낸 문자였다.

'오늘 갑자기 일이 생겨 못보겠어. 다시 연락할게'

요즘들어 기범은 곧잘 만날 약속을 당일이 다 돼서 캔슬하거나 딜레이 하는 일이 잦아졌다.

강희는 이 만남이 끝을 향해 간다는 느낌에 마음의 준비를 하려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기범은 강희의 대학선배 영지의 애인이었다. 강희는 둘이 분명히 결혼할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느날 갑자기 영지로부터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녀사이야 그럴수 있다 쳐도 이유를 물어도 아무 답을 하지 못하는걸 보니 어지간히 둘 사이에 패인 골이 깊다는 걸 느끼고 더는 묻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기범이 강희에게 연락을 해왔고 강희는 당연히 영지를 떠올려 그를 멀리 했지만 결국엔 만나게 되었다.


"우리 좀 그렇지 않아요? 영지 언니도 있고"

"예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하면 너무 식상한가?"

기범이 찻잔을 두손으로 감싸며 물었다. 순간 강희는 영지와 기범이 헤어진 이유가 혹시 자신때문인가 싶어, 그래서 영지가 이유를 말하지 못한게 아닌가 싶어 움찔하였다.

"저는 좀 껄끄럽네요. 이 말하러 왔어요"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녀의 팔을 기범이 아플정도로 움켜쥐었다. 강희를 보는 그 눈빛은 차라리 애원의 그것이었다.

그날은 그렇게 헤어져왔지만 기범은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에게 연락을 해왔고 결국 강희는 영지에게 물어보게되었다.

"언니, 기범씨가 자꾸 연락하는데.."

그런데 기함할 얘기를 들은 영지가 아무말도 않고 한참을 있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니가 알아서 하는거지'라고 대답하였다.


어쨌든 이렇게 반승낙을 받고나니 강희도 일종의 '모험'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이번엔 강희가 기범에게 연락해서 둘은 대학로에서 만났다. 장주네의 연극을 같이 보고 강희가 자주 가는 파스타 전문점에 들어가 둘은 크림 파스타를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영지한테 얘기했더라고"

기범은 어느새 말을 내리고 있었다.

"영지언니하고 아직도 연락하나봐요?"

"우리 원수져서 헤어진게 아니니까"

그러자 둘의 이별이 더더욱 궁금했지만 강희는 더는 따져묻지 않기로 했다.이제는 영지가 아닌 강희 자신의 남자가 되었고 둘사이가 순연하게만 흘러가면 결혼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명작가의 삶이란게 빤해서 강희는 월급을 타면 일정액을 기범에게 주었고 기범은 머쓱해하면서도 받았다.

"나중에 내가 잘해줄게"

기범은 세상 다정한 남자처럼 행동했고 매너도 세련되었다.

영지언니는 왜 이런 남자와 헤어진걸까? 가끔 그런 의문이 강희를 스쳤지만 그럴때마다 강희는 이제 자신과 기범, 둘만 생각하기로 하였다.


둘이 1박으로 동해를 다녀온 뒤 둘은 부쩍 가까워졌고 강희는 머지않아 결혼말이 오갈거라 생각했다. 어서 기범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소리를 하면 기범은 허허 웃으며 '성격도 급하긴'하며 그녀를 포근히 안아주었다.



그러다 어느날밤 강희는 s대학 응급실의 전화를 받았다. 혹시 강기범씨를 아냐는 간호사의 냉랭한 목소리에 '사실혼 와이프'라고 둘러대고는 빠르게 차를 몰아 응급실로 향했다. 저만치 링거 두세개를 매달고 있는 기범은 정신이 돌아왔는지 말똥말똥 강희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기까지 했다.

"뭐야..."

"몰랐는데 저혈당 쇼크가 온거래..."

"그러니 운동좀 하래니까..."

그렇게 그날 간단한 처치를 받고 외래로 당뇨관리를 하기로 하고 응급실 비용을 강희가 정산한뒤 둘은 강희의 오피스텔로 함께 왔다.

"오늘 자구 갈거지?"

"말이라구..."하며 기범은 그날 아픈 몸에도 강희를 안았다.



