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도시에서 사랑을 꿈꾸다
우린 곧잘 사랑에 빠진다.. 아니, 그렇게 믿으며 산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는 상대에 대해 나는 과연 얼마나 아는걸까? 내앞에서의 그녀(그)와 안보이는 곳에서의 그녀(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은 아닐까? 가끔은 이런 의혹을 갖게 된다.
우린 외로움에 지쳐 누군가를 원한다. 외롭지 않은 사람은 굳이 , 자신의 결핍때문에 괴롭지 않은 사람은 굳이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랑은 , 타인의 손길은, 나의 허탈하고 텅빈내안의 싱크홀을 메꿔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tv구성작가와 유부남 pd의 가벼운 애정행각은 그냥 해프닝으로 끝난다. pd영수는 정략결혼 덕에 사회적으로 발돋음할수 있었지만 진정한 사랑에 대한 갈증에 시달리고 자연히 늘 함께 일하는 작가 수정에게 마음을 줄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녀는 키스까지는 허락하지만 그 이상은 단호히 거절한다.
그리고 어느날 영수의 아는 후배 재훈을 만나는 자리에 수정을 대동하고...재력가의 자제인 재훈의 도움으로 독립영화를 제작하겠다는 목적이 있다...
이렇게 주인공들은 돈과사랑이 뒤엉킨 자리에 동석하고 첫눈에 재훈은 수정에게 끌린다. 그리고는 집요하게 그녀에게 구애를 하지만 영수처럼 입술은 내주지만 그녀안으로의 '삽입'은 완강히 거절한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것은 그런 그녀가 '자신은 처녀'라고 말하는 대목이고, 그말의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이라할수있다....둘의, 아니 셋의 나른하게 뒤엉킨 관계의 전개가 주된 모티브가 된다.
영화는 세 주인공 각자의 시점으로 같은 내용을 되풀이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pd영수가 유부남인것도, 재훈에게 가벼운 섹스파트너가 따로 있는것도, 그리고 '처녀성'운운하는 수정이 친 오빠의 발기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도 이런 개개인의 시점에서 노출된다.
그렇다면 사랑의 조건 내지는 사랑의 결백성?이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는데,
셋다 이미 성에 대해 일정부분 '알만큼 아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특히 재훈과 수정은 마치 첫 상대인것처럼 서로에게 조심하고 양해를 구하고 때로는 섹스를 구걸하기도 한다...
그들의 이런 연기 내지는 내숭이 과연 그나름의 진정성을 얻는가,가 감독이 의도한 것이라 보여진다.
결말은 독자의 몫으로 남기기로 하지만, 홍상수라는 작가주의 감독의 초기영화문법을 읽을수 있는 작품인것만은 분명하다. 근래 작품보다는 템포있게, 덜 나른하게 풀려나가는 이야기의 실타래가 '흥행'을 어느정도 염두에 둔 상업영화의 틀과 아슬아슬하게 조우한다.
그렇다면 이은주가 연기한 '수정'의 캐릭터는, 명료함과는 거리가 먼 , 그래서 삶에 대한 기대나 열정이 거의 소진된 도시의 유령같은 존재다. 넉넉지 않은 가정환경과 한때 영화를 만들던 오빠가 이제는 폐인이 되다시피 사는게 안쓰러워 가끔은 그의 페니스를 자극해주는 것 정도를 '성'의 도달점이라 여길 만큼 사랑이니 섹스니 하는 것들에 대한 궁금함이나 환상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영수와는 가벼운 불륜을, 재훈과는 전희의 단계까지 이른다. 아니, 이르려고 노력한다.
인간이 자신을 극복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것은 결코 타인에 의해서는 이루어질수가 없다. 결국은 내 의지로, 나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나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재훈이 기다리고 있는 우이동 호텔로 향하는 수정은 아마도 재훈을 위한 의식같은 '흰색 원피스 잠옷'을 준비해간다. 흰색이 의미하는 바는 어렵지 않다. 그 위에 어떤그림을 그리게 될지, 이미 어느정도 세상의 때를 묻힌 그녀가 그 흰 도화지 위에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지는 독자의 상상으로 남기기로 한다.
사견인데, 이은주만큼 도시의 일상에 지치고 꿈을 놓아버린 인물을 핍진하게 연기해내는 여배우는 없는거 같다 . 과도한 인공미가 묻어나지 않는 자연스러운 외모에 거대 서사를 본능적으로 싫어할 거 같은 차분한 냉소주의가 뿜어나오는 , 놓치지 말았어야 하는 우리 청춘의 자화상이자, 실망속에서도 한줌 꿈을 움켜쥐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은 진정한 타인에게만 내어주겠다는 고독한 의지의 상징같다. 그랬어야 했는데...
타이틀 <오, 수정 Virgin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한국, 2000
감독 홍상수
출연 이은주 정보석 문성근
러닝타임 126분.