"수영?"

"응....당뇨엔 수영이 좋다고 하드라구. 조깅 같은건 잘못하면 발가락 괴사가 일어날수 있대"

"그럼 해야지"

그렇게 강희는 그의 수영비를 대납하고 기범은 거의 매일 저녁 수영을 하러 다니는 눈치였다. 수영을 하면서 부쩍 그의 얼굴도 밝아졌고 뭔가 자기만의 비밀이라도 생긴 어린 소녀처럼 굴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내가 수영장 시찰을 가야할거 같아. 분명 뭐가 있어"라는 강희의 농담에 기범은 "그러든가"하고는 태연히 대답했다.

강희 입장에서는 어떻든 기범이 다시 기운을 얻고 밝아진것 자체가 좋았고 한동안 놓고 있던 소설을 다시 쓴다는 말에 큰 힘을 얻었다. 돈은 자기가 벌면 되고 기범은 글만 쓰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마저 듣었다...이제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 같았다.



그런데 기범의 입에서는 결혼의 ㄱ도 나오지 않았다. 이 남자 혹시 연애만 하려는 타입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지만 그렇다 해도 그의 마음 돌리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강희는 자기가 먼저 청혼을 하기로 하고 호텔 라운지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그러나 그날 기범은 자리에 나오지 않았고 한시간을 기다린뒤 강희가 자리에서 일어날 즈음 문자가 왔다.

"오늘 수영모임이 있어. 미안, 일찍 전화했어야 하는데"라는 기범의 문자를 보고 강희는 살짝 화가 났지만 뭐 그럴수 있다 넘어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기범은 곧잘 만날 약속을 어겼고 강희의 오피스텔을 찾는 횟수도 부쩍 줄었다. 그리고 섹스를 할때도 마지못해 하는 티가 났다.

"자기 여자 생겼어?"

한번은 강희가 운을 뗐고 그말에 기범은 "그래 생겼다"라며 응대했다.

그런 기범의 얼굴을 찬찬이 뜯어보던 강희는 피식 웃음이 새나왔고 그날 둘은 와인에 스테이크를 만들어 야식을 먹었다.

"저기...왜, 얘기 안해?"

"뭐?"

스테이크조각을 질겅질겅 씹으며 기범이 천진하게 되물었다.

"우리 결혼..."

"급해?"

"아니...우리 나이도 있고...애도 낳을 수 있는 시기가 있는데"

"하지 뭐 그럼...먼저 고향 부모님부터 찾아뵙자"

그말에 강희는 결혼이 이미 다 된 양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경제력이 없는 기범으로선 선뜻 청혼을 하기가 어려웠을거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기범은 자신의 경제력을 운운하며 '기반 잡히면'하고 번번이 미루곤 했다. 아무래도 기범의 신변에 일이 생긴거 같았지만 꼬치꼬치 물었다가는 역풍을 맞을거 같아 강희는 참고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밤 강희가 막 잠이 들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한동안 잊고 지낸 영지의 전화였다. 영지는 술에 취해있었다.

"언니 웬일?"

"니 둘 잘 돼가?"

그말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강희가 침묵하자

"힘들지?"라며 영지가 끌끌 혀를 차기까지 하였다.

순간 영지와 기범이 헤어진 이유가 분명 있다는 직감이 강희를 휩쓸고 갔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 이유를 안다 한들...

"그냥 니 생각나서.."라고 영지는 전화를 끊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술에 취해 자신에게 전화를 한 것도, 힘들지 ? 하고 물은것도...



"벌써 돈 다 썼어?"

간만에 기범을 만난 강희에게 기범은 지난번 강희가 이체해준 돈 100을 다 썼다고 했다.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뭐...병원비?"

"것두 있구..."하며 그가 말끝을 흐렸다.

"당신, 뒤봐주는 여자 있구나?"하며 강희가 눈을 흘기자 기범이 강희의 오른쪽 뺨을 살짝 꼬집었다.

"나도 돈 없는데...아껴 써야 돼"하고 강희는 그자리에서 추가 이체를 해주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점점 늘어났고 기범은 밑빠진 독처럼 돈을 주면 금방 썼다 하고 또 주면 또 썼다 하고를 반복했다. 아, 이래서 헤어졌나보다 영지 언니가....하며 강희는 자신이 그리 이상적인 상대를 만난게 아님을 인정해야했다. 하지만 걔중엔 돈관념이 없는 사람도 많으니 너무 이 부분에 예민하지 않기로 했다. 언제 차분히 얘기하면 해결되리라 마음 먹었다.

하지만 기범은 이제 아예 만남 자체를 회피하며 돈을 요구해왔다. 어떤때는 돈 500을 부쳐달라고까지 해서 강희는 기함을 할뻔 하였다.

"내가 그런 돈이 어딨어. 월급쟁인데"

"그럼 한 200, 300도 안될까?"

그말에 강희는 뭔가 급해도 한참 급한 일이 생겼다고 판단해 통장 잔고를 박박 긁어 돈 250을 기범에게 이체했다.

"근데 우리 본 지 오래 됐잖아"

"어...글빨이 좀 올라서...이거 다 쓰면 보자"하고 그는 만남을 또 미루었다.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려 해도 , 제 아무리 모처럼 필이 와서 글이 잘 써진다 해도, 자기 여자를 이렇게 방치할 정도로 안본다는게 이해가 되지 않아 강희는 서프라이즈겸 기범이 다니는 수영장 앞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오늘 만나면 기범이 좋아하는 오리구이를 먹을 생각이었다. 그러고 있는데 몸이 불편해 보이는 젊은 남자가 세면도구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고개를 제대로 가누지 못한채 유리문을 밀고 나왔다. 그런 그를 보면서 강희는 사지 육신 멀쩡히 태어난 자신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실감했다. 그런데 그 다음순간, 허겁지겁 그 청년을 따라 나오는듯한 기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범..."

강희가 그의 이름을 채 부르기도 전에 기범은 앞서간 장애 청년에게 뛰어가 그를 부축하고 같이 멀어져갔다.

이게 뭐지? 강희는 방금 전 자신이 본 광경을 해석할수가 없었다. 둘은 무슨 사이며 어떻게 저리도 친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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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 동생이야. 같은 반인데...뇌전증이라 말이나 행동이 어눌해"

그 주말, 일이 있다고 안보려 하는 기범의 뜻을 꺾고 강희가 기범의 원룸으로 갔을때 그가 한 말이었다.

"그런데...?"하는 순간 강희는 둔기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불쌍하잖아. 가족도 나 몰라라 해. 그래서 내가 치료비 몇번 대줬고...밥도 사주고..."

"그래서 그렇게 내가 돈 주면 금방 없고 그런거였어? 그사람한테 쓰느라고?"

"너 무슨 상상하는 거야?"

"이상하잖아 지금 말하는게""

그말에 "에이"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거칠게 여닫고 기범은 방에서 나가버렸다. 주인없는 어둠이 내리는 그 방에 홀로 앉아있으려니 강희의 의식은 점점 또렷해왔다. 그리고는 마침내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영지와 기범이 헤어진 이유를....영지가 차마 말하지 못한 이유를...


"꼭 그래야 돼? 너 후회 안해? 너, 나 없이 살수 있어?"

"젠더취향은 선천적이라 고쳐지지 않아"

강희는 이말을 내뱉는 동시에 통화를 종료했고 자기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런데 잠시 후 뭔가 축축한게 턱으로 흘러내리는 느낌에 티슈로 닦아보니 정말 피였다. 피는 계속 흘러내렸고 결국 강희는 119를 불러 응급실로 가야했다.

"보호자분 누구 없으세요?"

"..."

차마 기범의 전화번호를 댈수는 없었다.

"혼자예요. 아무도 없어요..."

그말에 간호사는 코를 찡긋거리더니

"어떻게든 살아야죠. 힘들어도"하고는 링거를 봐주고는 자리를 떴다.

아마도 간호사의 눈에는 강희가 자살 시도를 한걸로 보인 모양이었다. 차라리 죽고싶다는 생각이 그순간 강희를 파고들었다. 밖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고 세상을 하직하기 딱좋은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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